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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다에서 순교한 성서 번역자 아펜젤러 목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는 1885년 4월 5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목사로 선교사로 교사로 한국 근대사의 개척자로 여러 방면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서는 ‘성서 번역자’로서 아펜젤러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1885년 10월 13일자 아펜젤러의 편지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언더우드와 공동으로 한국어로 어떻게 신약성경을 번역할지 논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펜젤러는 입국 후 바로 언더우드와 함께 이수정역 마가복음을 개정하기 시작했고, 1887년 여름 이수정역의 개정판인 <마가의젼ᄒᆞᆫ복음셔언ᄒᆡ>를 출간하였다. 1887년 2월 7일 언더우드의 집에서 성경 번역을 위한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헤론 등이 참석하였다.  아펜젤러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가 처음부터 한국 문자를 습득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1년이 못 되어 한국어 문자를 자신의 사상을 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 언어처럼 익숙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아펜젤러는 1886년 4월 2일의 편지에서, 자신이 아직 다른 사람의 번역을 판단할 수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1887년 12월 25일 언더우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설교를 읽었다. 본인의 생각을 어학선생 조씨에게 들려 주면 조씨가 적당한 한국말로 표현해 준 원고였다. 1888년 3월의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한국어를 읽는 것과 올바른 문장 형태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1890년 1월 2일 아펜젤러의 연례보고서에는,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번역했던 누가복음의 개정판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으며, 이 작업은 거의 인쇄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아펜젤러는 1890년 3월 <누가복음젼>, <보라달로마인셔> 3,000부씩을 삼문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보라달로마인셔>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튼이 로스의 로마서를 수정한 것이다. (‘보라’는 ‘바울’의 중국식 번역이다.) 1891년 6월 상임성서위원회가 로스역 개정을 포기하고, 아펜젤러와 게일에게 새 번역을 하도록 하였다. 아펜젤러는 마태복음 번역을 시작하였고, 1892년 1월 20일 아펜젤러 번역 <마태복음젼>이 임시역본으로 30부 발행되었다. 이 해에 <마태복음젼> 1,500부(1,000부는 “하 님” 역, 500부는 “텬쥬”역)가 발간되었다. 한국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번역된 첫 성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은 1900년의 구역으로부터 지금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까지 이어지는 성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893년 5월 16일 스크랜튼의 집에서 상임성서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에서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스크랜튼 트롤로프 5명을 번역자로 임명하였다. 1895년 아펜젤러의 <마태복음>이 수정되어 출판되었다. 존스는 이 번역을 “원문에 충실하고 문체가 간단명료하며 표현이 부드럽다”고 말하였다. 1900년에는 신약전서 전체의 번역이 완료되어 출간되었다.  아펜젤러가 번역을 한 본문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이다. 1900년 5월 5일 성서공회 주일, 아펜젤러는 정동교회에서 완성된 신약전서를 손에 들고 감격적으로 설교하였다. “우리는 10년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신약전서의 한국어판을 완성하였습니다. … 이후부터 나는 성경봉독을 할 때는 이 책만 사용할 것이라고 회중 앞에 광고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책은 우리 주재 전도사와, 한문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아름다운 모국어의 장점에 눈 멀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00년 9월 9일 주일은 신약성서의 번역 완성을 기념하여 정동제일교회에서 공개 감사예배를 드렸다.  1902년 3월과 4월 아펜젤러와 게일은 아펜젤러의 서재에 모여서 고린도전서 7장까지 개정하고, 성경의 고유명사 3,000개를 정리, 작성하였다. 레널즈가 목포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6월 한 달은 3인이 목포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하였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성서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목포로 가던 도중에 군산 앞바다의 어청도 근해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순직하였다. 2012년 6월 1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사랑의 사도 헨리 아펜젤러 순교 110주년 추모 제1회 학술대회” 가 열렸다. 아펜젤러 목사의 후손인 캐린 울프 양은 인사말에서 “아펜젤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한 바 있다. 한글 성서 번역과 보급이야말로 ‘아펜젤러의 계획’이었고, 그를 통하여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제는 한국어 사용자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아펜젤러의 꿈이었고 계획이었다.   출처 : 2012년 성서한국 가을 58권 3호, 6-7쪽, 전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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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1903년)

이 글은 <월남 이상재 선생 옥사 기록 공소산음>(곽신환 외 저,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2년)에서 발췌하였다. 이 책 안에는 1902년 개역당 사건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등의 개혁파 인사들이 성서공회로 보낸 감사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들은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구금되어 복역 중 1903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04년 3월에 석방되어 옥중 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입교하였다. 이 때 이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유성준은 후에 <신약전서 국한문>(1906년)의 번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03년 1월에는 감옥 안에 도서실이 설치되고, 벙커(D. A. Bunker) 게일(J. S. Gale) 등과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300종 520여 권의 서적을 제공하였다.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은 성서공회의 도움으로 많은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특히 신구약 성경을 읽고 감옥 안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기독교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두정 홍재기(두정 홍재기 : 홍재기는 중추원의원(中樞院議員)이었고, 출옥 후 대한구락부(大韓俱樂部) 총무 등의 일을 맡았다. 대한구락부는 친목과 문화운동을 목적으로 1905년 11월에 결성되었다. 회원은 200여 명이었며,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연설회 등을 개최하였다.)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진실로 하늘 아버지가 빚어내고 녹이고 감응하고 변화시킴이 아니면 어떻게 생육하겠는가? 순식간에 물욕에 가리어서 그 애초의 참된 근원을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게 되니 어찌 스스로 안타깝지 않은가.임인(1902)년 봄 갑자기 죄를 뒤집어쓰고 여러 달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서 보냈는데, 무슨 행운인가! 감옥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옥에 학교를 세워 뭇 죄수들을 교육하였다. 성서공회에서 이를 듣고 즐거워하여 신·구약 성경과 여러 사상가들의 교습책을 많이 가져와 배울 것을 권면하여 읽어볼 수 있게 되었는데, 여러 달 침잠하여 공부하니 뒤덮은 띠풀이 홀연히 걷히듯 갑자기 생각이 일어나 본원을 탐구하여 끝없는 경지를 회복하니, 하루라도 이 책이 없으면 안 되고 하루라도 이 가르침이 없으면 안 되었다.모든 말씀이 측은히 여기고 애달파하는 마음과 따뜻한 사랑이니 하늘이 비추는 곳에 빛이 없는 곳이 없다. 항시 경외의 마음을 지니고 선을 행하고 악을 범하지 않으니 대주재이신 상제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거울 같이, 형체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이 감찰하신다. 하늘에는 현존하는 도가 있어 선을 행하면 복이 되고 악을 범하면 재앙을 받으니, 나의 동포들이여! 발분하여 선을 행하고, 손을 잡고 이 진리를 함께 즐길 것을 진실로 바란다.출처 : 2012년 성서한국 여름 58권 2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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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초석을 놓으신 향정 할머니

존 로스 목사가 1882년에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국내에 들어와서 보급되면서 최초로 생긴 교회가 소래교회이다. 그 교회에 출석하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신 김향정 할머니의 삶을 그 손녀이신 장현심 할머니의 글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다.나의 친할머니, 김향정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들여오신 분이시다. 옛이야기가 구전되듯이 할머니의 얘기는 지금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된다. 186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18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실 때 이름이 없이 그냥 김 씨였다. 그러다가 향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던 동네에서 오셨다하여 향정(香井)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할머니는 결혼한 지 13년만인 1894년에야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다. 가산은 많았지만 자손이 귀했던 집안에 우리 아버지가 태어남으로 다시 활기를 찾은 셈이다. 증조부는 종이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사셨다. 전통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숭배하고 선비로서의 체모를 지킨 분이시다. 고을에 원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면 의례히 증조부를 찾아와 예를 표하였다.할머니는 종부로서 사방 삼십 리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는 넓은 농토와 대소가를 거느리고, 기제사와 사대봉사를 받드느라 하루 종일 바빴었다. 평상시에도 제사가 있을 때에는 동네의 일가아낙네들이 모여 제사를 도왔다. 그 절정은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초상을 치르는데, 일주일 내내 온 동네가 밥을 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밥을 먹으며 일을 하였다고 한다. 없는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느라 집안이 망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독자이신데 할머님 당신이 돌아가시면 똑같은 일을 아들 며느리가 고스란히 물려받아 평생을 조상치다꺼리만 하다가 말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셨다고 한다.야소교를 믿으면 조상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것을 믿기만 하면 적어도 당신의 제사는 안 지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솔내교회를 당신발로 찾아가셨다. 초가로 지은 집이었는데 당시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던 시절이어서 내외를 했다. 야소교에선 금하는 것이 여럿 있었다. 우선 담배를 끊어야 했다. 술과 투전도 금하고, 축첩을 금했다. 금지사항이 모두 할머니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다.교회에 들어가는 초가 담벼락 초입에는 장죽들을 죽 세워놓았다. 담배를 미처 끊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 세워둔 것이었다. 예배당은 두 칸으로 지어졌는데 한 칸은 여자, 한 칸은 남자가 앉는 장소였다. 설교는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했다. 가운데는 벽이 있고 그 벽 위쪽엔 네모진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곳을 통하여 여자들은 설교를 들었다.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교회를 다녔다. 초대교회에서 하던 대로 성경을 글자그대로 실천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그대로 사느라 주일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외출도 하지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십 리 떨어진 교회에 주일예배를 보기 위하여 할머니는 토요일에 달구지를 타고 집을 나섰다가 주일을 보내시고는 월요일에야 집으로 오셨다.할머니께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을 때 아버지는 심적 갈등이 많으셨다. 불교와 기독교 중에서 어느 것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하여서는 교리를 충분히 공부해보고 또 실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먼저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시고, 다음에는 평양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셨다. 그런 다음 선택한 것이 기독교였다.할머니께서 장문(張門)에 기독교를 들여놓은 사건은 할아버지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받들고 양반의 권위를 지키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믿는 기독교는 그것들과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조상에게 제사도 안 지낸다는 것이었다.할아버지께서는 기둥 같은 아들까지 교리를 공부한다고 하며 그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는 집안이 기울었다고 생각하셨고, 마침내는 불꾸러미를 만들어 지붕으로 던졌다.“이제 집안이 망했구나! 다 틀렸구나!”양반 체면을 집어 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불길이 타올라 기왓장이 이리저리 뻥뻥 튀는 가운데 통곡소리가 들리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불을 끄러 나왔다. 멍석에 물을 뿌려 지붕으로 던지고 또 던져 겨우 불길을 잡았다. 할아버지의 그러한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교회 가는 행보는 조금도 달라지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나고 좋은 것은 교회로 가져가고, 맛있는 것은 교회 사람들을 먼저 먹였다.할머니는 솔내(松川)교회를 나가는 게 멀고 힘이 들어 아버지에게 청을 하셨다.“나를 위하여 ‘장주애’에 교회를 세워다오.”아버지는 동네 초입에 있는 삼거리주막을 사서 교회를 지었다. 그것이 장주애교회이다. 그 교회로 해서 그 동네 사람 모두가 교인이 되었다. 다만 할아버지 한분만이 예외였다. 이유는 첩 할머니 때문이었다. 교회법에서 축첩을 금하는데 첩이 있으니 양심상 교회에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을 보면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주막을 사서 교회를 세웠던 것은 동네에 주막이 없어야 술을 멀리하고 건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교회가 생기므로 동네 분위기도 좋아지고 농한기에 장정들이 술집대신 교회의 사경회에 나와 성경공부를 하였다.출처 : 2012년 성서한국 여름 58권 2호, 10-11쪽, 장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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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5

5.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출판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성경은 신앙생활의 토대이고 근거이고 뿌리입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난지에서 완성이 되고 출판이 된 <성경전서개역한글판>은 이후 1998년에 <개역개정판>으로 다시 개정되어 나올 때까지, 한국 교회의 유일한 예배용 성경이 되었습니다. 왜 이 성경의 이름을 <개역한글판>이라고 했는지도 역사 속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대한성서공회사 3>을 통해서 해방 이후의 성서 사업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공회는 1952년 3월 숙원사업인 개역 한글판 성경전서 출판 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추진했다. 교정을 맡은 임영빈 총무는 참고하거나 비교할 다른 역본도 없고 의논할 성서학자도 없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며 교정지를 마무리했다. 그는 영국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정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교정지를 읽을 때 용서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용서는 모든 인생사에서 선한 덕이지만 교정에서만은 예외이다. 교정지를 읽을 때에는 비판적이고 속이 좁고 잘못을 찾아내고 완고하게 엄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결과 최선의 책이 생산된다. 나에게는 세 명의 교정자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너그럽거나 자유롭거나 우호적이거나 포용적이 되지 말고, 오류와 잘못을 찾아내는 전문가가 되라고 늘 격려한다. 만일 그들이 읽은 교정지에서 내가 오류를 찾아낼 때는 나는 그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찾아내는 데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에 교정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목회자로서 내 직원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찾는 전문가가 되라고 격려하는 내가 스스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본문이나 지리적 문제 때문에 당황스럽다. 나는 비교할 다른 본문도 없으며, 성서학자를 방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당시 실무에 종사했던 김태룡 간사에 의하면 출판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조판 체제는 구식대로 내리 글씨 2단으로 46배판 형으로 결정했다. 교정원으로 오인명(吳仁明; 새문안교회 장로)과 강석모(姜錫模; 연합신문 교정부장)가 임시직으로 수고했다. 한여름 더위에 작업이 강행되었는데, 임 총무는 초교(初校)에서부터 교료(校了)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재독하면서 직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직접 교정을 보았다. 활자를 넉넉히 주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교지에는 복자(伏字: 해당 글자의 활자가 없을 때 다른 글자의 활자를 뒤집어서 ☒☒☒와 같이 임시로 조판한 것)가 많았고, 재교지와 3교지에도 글자가 채워지지 않았다. 고유명사 분별을 위해 인명에는 외줄로 표시했고, 지명에는 쌍줄 옆줄 표시를 했으며, 절(節) 표시에는 작은 숫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교정하는 데는 8교, 9교까지 나갔다. 최종 교정은 외부의 교열(校閱)을 받았는데, 김태룡의 은사 안신영(安信永) 선생이 수고했다. 66권의 책명 글자는 활자가 아니고 붓글씨 연판(鉛版)인데 이 글씨는 최수섭(崔銖燮) 씨가 썼다. 인쇄용지와 제책 재료는 미국성서공회가 지원했다. 책형은 국배판, 강대용(講臺用)으로 하고 장정은 견포의(堅布衣) 제본으로 결정했는데, 46배판으로 조판했으므로, 책을 펴면 좌우상하에 훤하고 넓은 공간이 있어서 시원스러웠다. 초판은 3,000부를 발행했다. 인쇄용지와 천과 판지의 면세 통관은 한순규 간사가 처리했고, 8월 중에 인쇄를 끝내고 제책 공정에 들어갔다. 책 첫 장 속 표제(標題=內題)에 1952년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뒤끝에 단기 4285년 9월 1일 인쇄, 9월 10일 발행이란 날짜가 찍힌 한글판 성경전서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책 표제(標題)의 글씨는 오인명 장로님이 받아왔는데, 국민학교 여교사라고만 알고 그 성명을 모르고 넘어갔다. 아쉽게 생각한다. 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을 1단 23자 23행, 상하 2단으로 구약이 1,223쪽, 신약이 399쪽 도합 1,622쪽이다. 책 크기는 가로 22cm, 세로 28.5cm. 반포 값은 얼마였나? 본래 성서에는 책값 표시를 않기 때문에 책에서는 알 수 없다. 기독공보 1952년 11월 3일자에 실린 신간 광고에서 75,000원(圓)임이 밝혀진다. 간기(刊記)를 보면 발행소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92, 인쇄소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1가 8로 되어 있다. 이는 부산은 잠정적 임시 거처요 본거지는 서울임을 의식하고 실지와 다른 표시로 간기에 나타낸 것이다. 전쟁 중인 1952년 9월에, 피난지 부산에서 한글판 성경전서를 출판하였다. 당시의 교계신문도 “전국 교회 대망의 한글판 성경 완성”이라 하여 임영빈 총무의 담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백만 신도 대망의 한글판 성경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바친 노력과 경비는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기자는 한글판 성경 완성의 소식을 듣고 대한성서공회 총무 임영빈 목사를 찾아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고심담을 다음과 같이 듣게 되었다. 전란의 와중 전전유랑(轉轉流浪) 피난의 생활 중에서 이 거대한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금일 그 완성을 보게 된 것은 우으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특히 산파의 역할을 한 임영빈 총무의 노력이 대단하였음은 전교계가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연내의 숙제이던 한글 철자법 성경 교정과 인쇄 출판은 근간 여러 가지 죽을 뻔 한 과정을 지내 이번에 그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글 성경의 인쇄를 시작하기는 금년 4월이고 인쇄가 끝나기는 9월 25일이다. 제본이 끝나려면 앞으로 한 10여일 걸릴 것 같다. 이 인쇄를 한 인쇄소는 피난 온 협진인쇄소요, 인쇄교정을 본 이들은 김진룡, 오인명, 강석모, 오한근 제씨며 또 임영빈 총무 안신영 선생들이다. 그들이 더운 여름 밤낮 교정을 보아 한글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 성경의 총 페이지 수는 1천 6백 14페이지로 예전 성경보다 3백 32페이지가 줄어서 책 매기도 좋고 모양도 좋게 되었다. 종이 값 인건비를 제하고 순 인쇄비와 제본비만이 1억 5천만 원이 되고 종이 값 인건비를 가산하면 2억 7, 8천만 원이나 된다. 우리는 이렇게 비싸게 박인 성경을 우리 교계에 어떻게 하여서든지 적당한 값으로 제공하려고 하여 판매정가를 7만 5천원으로 정했다. 이번에는 강대용으로 국판배판 4호 활자로 3천부만 인쇄했다. 보급판은 이 대본으로 축소 인쇄하여 추후에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초판을 인쇄할 때 앞뒤 판을 바꿀 때마다 한쪽 면만 인쇄된 것을 5장씩 별도로 빼서 일본의 로버트슨에게 보냈다. 그는 그것을 원고로 삼아 국판, 46판, 국반판 등 축쇄판을 1953년 도쿄에서 인쇄·제책하여 부산에 보내어 반포하도록 했다. 1952년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에서 처음으로 ‘한글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국한문’판과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옛 철자법 성서와 당시 정부에서 사용하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따르는 새 철자법을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했다. 한글 새 철자법으로 처음 출판된 이 성경의 출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4

4.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서사업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도저히 성서 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외국 성서공회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피난지에서도 최선을 대해서 성서를 보급한 담당자들이 있었기에 외국 성서공회들의 지원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한 가지 일도 저절로 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개정 원고를 부산으로 가지고 갔던 임영빈 총무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월 25일 남침한 북한의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성서공회 직원들은 그때까지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다행히 경리 담당자 한순규가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재단법인 기금과 예금을 인출하여 성서공회 금고에 확보해 두었다. 임영빈 총무는 서대문경찰서 앞에서 보위부에 끌려갔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왔으나, 공산당의 지시대로 매일 사무실에 나와 감시를 받았다.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임 총무는 전 직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을 주고, 각자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했다. 이에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은둔하거나 피난길에 올랐다. 성서공회도 1950년 9월과 1953년 11월에 성서회관이 두 번이나 파괴되고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서울을 떠나 피난지 부산에서의 사업은 생존을 위한 고투였다. 그러나 전쟁이 만든 폐허와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으며, 새 철자법으로 만든 한글판 개역 성경 원고를 보존하고 마침내 출판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었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도 한글판 개역 성경전서의 수정 원고가 항아리에 담겨 기적적으로 보존되는 일이 일어났다. 출판 담당자 김태룡은 폭격 당한 인쇄소 건물에서 사라진 100여 장을 제외한 한글 개역 성경 수정 원고를 찾아서 임 총무에게 인계했다. 이 귀중한 원고를 받은 임 총무는 부인과 큰 아들에게 몰래 시골 친척 집에 가서 숨겨두게 했는데, 이들은 원고를 김치 항아리에 담아 용감하게 먼 길을 헤치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서울 수복 직전 9월 26일 화재로 성서공회 건물이 전소했을 때 수많은 성서와 인쇄용지와 서류가 모두 불타고 말았지만, 이들의 위험을 무릅쓴 조치를 통해서, 한글판 개역 성경 원고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임 총무는 이 1차 수정 원고를 파내어 잘 간수했고 부산에 가져가서 2차 수정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공회 직원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관으로 사용할 마땅한 건물을 구할 수 없어서 우선 대청동 중앙장로교회 지하 한 칸을 빌려 사무실로 사용했다. 공회 직원들과 임영빈 총무도 1950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눈 내리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가족들을 배편으로 보내고 짐은 다른 배로 부쳤다. 그리고 자신은 남아서 뒷정리를 한 후 겨우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기차 칸마다 피난민들과 화물로 가득 찼고 자리가 없어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기차 지붕에 엎드려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지붕에 있던 이들 중에는 얼어서 죽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부산행 열차에서 한글 개역 성경 원고가 다시 한 번 안전하게 보관되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임 총무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썼다. 나는 성경 수정 원고를 트렁크 속에 넣어두었으나, 마지막 순간 화물들을 보낼 때, 원고를 트렁크에서 꺼내어 나의 작은 손가방에 넣었습니다. 트렁크를 잃어버리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무심코 그렇게 했습니다. 트렁크는 잃어버렸고 원고는 건졌습니다. 그 원고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역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겪은 경험을 통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통해서 주어진 여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나에게 역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한글 성경 수요가 급증할 것을 예상하던 임 총무는 1951년 2월 한글 성경 출판을 서두르기 위해서 일본 도쿄로 초청을 받아 갔다. 그러나 한글을 출판할 수 있는 인쇄소가 없었다. 일본인 인쇄공을 통해 활자를 주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한글을 몰라 작업이 원만하지 못했다. 임 총무는 1952년 3월 부산으로 돌아왔다. 임 총무가 돌아오면서 남포동 1가 53번지의 2층 목조 건물을 임시로 빌려 성서회관을 마련했다. 2층에는 임 총무의 가족이 살고 아래층은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 남포동 사무소에서 일본 도쿄의 로버트슨 협동총무가 보내준 한글 성경으로 1년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위해 수십만 권의 성서를 반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태룡은 공보부의 직영공장에서 좋지 못한 활자로나마 사진 원고용 인쇄를 만들었으며, 표제를 『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붙이고 표지를 도안하여 로버트슨에게 보냈다. 이 표제의 도안은 당시에 국민학교 저학년 교과서 표제를 붓글씨로 쓴 바 있는 최수섭(崔銖燮) 씨가 만들었다. 몇 달 후 그 『기쁜 소식』 10만 부를 인쇄하여 보내왔다. 성지 사진 64매를 넣어 편집한 누가복음 『기쁜 소식』은 권당 1,500원에 판매 보급했다. 이 『기쁜 소식』은 정부가 채택한 새 철자법으로 된 첫 한글 성서였기 때문에, 전쟁 중에 책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립 초중학교의 교과서로도 채택되었다. 사진이 들어간 큰 글씨의 복음서는 그림책이나 잡지처럼 편집되어 있어서 서울, 부산, 대구의 서점에서도 유치원생부터 청소년들에게까지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쁜 소식』은 1952년 한 해 동안 그 어느 책보다 잘 팔리는 책이 되어 전쟁 중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1882년 로스에 의해 첫 한글 복음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출간된 지 70주년이던 1952년에, 로스가 지향했던 아래 아가 없는 단순한 철자법을 채택한 『기쁜 소식 누가복음』이 어린이의 손에까지 들려 읽히게 되었다. 이 『기쁜 소식 누가복음』은 모두 20만권이 출판되어 보급이 되었다. 영국성서공회 지원: 성경전서 21,500권, 비용 6,350,000엔 미국성서공회 지원: 성경전서 3 0,000권, 비용 10,000,000엔 신약전서 200,000권, 비용 14,000,000엔 단편 성서 700,000권, 비용 3,500,000엔 삽화 누가복음 200,000권, 비용 3,600,000엔 미국성서공회 소계 31,100,000엔 = 86,000달러 1952년 부산에서 출간한 성서는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3,000부와 단편 89,700부, 합계 92,700부였다. 그 해에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는 718,783부의 성서를 보내주었다. 1950~1953년 출판된 성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34종 가운데, 성경전서는 런던(1950년), 동경(1950년, 관주), 동경(1952년, 한글판), 동경(1953년 관주), 동경(1953년, 두 가지 판)에서 출판되었다. 신약전서는, 동경(1950년, 관주), 동경(1950년, 부 시편), 동경(1950년 간이국한문), 동경(1952년, 한글판, 두 가지 판), 뉴욕(1953년)에서 출간되었고, 전쟁 전에 서울에서 출판된 판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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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3

3. 개역한글판 성경의 출판 준비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개정 작업과 조판 및 출판이 육이오 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완성된 역사는, 돌아볼수록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온통 혼란 속에 있을 때도 성서 사업을 감당했던 분들은 흔들림 없이 옛 철자법으로 되어 있던 <셩경개역>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정하는 작업을 서둘러 추진했던 일은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신문과 잡지 등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출판되고 있었습니다. 성서 사업을 추진했던 분들은 성경의 철자법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임영빈 총무가 1949년 3월 취임한 후 주력한 사업은 새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의 출판이었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개역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하여 1949년 상반기에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출판했고, 이어서 성경 전체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했으며, 조판 작업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모든 출판물이 새 한글 철자법을 채용하자, 성서공회도 새 철자법에 맞는 개역 성경을 출판하는 것이 시급했다. 1947년 성서위원회에서 김춘배 목사가 “성경을 새로 인쇄하려면 새 철자법을 사용하자”는 안을 제기했다. 1948년에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개역 성경의 철자법을 수정하기 시작하여 새 맞춤법을 적용한 『마태복음』을 출판했으나, 통일안의 기준에서 벗어나 많은 지적을 받은 후 중단 상태에 있었다. 임영빈 목사가 1949년 3월 제2대 총무로 취임한 후 주력한 첫 사업은 새로운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철자법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르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졌던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개역 한글판 성경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일단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1949년 상반기에 출판했고, 10월 말까지 3만 권 이상을 반포했다. 개역 성경의 맞춤법 수정 작업은 시작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50년 2월에 마무리될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김태룡이 성서 위에 그대로 붉은 잉크로 수정을 하면 강병주(姜炳周) 목사가 이를 감수하고 다시 임영빈 총무가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태룡은 이 작업이 끝나면 문교부 추천으로 강릉사범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임영빈 총무의 부탁으로 그 해 4월부터 공회 출판부의 정식 직원이 되어 성서의 조판과 출판을 담당했다. 1950년 4월부터 성경전서의 활자 개발과 조판 작업에 들어갔으며, 6월부터 교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경전서 100여 페이지의 초교가 나왔을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고, 폭격으로 인쇄 공장이 파괴되면서 성경전서의 출판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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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2

2.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이 되고,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성서 사업을 담당했던 분들은 성서공회 재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성서 보급 사업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진: 이 시기에 ‘연합성서공회(세계성서공회연합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신약개역>]] 성서공회는 해방 직후 혼란과 분열 속에서도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재건에 착수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리 점령 결정에 따라, 하지(J. R. Hodge) 중장 지휘 하에 미 육군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1945년 9월 9일 남한에 군정을 포고하고, 12일 아널드(A. V.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미 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정태응 총무는 미 군정 당국에 조선성서공회의 역사를 보고하고 적산으로 편입된 재산의 반환과 성서사업 재개를 요청했다. 군정의 적산 관리국은 9월 19일 공회의 사업 재개를 허락하고, 일제가 압류했던 재산을 정태응 총무에게 반환하고 적산 해제를 통고했다. 공회의 자산을 돌려받은 정태응 총무는 10월 11일 종로 성서회관을 다시 열고 성경 판매를 재개하는 한편, 오긍선 의사와 김관식 목사와 함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회 재건을 논의했다. 위원회는 이 날짜로 공회에 토지를 헌납한 이풍한(李豊漢) 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풍한은 대한제국 말기에 판서를 지냈으며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대지주였는데, 소유하고 있던 논밭 80만 평 가운데 30여만 평을 공회에 기증했다. 그가 이런 막대한 토지를 기부한 것은 해방의 충격과 함께 오랜 친구인 정태응 총무의 설득과 공회 사업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이풍한은 1945년 12월 언더우드(H. H. Underwood) 박사와 함께 성서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6년 11월 7일 해방 후 첫 성서위원회 연례회의가 열렸다. 성서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성서공회 재단 설립을 위해 임명된 실행위원회는 1947년 4월 30일 회의에서 재단법인 신청을 위한 공회 정관을 제정했다. 재단법인 설립은 재정적 자립과 함께 조선성서공회가 독립하고,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협력 기구로 남는 것을 의미했다. 1948년 5월 7일 미국성서공회 로버트슨(James C. F. Robertson) 박사가 한국에 부임하여, 임시 부총무 스코트를 대신하여 미국성서공회 대표자로서 부총무직을 맡았다. 정태응 총무는 70세 정년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성서공회에서 은퇴하고, 그의 후임은 성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에서 결정하도록 결의했다. 1948년 12월 23일에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는 이러한 결의에 따라 성서위원회의 지명 추천을 받은 임영빈 목사를 정태응 장로 퇴직 시 후임 총무로 임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조선성서공회의 명칭을 대한성서공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8월 23일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공식 출범한 공회는 1948년 11월부터 대한성서공회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49년에 공회에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조선성서공회가 대한성서공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임영빈 신임 총무가 취임했으며, 회계연도도 10월 31일자로 마감하도록 변경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를 협력공회로 초청했으며, 세 협력 공회의 대표는 한 명으로 하기로 하고 그를 부총무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회 이사들을 새로 선출했는데, 이후 성서위원회가 후보를 추천, 선임하기로 했다. 1949년 10월 26일 문교부장관의 명의로 대한성서공회 재단법인 인가가 나왔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성서공회는 군정 당국으로부터 적산에 포함되어 있던 성경전서 15,320권, 신약/구약전서 42,961권, 단편 509,343권(총 가치 91,207원)을 돌려받았고, 곧바로 이들의 판매에 들어갔다. 그 결과 12월까지 세 달 동안 성경전서 1,634권, 신약/구약전서 8,949권, 단편 231권을 판매했다. 몇 년 동안 성경이 판매되거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심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성경을 구하러 서울까지 오는 이들도 있었고, 성경을 구입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회가 가진 성경 재고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에 대처할 수 없었고 새로 인쇄할 비용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1945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기증한 미국성서공회에 다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1946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영국성서공회는 중국 중경에 있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위해 1,000부의 신약전서를 출판하도록 지원했다. 1945년 9월에 인쇄된 이 신약전서는 중국에서 미국성서공회 대리인으로 활동하던 모르텐슨(Ralph Mortensen)에 의해 9월 20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임정 부주석 겸 한인기독교공동체 회장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전달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성경 반송이 봉쇄된 상황에서 출판된 이 중경판 신약전서는 긴밀한 국제 협력의 산물이었다. 임정 요인과 독립지사들은 해방 이후 출판된 이 첫 한글 신약전서를 들고 10월과 11월에 귀국했다. 미국성서공회는 미국장로회의 지원으로 1945년 9월 뉴욕에서 25,000부의 한글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이 가운데 수천 권이 먼저 하와이에 있던 전쟁포로수용소의 한국인 포로들에게 보내졌다. 미국성서공회는 1947년 50,000부의 한글 신약전서와 25,000부의 복음서를 인쇄하여 미 군정 당국의 협조를 통해 서울 공회에 기증했다. 한편 성서공회 사업을 위해 과거에 오랫동안 실시했던 5월 마지막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는 전통도 1946년에 회복되어, 180여 개 교회가 성서주일 헌금 23,454원 59전을 공회에 전달했다. 이 가운데 6,200원은 정동교회 미군 예배에서 연보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금도 일반 후원자 10원, 특별 후원자 100원, 평생 후원자 1,000원 세 종류로 모집하여 437명의 후원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33,590원을 기부했다. 1946년 여름 홍수로 많은 교인들이 집을 잃었다. 공회는 이들을 위해 성경을 무료로 지급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1

<대한성서공회사 3>에는 1945년 해방 전후의 성서사업으로부터 2002년까지의 성서 사업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제 말 성서 사업이 강제로 중단된 때로부터, 해방 후 성서 사업이 다시 시작된 일과,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출판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진 일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그리고 육이오의 전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의 개정과 출판과 보급을 뒤돌아봄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성경이 선배 신앙인들이 피와 땀의 결실인 것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서주일 설교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가려 뽑아서 소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서공회사 3>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성서 사업 강제 종료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지를 받던 마지막 시기인 194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는 성서 사업 자체를 압박하다가 마침내 성서사업 자체를 중단시킵니다.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는 내용을 보면, 식민 통치의 은혜가 아니라 그 속셈이 얼마나 간악한지를 역설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신사참배와, 일본인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인 동방요배를 하며, 승전기도회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광복과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습니다.]] 1940년 9월 19일 실행위원회가 조직된 날 저녁 정태응 총무는 공회의 다른 직원 두 명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구속되었다. 외국인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는 간첩 혐의였다. 그는 70일 동안 감금된 후 11월 28일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 정책에 협력하도록 협박을 받았다. 정태응이 수감 중이던 11월 21일, 성서위원회 임시회의는 외국 선교사를 배제한 채 21명의 한국인과 일본인만으로 위원을 구성하기로 정관을 개정했다. 1941년 1월 1일 조선성서공회는 홉스 총무와 정태응 총무 책임 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월 10일 일본교회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서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 설립 방안을 논의했으며 3월에 재단법인을 구성했다. 이는 3월에 김경삼이 장로회 총회 특별위원을 통해 시가 30만원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기증하여 매년 경상비 1만 5천원을 공회에 제공하면서 법인 구성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4월 1일 정인과가 공회의 총무로 취임하고 공회의 업무를 장악했는데, 이는 일제 당국의 강요에 의해 통과된 계약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홉스 총무는 1941년 3월 18일 모든 재고와 재산을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에 인계하고 사업을 마감했다. 태평양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홉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태응을 조선성서공회 대리총무 겸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권한을 위임한 후, 안식년 휴가를 명목으로 5월 23일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이는 1895년 켄뮤어 총무의 부임 이후 46년간 서울 지부를 통해 성서사업을 해 온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정태응은 다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10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이 영국 이름이지만, 일본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석방되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노력한 끝에 공회 재단의 자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12월 22일 적산 관리법과 적산 관리 시행령을 공포하고, 29일 ‘적산관리법 시행규칙’을 공포한 후, 외국 선교부나 외국인이 관여한 재산을 압류했다. 1942년 5월 23일 모든 공회의 자산은 적산 관리인인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지부장의 손에 들어갔다. 정인과 총무를 비롯한 공회의 친일 직원과 성서위원회 위원들은 공회의 자산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6월 9일에는 성경 판매 중지 명령에 의해 성서사업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다만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 1942년 6월부터 4년간 성서공회 사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일본 천황제 이념과 국체의 본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와 모든 기독교 문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한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유대 민족주의 요소가 강한 구약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요한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하며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와 승전기도회에 참여했다. 그런 훼절과 수난의 교회에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해방이 찾아왔다.

설교자료

종 문서를 불태운 과부 교인

강화읍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과부교인’ 김씨 부인이 있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였지만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란 여종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어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18장을 읽다가 18절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였다. 그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 즉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요?” 그러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 “마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들이기로 했다. 종에서 양녀로 신분이 바뀐(롬8:14) 복섬이는 더욱 정성스럽게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얻은 딸로 더욱 기뻤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의 감동 또한 컸다.    이런 식이었다.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읽었다. 강화의 어떤 교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했던 것처럼 침으로 갠 진흙을 맹인 눈에 바르고(요9:6) 기적이 나티나기를 기다려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 같은 ‘문자적’ 신앙을 미신적인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문자적으로’ 실천함으로 뒤이어 나타날 이적에 기대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개종 1세대’는 성경을 읽되 ‘해석’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성경을 읽는 한국 교회 특유의 소박한 신앙 전통이 수립되었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설교자료

빚 문서를 태운 부자 교인

1900년 무렵 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에 종순일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잘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 전도사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교인이 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19:21)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들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음 섬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 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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