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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료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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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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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민수기 1330-31

설교 : 김명헌 목사(의림교회)

 

 

오늘의 성경 구절을 중심으로 역사학자 아놀드토인비가 ‘a study of history’라는 역사학에 관계되어진 책을 기술했습니다. 이 책은 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문명권을 21개의 문명권으로 나눈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이 문명권들이 어떻게 생성되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장하고 번영을 이루는지, 어떻게 쇠퇴하는지, 침체하는지, 해체되어지는지 등 여러 과정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독특한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패턴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게 되는데, 타성에 젖은 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타성에 젖은 사회가 새로운 변화를 수용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항상 창조적인 소수였음을 21개 문명권을 통해 똑같은 패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을 기록하는 데에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에 관계되어진 이 패턴들은 오늘날 교회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중 세계 교회의 역사도 동일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생성되어졌는가, 또 어떻게 성장해갔는가, 어떻게 쇠퇴해갔는가, 그리고 어떻게 침체해 가는가, 나중에 교회 문을 어떻게 닫았는가 하는 것까지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생성되었다가 쇠퇴하고 사라져간다면 희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은 항상 있습니다. 창조적 소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놀드토인비가 역사를 바라볼 때에 몇 가지 도전 상황이 있습니다. 그 도전은 열악한 땅, 새로운 땅에 대한 현실이 도전이 됩니다. 갑작스러운 외적의 침입, 지속적인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 이런 도전들을 어떻게 응전하는가하는 문제가 나타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이라고 하는 새로운 땅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습니다. 기존에 있던 땅에 대한 척박함이 있습니다.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에서 그 척박한 시간을 견뎌야했습니다. 아낙 자손들, 광야에 거주하는 민족들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공격해 옵니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도전에 대해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1절처럼 이야기 합니다. 대중들은 타성에 젖은 익숙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많은 대중들은 창조적인 소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대한성서공회가 하는 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방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중들의 관심과 대한성서공회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남에게 성서 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120개국에 23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진 성경을 인쇄해서 나누어주는 데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성서공회가 세워진 후 창의 끝과 같이 창조적인 소수의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무관심이 있었지만 땀 흘린 사람들, 눈물 흘린 기도, 그리고 피까지 흘린 사람들의 헌신 때문에 대한성서공회가 오늘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개신교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신교도 우리가 복음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땀 흘리고 피 흘리고 목숨 바친 사람들의 헌신 때문에 오늘 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서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없이 많은 땅에 대한 도전, 외세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대중들의 관심은 대한민국이 이토록 성장하는 데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할 때만 하더라도 세계 경제 순위 중 꼴찌에 해당되어질 정도로 굉장히 낮은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 경제 대국에 들어설 정도로 대한민국이 성장할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통하여, 대한성서공회를 통하여, 눈물 흘리는 새벽기도의 권사님들을 통하여, 창의 끝과 같은 작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세상과 한국교회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갈렙입니다. 여호수아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담대하게 신앙의 고백을 외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십만명입니다. 그 수십만명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중은 관심 없습니다. 대중은 협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대중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지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리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3500년 전 광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를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올라가겠다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아니면 대중과 함께 정신 나간 일이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대중에게 현혹당합니다. 내 앞길만 생각하여 정신 나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대중의 편협되어진 소리에, 타성에 젖은 소리에 익숙해져있는 이유는 있습니다.

 

33절을 보면, ‘거기서 내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열두지파의 대표 열두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옵니다. 중악 산악 지대의 길을 톻해 이스라엘을 정탐하고 오는데, 거기에 아낙 자손들의 후예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하면 100100패입니다. 이런 사고 속에는 31절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31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이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사람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 메뚜기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성서공회가 120개 나라의 234개 언어로 인쇄를 하여 이렇게 어마어마한 결과가 오기까지 이렇게 될 것을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막에 강을 내시고 광야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루십니다.

끊임없이 세상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역사가 따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칭찬을 합니다. ‘당신들은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의 인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대한성서공회의 믿음에는 역사라 따르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큰 교회를 이루는 것, 꿈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헌신으로 누군가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면, 나의 헌신으로 누군가가 예수를 만나게 된다면, 나의 헌신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한 나라 한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진다면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한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어떻게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135,000명의 미리암 군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올 때, 기드온 용사는 3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놀드토인비가 40년의 대작을 마치면서 딱 한소리 합니다. “세상은 도전과 응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끊임없는 도전 속에 믿음의 응전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을 택할 수 있기를, 하나님의 뜻을 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2823,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모잠비크와 태국 성경 기증 예식 중 전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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