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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료

모세의 생애와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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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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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히브리서 11장  23-26절

설교 : 조병우 목사(김천제일교회)

 

 

모세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면서 출생도 죽음도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모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광과 고난을 다 겪은 인물이다. 왕궁과 광야에서 극단적 대조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환경에서 살았고,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았던 인물이고 가장 귀한 지위와 가장 천한 지위를 다 가졌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계시를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모세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믿음과 충성의 모델과 같은 사람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스러움은 하나님이 한 인생의 삶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다. 모세는 이런 면에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산 사람이다.

 

1. 모세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었다.

한 어머니는 바로 공주이고 다른 한 어머니는 요게벳이다. 바로 공주는 세상적으로 볼 때 가장 완벽한 어머니이다. 가장 좋은 것을 자녀에게 다 줄 수 있는 어머니고, 요게벳은 자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어머니이다.

 

두 어머니는 다 귀한 분들이다. 그런데 말씀에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 공주의 아들로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다. 왜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을 포기했던 것일까, 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을 다 줄 수 있는 어머니고 다른 한 어머니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어머니인데 왜 세상 것을 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아들로 살았던 것일까?

 

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을 다 줄 수 있지만 믿음은 줄 수 없는 어머니이고 다른 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수 있는 믿음을 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 인생에게 진정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을 많이 줄 수 있었던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주고 말씀을 들려주어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어머니가 있다. 자식에게 믿음을 물려줄 수 있는 어머니와, 세상의 것을 물려주면서도 믿음은 물려주지 못하는 어머니이다. 성경을 보면 한나는 자식에게 세상 것을 물려주는 어머니가 아니다. 성전에서 자라게 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어머니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공주 같은 어머니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자식에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는 부모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부모에게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어릴 때 말씀을 심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마귀는 미래 세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학살한다. 애굽 왕 바로는 어린 아기를 죽였고, 헤롯도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유아들을 학살했다. 이유는 미래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일벌과 여왕벌은 똑같이 암벌이다. 그러나 여왕벌은 왕대에 넣어서 로열젤리를 먹이면 여왕벌이 되고 꿀만 먹이면 일벌이 된다. 같은 벌인데 일벌은 28-35일 생존하는데, 여왕벌은 3-5년의 수명을 가진다. 200만 마리의 알을 낳아서 다음 세대를 계승시키는 것이다. 다른 벌이 아니다. 그 차이는 태어났을 때에 무엇을 먹였느냐 하는 데 있다.

 

어릴 때에 말씀의 로열젤리를 먹이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서 역사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고, 세상의 꿀을 먹이면 평생을 일에 속한 생명으로 사는 일벌로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그 부모의 하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내 자녀가 그 부모가 섬기던 하나님을 부를 때에 그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응답이 되어야 하고 삶의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

 

2. 모세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다.

말씀에는 모세 앞에 두 가지 삶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나는 애굽의 모든 영광과 보화를 누리는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모세는 애굽의 보화보다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귀한 삶으로 생각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봄이라고 했다. 삶에는 분명히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세상 영광을 얻기 위한 삶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보는 삶이 있다. 모세는 세상의 영광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주시는 삶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삶은 사명 때문에 영광이 있는 것이지 소유 때문에 영광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에 사명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기가 갈 길을 찾은 사람이 된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사명의 길로 묘사를 했고 그 삶을 다 달렸을 때 면류관의 영광이 있음을 말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성도는 아무리 애굽의 보화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하더라도 사명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는 성막과 장막의 동행이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장막은 그들이 사는 공간이다. 언제나 성막과 장막은 함께 움직이고 함께 머물렀다. 그 동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인생의 동행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고, 구경꾼이 있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사명으로 사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이고, 곁에서 돕는 사람이 직분이다. 구경꾼은 알지만 영광이 없다. 뒤에서 방해하는 사람은 발꿈치를 무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계시록의 교회를 보면 방해꾼이 없는 교회는 없다.

 

3. 모세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120년 인생의 소원이다. 그런데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마치 결승점 앞에서 넘어진 것 같다. 한이 많은 죽음 같다. 모세는 자기가 소원하던 것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

 

그런데 모세의 죽음 이후의 모습이 나타나는 장면이 성경에 있는데,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 곁에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엘리야와 그리고 광야에서 죽은 모세와 함께 천국 영광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를 세우셨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그 대표가 모세와 엘리야인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인생의 진정한 보상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이 약속하시는 진정한 보상이라는 의미이다. 모세는 자기의 사명을 물려주고 죽었다. 즉 모세의 죽음은 사명을 물려주는 계승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모든 영광을 다 누리고 죽는 죽음이 있다. 이런 죽음을 볼 때 다 복이 있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볼 때 부자는 인간적으로는 복된 죽음을 죽은 사람이지만 음부에서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하며 물 한 방울을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모세의 죽음은 사명을 물려주고 죽은 죽음이다.

바울의 삶도 그렇다.

주님의 십자가도 그렇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사명을 물려주고 간 사람이다.

삼성병원에서 만든 청진기라는 영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의 몸에는 60조 개에서 100조 개의 세포가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세포는 다 각각 다른 수명이 있는데 90% 이상이 매년 사라지고 새로 재생된다고 한다. 5년의 주기로 보면 거의 모든 세포가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세포가 그 자리를 채운다.

 

백혈구 14, 적혈구 3개월, 피부 1개월, 장기는 4개월, 새로운 세포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세포는 건강한 몸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야 하고 옛 세포는 끝없이 죽어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현상을 히포토시스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몸에 남아서 암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나 교회나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지 않으면 그것이 암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명은 물려주어야 건강한 교회가 유지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사명을 물려주셨다.

 

모세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사명을 물려주었다는 점에서이다. 인생에게 죽음이 끝이 아닌 이유는 사명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말씀의 돌비(십계명)를 물려주고 떠났던 사람이었다.

 

 

출처 : 대한성서공회 제136회 정기이사회 조병우(김천제일교회 담임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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