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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반포와 새로운 영적 부흥 - 김선도

대한성서공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성경은 전 세계 2,092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는 복음과 성경만이 세계를 하나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헌신한 미국의 한 선교학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은 바로 성경연구와 말씀을 사모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의 기초에는 성경에 대한 사랑과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에 대한 긍정적 수용성은 한국선교 초기 권서들의 헌신적 역할과 성서공회의 희생적 봉사에 크게 힘입어 맺어진 열매인 것입니다. 이후로도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는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말씀으로 무장하는 강력한 한국교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고백을 먼저 말씀드린다면, 제가 북한 땅 신의주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공산당의 박해가 얼마나 심한지 예배당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몰래 숨어서 예배당에 갔습니다. 성경도 오래된 낡은 가죽 성경 한 권을 고이 간직하면서 그걸 숨겨가지고 다니며 교회에 나가곤 하였습니다. 오버 코트 속에 성경을 숨겨 가지고 다니며 주일 저녁에도, 수요일에도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코트에 성경을 넣어둔 것을 잊고 공산당에 가입한 친구에게 옷을 빌려주는 바람에 성경이 발견되었고, 그 결과로 장학금이 중단되는 등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만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 성경으로 인해 제 장래는 실패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오히려 성경 때문에 힘을 얻었고 성경이 저를 승리하게 한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57억 세상 사람 각자에게 성경을 한 권씩 전해주려는 비전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있는 그리고 동참해야 할 귀한 사명입니다. 이것이 성서공회의 귀한 사역의 근거와 목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대한성서공회의 지난 1994년의 활동만 보더라도 국내에서는 156만 부나 되는 단편성서가 반포되었고, 국외로는 전 세계 99개 나라에 120개 언어로 된 각종 성경과 신약 등 500만 부를 국내에서 출판 ․ 제작하여 해외에 보내는 놀라운 실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대한성서공회의 활동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에 쓰여지는 도구로써의 값진 헌신에 모든 교회들이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전개하는 성서사업 운동에 대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성경번역 사업에 모든 교단이 하나가 되도록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분파현상까지 복음과 통일을 위해 극복하려는 현 시점에서 성경반포 사업이 역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반포 사업에 이기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고 선교에 장애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기에 모든 교회가 함께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효과적인 전달을 훼방하려는 사탄의 궤계가 교계에 침투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는 성서주일을 통하여 말씀의 중요성과 함께 성경반포가 선교에 미치는 강력한 효과를 교우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성서주일이 전 교회가 성경반포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전략으로 이어지는 데는 미흡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주일은 단순한 모금의 차원이 아니라 말씀과 성경을 널리 전해야 할 교인들의 사명을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돼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반포 선교사’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기독교의 위기는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살아 있지 못할 때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삶 속에서 적용되고 개인의 심령을 넘어서 가정과 사회와 나라 전체에 강력히 역사하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반포에 관계되는 모든 봉사자들은 전달의 차원을 넘어서서 말씀의 능력을 믿고 불신자들의 심령에 잘 박힌 못과 같이 생명의 말씀을 심어나가는 노력이 교회와 함께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는 언제나 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정과,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성서공회의 근본목표가 모든 직원들에게 투철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영적 ․ 물적 에너지가 복음을 위해 쓰여지기 위해서는 사명 없이는 못합니다. 모든 기관이 변화해가는 이 시대에 말씀을 바로 전달하기 위해서 지혜를 짜내고 변화의 아픔을 감당해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일할 최상의 여건을 주셨음을 깨닫고 온 세계를 향해서 우리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성서공회에 신앙의 자긍심을 주시고 우뚝 세워주신 것은 더욱더 세계를 향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거짓과 사이비가 범람하는 이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이 파고 들어갈 수 있도록 더욱 귀한 일을 성취해 나가시며 새로운 창립 2세기를 맞이하는 성서공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출처: <성서한국> 1995년 여름 41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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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외우는 사람들

성경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유대인들은 유대식으로,헬라인은헬라식으로,유럽인은 유럽식으로,아프리카인은아프리카식으로 대했다.마찬가지로 한국은 한국식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해석하고, 실천했다. <사경회 : 한국 교회의 ‘유월절’>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대할 때 종교적 경외심을 갖고 최상의 예를 표하였다.성경은 함부로 해서는 안될 종교적 경외와 예배 대상이었다.한말 평양에서 활동하던 ‘마들린’이란 한국인 전도부인은 “아이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반드시 선반 위에 모셔 놓아야 하고 성경을 옮길 때는 항상 두 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하면서 성경을 팔았다고 하는데,이는 동양 특유의 ‘경전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성경은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경전’이었다. 이런 한국식 경전 문화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사경회이다.요즘 사경회는 길어야 사흘,그것도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 예배를 끼고 해치우는 것으로 끝나지만,옛날 사경회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이었고 길면 한 달이었다.선교사들은 농번기 때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수백 리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왠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경을 배웁니다.” 평양 선교사 블레어는 한국 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 생활을 접어 두고 오직 성경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합니다.이같이 성경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 전체가 하나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었다.사경회가1907년 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준 사실이다. <성경을 외우는 맹인 전도자> 초대 교회 사경회는 형식에서도 달랐다. 마치 서당에서 경전을 배우는 것과 같았다. 훈장 앞에서 학동들이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과 중용을 배우듯 교인들은 인도자 앞에서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읽으며 배워 나갔다. 초기 사경회 공부도 성경 외우기로 시작되었다. 암송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다. 선교사들은 이런 한국 교회의 성경 암송 문화에 대해 경이로운 찬사를 보냈다. 일제시대 감리교 협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데밍의 증언이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그의 눈이 되어 복음서 전체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그는 말씀 공부에 전념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사람은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과 절까지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들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에서는 이 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해 성경 배우는 깊은 맛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교인’은 개성의 전설적인 ‘맹인 전도자’ 백사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맹인이 되어 개종 전에는 명복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 백사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 동안 점쳐서 번 재산을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지팡이 하나 잡고 전도 길에 나서 고양∙파주∙장단∙개성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는 아들(백남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외워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성경 녹음기> ‘성경 암송’은 한국 교인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은사는 맹인처럼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인 여수 애양원 사람들의 ‘성경 암송’이 유명했다. 일제 말기인 1939년,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던 남장로회 선교사 뉴랜드의 증언이다. “애양원 식구 전체가 모인 가운데 사경회 마지막 행사로 성경 암송 대회를 했습니다.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이 환자를 상대로 성경 중에서 아무 곳이나 지정하면 그들이 그것을 외우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온 환자는 신약 전체를 외우는 남자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 곳에 들어온 지 수 년 되었는데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병도 병이려니와 흉폭하기 짝이 없는 거지 대장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곳에 들어와 성경을 접하고부터 사람이 변해 놀라운 기억력으로 성경을 외우게 되었답니다. 그는 시력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도 없었고 아래턱도 반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행복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택했고 우리는 20장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외우기 시작하자 다른 환자들은 성경을 펴서 그가 한 자라도 빼먹지 않는가 손으로 짚어 가며 확인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노인이 나와 기쁜 표정으로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애양원의 ‘성경 암송’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양원 식구들은 지금도 매주 모여 성경을 암송한다. 애양원에서 ‘성경 암송반’을 이끌고 있는 양재평 장로는 19살 때(1942년) 이 병에 걸려 애양원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30살 때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손가락이 뭉그러져 점자도 읽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성경을 외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시력까지 잃게 되자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하소연했어요. ‘눈까지 가져가시면 절보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요. ‘귀하고 입은 남겨 두었다.’ 그래서 성경을 듣고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는 20년만에 신약 성경을 외워 ‘성경 녹음기’가 되었다. 신약 전체를 순서대로 줄줄 외울 뿐 아니라 “빌립보서 3장 12절”하면 즉시 그 구절을 정확하게 기억해 외운다. 그래서 애양원 방문객들은 성경을 줄줄 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가 된다. 이같이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경 암송’ 문화야말로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다. 하긴 성경 암송대회가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또 있을까?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여름 46권-2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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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케도니아인

한국에 (개신교)복음이 들어오던 1870~80년대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변동기에 겪어야 할 혼돈과 창조의 시대였다.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내적인 개혁과 외적인 개방을 요구하는 신진세력과 기존 가치 체제와 사회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 세력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빚어질 것은 자명했다. <‘조선에서 가장 귀한 책’>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대원군을 중심한 수구세력과 명성황후를 중심한 진보 세력의 무력 충돌로 발전된 이 사건 와중에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데 공험한 이수정이란 양반이 있었다. 그는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처음 목적은 농학과 법률, 우편, 해운 등 ‘개화된 문명’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882년 9월 일본에 도착한 직후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였던 츠다센을 만났다. 그런데 츠다센은 유럽 유학 중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농학사’를 설립, 운영하면서 일본 농업의 근대화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수정은 츠다센을 방문해 대화하는 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한문 족자에 눈길이 쏠렸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 팔복’ 말씀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동양의 고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츠다센은 이 호기심 많은 이방인에게 족자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읽을수록 그 책에 빨려 들었다. 그가 성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둘이 책을 한 보따리 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오.” 그리하여 ‘조선에 가장 귀한 책-성경’에 대한 외경스런 탐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도쿄로 게츠죠교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다. 이수정은 세례 받은 직후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권유와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그에게 지급되던 장학금을 중단하고 귀국을 종용하였고 가족도 나와서 “목숨이 위험하니 어서 빨리 ‘사교’(邪敎)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어떤 위협과 회유도 그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그는 성경 번역에 몰두하여 1884년, 한문 성경에 우리말 토(吐)를 단 형태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나왔고, 곧이어 마가복음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여 1885년 2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란 쪽복음이 인쇄되었다.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호소>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루미스와 매클레이, 녹스 등 자신을 돕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교회에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1883년 12월 13일에 쓴 편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 나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 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그의 편지도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성경을 번역한 것도 ‘민족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나와 선교하는 것이었다. 국내 분위기도 바뀌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 정보는 나라를 개방해서 외국과 교류하여 백성들의 처지를 개선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용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말라고 호소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배치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걱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나라 교사”는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66년 천주교인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만향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 전술이었다. 이수정은 이러한 ‘침략적 종교’가 지닌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근대화를 위한 개방과 개혁은 민족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수정은 우리 민족의 자기 개혁의 원리를 복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가르쳐 줄 선교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바는 지금 당장이라도 몇 명을 이곳 일본에 보내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협의하면서 사업 준비를 하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고 가장 안전하도고 적절한 방법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기를 간절하게 빌고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영문으로 번역된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같은 미국의 선교 잡지에 소개되었고 이 일로 이수정은 서방 기독교계에 ‘한국의 마케도니아인’(Macedonian of Korea)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시아의 서쪽 끝, 드로아에 머물고 있던 바울의 꿈속에 나타나 그로 하여금 유럽 선교의 길을 열게 만들었던 마케도니아인처럼(행 16:8~10), 아시아의 동쪽 끝 한국에서 건너온 이수정의 호소는 복음 선교의 물꼬를 한국 쪽으로 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편지가 서방에 전달된 1년 후 미국 교회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고 1885년 2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 한국 선교 개척단이 한국으로 가기 전 일본으로 들렀을 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한국 언어와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중 선발대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했을 때, 그들 짐 속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 마가복음이 들어 있었다. 어느 지역 개척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간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희귀한 경우였다. 출처 : 1999년 성서한국 가을 45권-3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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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서 주일과 교회 - 임영빈

어떤 이들은 성서주일 하면 성서공회의 주일이라고 생각하여 성서주일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에서 온 생각으로 곧 고쳐야 할 생각이다.성서주일은 성서공회의 주일이 아니라 성서의 주일 곧 우리 구속과 영생을 얻는 길을 주는 성서를 기념하는 주일이다. 성서주일은 성서공회가 생기기 전에 벌써 지켜온 주일이다. 성서공회가 생겨 성서 출판을 전문으로 하게 된 후에는 성서주일과 성서공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되었지마는 성서주일은 여전히 성서의 주일이요, 성서공회의 주일은 아니었다. 성서주일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1년 52주일 중에 한 주일을 택하여 성서의 의의와 성서가 주는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정하여 놓은 주일이다. 이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뜻, 그 오묘하고 감격한 뜻을 생각하고 그 성경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입고 영생에 들게 되고 부활하게 되었다. 그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감을 받고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갖게 되고 또 우리는 영원히 새로워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그 은혜가 감사하고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을 더욱 친하게 되고 성경을 더욱 정성과 열심을 받쳐 읽게 된다.성경의 존재를 감사하는 중에 성경을 출판하여 우리에게 공급하는 성서공회를 생각하게 되고 그 기관의 보존을 위하여 적은 정성의 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주일에 들어오는 헌금을 성서공회에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은혜를 감사하다가 생긴 일이지, 결코 성경은 제처 놓고 성서공회를 위하는 생각만으로 생긴 일은 아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교회나 신자는 성서를 기념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서에 대한 사랑이 커 가고 또 성서를 읽고 그 뜻대로 사는 일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성서공회를 기념하거나 말거나 그것은 큰 일이 아니지마는 성경을 기념하고 아니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존폐 문제요, 우리 신자의 신앙생활의 사활문제다. 성경을 모르는 교회, 성경을 모르는 신자, 생각만 하여도 모골이 송연하다.사하라사막을 여행하는 이들은 예전에 있었던 큰 도시의 폐허를 볼 수 있다. 거기는 훌륭하게 지었던 예배당 터도 있다. 그러나 터만 남았지 기독교에 대한 산 흔적은 없다. 여러 사람들이 알아낸 사실은 거기 교회에는 거기 말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없는 그 교회는 허물어지자 터만 남고 교우들은 뿔뿔이 헤어지자 기독교 신앙을 찾을 길이 없어졌다. 그러나 아프리카 동쪽 바다에 있는 어느 섬에는 교회가 흥왕하고 성경도 있었다. 중간에 핍박이 심하여 교회는 황폐하고 신자는 숨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핍박이 지나고 다시 자유의 시대가 될 때에 교회는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신자들이 성경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 고난 중에도 그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까닭이다. 성경을 읽는 중에 신앙―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을 간직할 수가 있었던 까닭이다.무슨 일이 생기거나―공산당이 점령하고 다스리거나, 무신론자가 집권하고 횡포하거나―그것은 아무 상관없이 성경을 가진 교회, 성경을 가진 신자는 그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께 향한 충성심은 언제든지 식지 아니한다.성경을 가진 교회, 성경을 가진 신자는 적그리스도가 와도 분별할 수 있고 사이비(似而非) 신학이 범람(汎濫)하여도 속지 아니한다. 겨같이 불려 다니고 갈대같이 쏠리기 잘하는 교회나 신자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을 모르니깐 표준이 없고 성경을 모르니까 판단력이 없다. 그래서 줏대 없고 용기 없는 교회나 신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성서주일을 맞는 우리는 이 주일의 뜻을 깊이 깨달을 것이다. 깨닫고 성경 읽기를 게을리 말 것이다.교회가 살려면 성경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성경으로 그 신도를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한다. 성경으로 그 신도의 생활지침, 그 사업지침을 삼게 하여야 한다. 교회는 무슨 일에든지 성경을 위주로 하여 생각하고 판단하여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능력을 얻어 살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신자로의 생명을 가지려면 성경을 무엇보다 더 사랑하고 중하게 여겨야 한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얻은 영감으로 모든 활동의 동력을 만들 것이다. 성경은 어떤 생활의 부문에는 필요하여도 다른 부문의 생활에는 필요치 않다고 하는 분리주의를 가져서는 아니 된다. 성경은 우리 생활 각 부문에다 산 힘을 주는 원기소다. 성경을 따라 생활하면 어떤 생활에서나 다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성경은 옛날 책이라 현대에는 맞지 않는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새 능력인 것을 모르는 말이다. 변론으로 이런 생각을 반발하려는 것보다는 성경을 살므로 그 능력을 보이는 것이 좋은 웅변이 된다.성서주일에 교회와 신자는 성경의 의의, 그 고마움, 그 은혜를 기념하고 새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현대 한국을 살펴보면 물질적으로는 큰 발전을 하였다.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자동차가 길을 메게 다닌다. 입은 옷이 자르르하고 먹는 음식이 기름지다. 한국이 물질적으로 발전하지 아니하였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덕면, 그 정신면을 보면 어떠한가?매일 신문에 큼직큼직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 주는지 알 수 있다. 도덕이 썩고 정신이 삐뚜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여야 먹고 살기가 힘 든다. 그러니까 어떻게 쉬운 길을 찾을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 나머지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도둑질까지는 아니하여도 속이기를 여반장으로 한다.속이지 못하는 사람만이 못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이 속이는 일이 크면 도둑질이 되는 것이다. 도둑질이나 속이는 것은 자기가 갈 정당한 길을 가지 않고 얻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정의와 등진 것이다. 여기에 복 받을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 교회는 성서주일을 지키게 된 것이다. 성경의 뜻과 그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기념하면서 현대의 모든 추악한 형편을 살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때처럼 필요한 때가 또 있는가 하고 느끼지 아니하는가?이 모든 사회적 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가르쳐 줄 사명을 가진 교회와 신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말씀으로 깨끗하여진 교회와 신자는 이 사회적 병을 진단할 수 있고 또 그 병을 고칠 처방을 낼 수 있다. 그 진단의 방법과 그 진단으로 만들 처방은 다 성경에 있다. 이 성경을 기초로 삼고 있는 교회와 신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번 성서주일에는 교회와 신자가 다함께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고 교회와 신자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우리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데 선후가 없고 당파가 있을 수 없다. 오직 주를 위하는 일편단심만 가지고 현대사회의 도덕병에 대한 희생적 책임을 느끼면 된다. 주를 위하여 이 사회를 깨끗이 하여야 하겠다는 아무 사심(私心)없는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성서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는 그 사명을 다 하였는가 반성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 있는지 살피고 그 말씀을 전보다 더욱 더 친하고 사랑하기를 맹세할 것이다.(출처: <성서한국>1998년 3월 16일 11권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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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름다운 일들

과부의 엽전 두 푼 “식모살이 푼푼이 모은 돈, 몽땅 성서사업에 희사” - 심정숙 아주머니의 미거식모살이 하는 아주머니가 푼푼이 모은 돈 9천원을 성서공회 사업에 써달라고 전하여 왔습니다. 그는 서울 시내 서대문구 대신동 142의 2호 장석영목사댁에서 식모살이 하는 심정숙(56세) 아주머니로서 지난 2월 14일 본 공회에 친히 찾아와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써 “푼푼이 모은 약소한 것이오나 금액을 보시지 마시고 제 마음을 보시고 받아 주시오”하고 일금 9천 원을 정중하게 전하여 왔습니다. 이에 감격한 직원들은 총무에게 안내한 후 동기와 사연을 물은즉 별로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우연히도 장석영 목사님께 온 <성서한국>이 책상 위에 있어서 읽고 읽고 또 읽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서공회 사업에 무엇인가 협조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고 하며 들고 온 손가방 속에서는 성서한국의 표지가 해어질 정도로 닳아져 통독한 흔적이 엿보였습니다.이 아주머니는 특히 “전쟁의 환난 중에서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 살면서도 무사히 지내온 것을 감사하는 뜻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굳은 신앙의 태도가 엿보였습니다. 심정숙 아주머니는 예산읍에서는 한때 그곳 감리교회의 권사로도 있었다 하며 작년 12월에 이곳 장석영 목사 댁에 와 있으며, 아들 둘이 충북 충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합니다. 그리하여 필자가 조용히 묻기를 “춘궁기가 다가와서 어려울 터인데 아들들의 농비에라도 보태어 쓰도록 할 것인데……” 하였더니 그는 정색하며 “그보다도 더 급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하며 “우리도 남의 도움만 받지 말고 속히 자립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끊어서 말하였습니다.이 말을 듣던 우리는 너무도 감격하여 눈시울이 뜨거워 더 묻지를 못하였으며 이 정성어린 “과부의 엽전 두 닢”은 필연코 현재 전개되고 있는 자립대책 기금의 밑거름이 되게 할 것을 다짐하면서 9천 원 중 3천 원은 평생회원 회비로, 6천 원은 자립찬조금으로 각각 입금하였습니다. 심씨 아주머니는 현재 신촌 대신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놓고 간 현금 속에서 나타난 여사의 편지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성서공회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시려고 희생적 봉사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굽어보시고 도우시어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실 줄 믿습니다. 뼈가 저리게 고맙고 감사하는 일은 영국과 미국서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셔서 우리나라의 성서공회를 돕는다 하오니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멀고 먼 나라에서 정성 어린 돈을 보내 주신다 하오니 진심으로 감사하옵니다. 아무쪼록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이 다른 나라에 은혜를 끼치는 큰 축복이 내리시기를 하나님께 기도 올립니다. 이 부족한 사람은 시골 농촌에서 생장한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늙은 여자올시다. 그런데 작년 12월에 이 서울 장석영 목사님 댁으로 식모의 책임을 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책상 위에 있는 성서한국이란 책을 읽어보고, 성서공회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하여 푼푼이 모은 약소한 것을 올리오니 금액을 보지 마옵시고 제 마음으로 보시옵소서. -하략- 심정숙 올림>위에 뒤 따른 미거“불구의 몸으로 눈물의 정성” - 권영석씨 금일봉위의 심정숙 아주머니의 정성 어린 자립 찬조 성금의 신문 기사를 읽고 무척 감복하고, 나도 비록 불구의 몸이지만 이대로 있을 수 없다하며 금일봉과 함께 지난 3월3일 다음의 편지 사연을 적어 본 공회에 보내온 갸륵한 미거가 있습니다. 그는 즉 경북 안동군 남선면 외하동 외하교회 권영석씨로 불구의 몸이란 것을 밝혀 왔습니다.<성서공회 여러분! 주님 은혜 중 안녕하십니까? 저는 불구의 몸으로 매일 매일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공회 총무님, 금번 저는 기독공보에서 식모살이로 모은 돈을 성서 사업에 바친 기사를 읽고 무척 탄복했습니다. 그래서 내 비록 불구의 몸으로 한술 밥에 설움 실어 눈물로 사는 인간일지언정 복음 전파회원이 되려고 이 약소한 금을 송금합니다. 성서공회의 발전을 기도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경북 안동 외하교회 권영석 올림>또 하나의 미거“14년 전의 회상 되새기며 홍익제 목사의 양심 수표” -성서 사업은 이래서 유지된다.6·25전,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어느 봄에 본 공회와 거래 관계로 약간의 성서대금이 청산되지 못하여 지금껏 마음에 꺼리어 오다가 지난 날의 회상을 되새기며 금 1,000원을 보내온 사실이 있습니다. 즉 지난 1월 31일부로 다음의 사실을 적은 대체 송금표는 현재 목포 성산교회의 홍익제 목사의 양심 수표였습니다.(당시에는 전남 담양에 계셨다 함)14년전의 서류는 난리로 소실되었고, 또한 부산 피난 생활에서도 화재를 당하여 본 공회의 서류라고는 재가되고 말았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 뒤 서류에 남은 외상값 마저도 제대로 받기 힘들고 갚으려 하지도 않으려는 세상에 이러한 양심 수표를 받게 된 공회 총무나 기타 직원 일동은 그저 감사 감격한 나머지 “하나님의 상점”은 이래서 유지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홍 목사의 송금표에 적힌 서한>전략, 졸자 1950년 봄 (혹 전년 말) 귀 공회의 성서(지의혹 견포의 소책) 20권을 당시 특별로 외상 구입하여 대금을 판매하는 대로 계산키로 하였던 것인데 6.25 사변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후 그 대금을 상환하려고 하다가 혼란기에 한해한해 지나서 지금까지 미뤄왔던 것이옵니다. 그 당시에 전남 담양교회 목사로 재직 시였습니다. 화폐 개혁 전 여러해 전에는 항상 1만환을 보내겠다고 생각하고만 있었던 것인데 이제 비로소 소액이오나 금 1,000원을 앙송하오니 수령 후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 하략- 목포 성산교회 홍익제 목사 배상>한일교회 주교 어린이들“정성어린 이바지 들고” - 성서공회 내방지난해 12월 27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내 신당동 67번지 소재 한일교회(기장) 유년주일학교 어린이 일동이 정성어린 헌금 3천원을 가지고 대표 17명이 인솔자 노별수, 홍지자 두 선생님을 따라 성서공회에 내방하였습니다.본 한일교회는 권연찬 목사의 담임과 김익선 목사의 지도 아래 주일학교 지도도 하여온다는바 특히 평소에도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하는 성서사업을 이해토록 교육함은 물론,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인식시키기 위하여 공회의 활동상황을 견학토록 데리고 왔었습니다. 그리하여 총무실에서 성서공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듣고 어린이들로부터 질문을 받아 보기도 하는 등 재미있는 시간을 가진 바도 있습니다.협성고등공민학교에서도 성서주일 헌금을!시내 내수동에 위치하고 있는 협성고등공민학교에서는 금년도에 학교로서 제일착으로 성서주일을 지켜 그 헌금을 보내 왔습니다. 즉 동교 지도과장의 인솔 하에 학생대표 세 사람이 지난 12월 9일(성서 주일 다음날) 헌금을 하자고 본 공회에 찾아 와서 금 300원을 납입하였습니다. 동교는 매해 성서주일을 지키고 있으며 지도 과장의 지도 아래 종교부의 활동이 활발함은 물론 고등공민학교로서는 동교가 아직까지 성서주일을 지키는 유일한 학교로 나타나 있습니다.(출처: <성서한국>1964년 제10권 제2호/자립 대책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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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말하는 종이 - 이용남

1733년 유럽의 몇몇 선교사들이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 에스키모인들은 추하고 더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전적이고 잔인하였다. 그들은 그들끼리 사랑의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5년여 동안 열심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으나 그들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절만 하였다.어느 날 성서를 번역하고 있는 존, 벡이라는 선교사집에 에스키모인들이 몰려와 문을 걷어차며 들이 닥쳤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적개심이 발로 되었다 생각하여 그 선교사는 순교를 각오하였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든 그들은 펜, 잉크, 그리고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들 가운데 카야르낙이란 자가 물었다. “이것이 무어요?”존 선교사는 흰 것은 종이요 종이에 그려진 검은 표시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과 똑같은 말(글)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종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카야르낙은 퉁명스럽게 종이를 불쑥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종이가 말하게 해보시오! 우리가 보는 데서…빨리 하시오.”선교사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선교사는 좋은 생각을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종이를 훑어보다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번역된 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읽어가다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잠깐 쉬었다. 그때 존 선교사는 카야르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의 얼굴은 침울해 있었고 그의 볼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종이가 더 말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존 선교사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카야르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후에 남은 성경을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와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낼 정도로 찔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히 4:12)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라 없는 사람이요, 부모 없는 고아라고 어느 분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들보다 부모가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된다.지난달 성서사업의 일환인 찬조회원 모집 차 부산엘 갔었다. 특히 이번 방문 기간 중에는 상애원교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상애원교회는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용호동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음성 나환자들이 사는 상애원 마을교회다. 담임목사인 이만규 목사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아 피곤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 한 마디라도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난민들을 위한 시영주택단지를 돌아 숲이 우거진 언덕을 넘어 돌아서자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이국적인 느낌까지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닭소리 때문에 이야기를 주고 받는 데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건축된 지 퍽 오래된 듯한 교회에서는 벌써부터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의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실에서 잠깐 쉰 뒤에 단에 올라섰다. 싸한 기분이 목 언저리에 감돌면서 오래전 어느 병원 시체실에서 맡았던 악취가 떠올랐다. 성가대석과 장로님들 좌석을 제외하고는 그냥 마룻바닥이었다.나는 사회하시는 이 목사님에게 주보 한 장을 달라고 하였다. 이 목사님은 이교회는 주보가 없단다. 육백여 명이 넘는 교회에 왜 주보가 없느냐고 반문했더니 주보를 인쇄하면 한 달에 약 6,000원 가량이 지출되는데 그것을 절약해서 복음사업에 쓰자고 당회에서 결의하여 부산기독교 방송국에 헌금하고 있단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예배가 시작되고 이층까지 꽉 들어찬 교인들을 보자 한국 초대교회가 연상되었다. 찬송이 시작되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둥병으로 아래턱이 떨어진 장로님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잇몸을 움직이며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붙은 손바닥을 치며 열심히 찬송 부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돋보기 위에다 또 돋보기를 쓰시고 확대경을 손에 드신 장로님이 찬송가와 눈의 거리를 5센티 정도로 가까이 하여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이 장로님도 손가락이 모자랐다.설교를 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도저히 성서사업에 협조해달라고 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설교가 끝나자 나는 그들에게 기도해주십사라는 부탁으로 말을 맺었다. 예배가 끝나자 이 목사님께서 꼭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가라고 부탁을 하여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기로 하였다. 다른 교회와는 달리 저녁예배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저녁시간에도 거의 낮 시간과 같은 수의 집회였다. 나는 그들의 열심에 감동되고 그들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외침을 외쳤다.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께서 특별히 성서반포사업에 참여하자는 권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부모가 있어도 만나지 못하며 아이들도 학교 갈 나이가 되면 격리시켜 기숙사에서 공부하게 하는 그들 중에서 80여 명에 달하는 회원이 생겼다. 멀리서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 자식을 품에 두지 못하는 그들, 그러나 내 민족의 살길이 말씀에 있으니 말씀사업에 협조하겠다는 그들, 성서공회의 발전과 공회의 직원들을 위하여 특별히 통성 기도하던 눈썹 없는 형제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출처: <성서한국>1973년 10월 31일 19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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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경, 어떻게 나눌 것인가? - 김명혁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귀한 선물 중의 하나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책이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자이며 교사이며, 또한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안경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1. 성경을 전해 받은 조선 사람들이와 같이 가장 큰 선물을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준 사람들이 있다. 독일 할레 출신인 개신교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가 1832년 마카오에서 암헤르스트경 호를 승선하여 중국의 산동 해안을 방문한 후 황해도 서해안을 거쳐 충청도 서해안에 도착했다.그는 그곳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그 곳 주민들에게 중국어 성경과 전도문서를 나누어주고 아울러 감자를 심어주고 간 일이 있었다.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어쨌든 이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미약한 첫 방문사업도 축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조선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이 큰 선물을 우리들에게 전해 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영국 웨일즈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인 로버트 토마스였다. 구즐라프의 조선 방문으로부터 33년이 지난 1885년 9월,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지후로부터 목선을 타고 조선 서해안에 도착하여 그 곳에 두 달 반 동안 머물면서 중국어 성경책을 그 곳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때 조선 사람들은 ‘목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책을 받았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 이듬 해인 1866년 또 다시 중국의 지후로부터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를 타고 9월 초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까지 올라왔다. 조선 병사들의 포화를 입어 배는 불타고 선원들과 함께 토마스 선교사도 피살되었으나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까지 그가 가지고 온 성경책을 조선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93년, 사무엘 마페트 선교사는 학습교인 반을 조직할 때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중국어 신약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된 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한다.2. 성경에 기초를 두고 세워진 한국 교회한국교회는 그 초기부터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주력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인 사경회로부터 한국교회는 탄생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사경회로부터 일어났다.“1907년 신년집회에 1,500여 명의 신자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의 모임을 갖는 동안 참석자들은 모두 소리내어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이때 그들은 진정한 오순절적 축복을 경험했다.” 1907년 부흥운동에 광신적 요소가 없었고 진정한 교회의 성장과 삶의 변화를 가져왔던 중요한 이유는 그 부흥운동이 성경에 기초를 둔 부흥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 이후에도 성경에 기초를 두고 기도로 뜨거워진 교회로 성장해 왔다. 길선주 목사는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묵시록을 암송하는 것으로써 하루의 생활을 시작했다.” 주기철 목사의 목회 사역도 “기도와 성경 읽기에 주력한” 사역이었다. “주목사는 성경을 읽으며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했다. 그리고 산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고 이슬에 젖은 몸으로 새벽에 집으로 돌아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3.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국교회한국교회는 이제 전해받은 성경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데까지 이르렀다. 지금 지구상에는 정치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성경을 소유하기가 힘든 곳이 많이 있다. 북한을 비롯한 중국, 러시아 그리고 수많은 모슬렘 나라들이 그러한 나라들이다.필자가 부이사장으로 있는 ‘소련선교회’(이사장 박원섭)는 그 동안 한국을 방문한 러시아인들이나 현지의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어 성경을 많이 전해주었다. 88올림픽 때는 한국을 방문한 러시아 인들에게 2,660여 부의 성경책을 전해주었고, 89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러시아인들에게 36,000여 부의 성경책을 나누어 주었으며 90년에는 세계침례교 대회에 참석한 구소련 침례교단 대표들에게 100,000여 부의 성경책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성경책 및 전도책자 보급을 통한 현지 선교를 계속해 오고 있다.타쉬켄트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수복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지난 1992년 초, 러시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들은 대한성서공회에서 이 지역 선교사 협의를 통해서 공급한 성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러시아어/한글신약 대조 성경 350부를 기증받았으며, 인편을 통해 한글성경(성경전서) 100여 부를 기증받아서 선교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한성서공회에서 1992년 이후 계속해서 러시아어 성경과 한글 신약전서를 이곳의 각 교회별로 기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94년부터는 대한성서공회에서 러시아성서공회의 성서사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 1993년 이곳에 러시아성서공회 타쉬켄트 지부가 개설되어, 러시아어 성경을 필요한 대로 구입하여 보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앞으로 우즈벡어 성경 구입 및 보급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실정입니다.”또 모스크바에서 사역하고 있는 허충강 선교사는 “모스크바에 소재하고 있는 러시아 성서공회는 자체 인쇄소가 없어서 일반 인쇄소 두 곳에 의뢰하여 성경을 인쇄하고 있습니다. 현재 약 20종류의 성경전서, 신약전서, 단편성서 등을 인쇄하고 있습니다. 이 공회는 1991년부터 성서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자체적으로 성경을 인쇄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1월부터였습니다. 현재 러시아성서공회의 성경 반포사업을 위해서 한국 성서공회에서도 협력하고 있으며, 현재 러시아성서공회의 출판 책임자가 11월 13일부터 22일까지 한국 성서공회를 방문하여 연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미국이나 유럽의 선교 단체들이 보내주는 성경들이 컨테이너를 통해서 도착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 러시아에 성경이 안 들어간 곳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들이 정보만 있다면 그리고 구입할 비용이 있다면 얼마든지 성경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비용만 있으면 다소 가격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성경 구입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성경보내기 운동이 구소련 선교에 미친 영향이 큽니다. 저 자신이 그 운동에 혜택을 누린 자요, 이미 경험한 바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과거와 같은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보고하고 있다.위의 보고에서 보는 대로 그 동안 대한성서공회와 소련선교회 그리고 각종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의 위험을 무릅쓴 헌신적인 사역으로 성경이 구소련 각지에 보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구소련 안에도 아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사정으로 또는 전달자의 부족으로 성경이 현지인들의 손에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는 정부 당국에서 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서적 특히 종교 서적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1987년 중국 남경에 설립된 애덕인쇄소에서 중국어 성경과 한글 성경이 인쇄되고 있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인쇄한 성경이 지난 해 이미 1천만 부를 넘었고, 또 금년에는 대한성서공회의 지원으로 한글 성경 10만 부가 인쇄되어 조선족 동포들에게 전해진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북한은 성경의 전달은 물론 성경의 소유가 금지된 나라이다.한국교회가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선교사들에 의해서 거저 받은 성경을 이제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세계 곳곳에 찾아가서 거저 전해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출처: <성서한국> 1996년 겨울 42권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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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서운동의 일화

18세기 말엽 영국 웨일즈(Wales) 서해안 지방은 지형이 험난하고 기후 조건도 좋지 않아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덟살 소녀 메리 존스(Mary Jones)에게는 매주 저녁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메리가 열 살이 되던 해, 찰스 목사가 세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3km도 넘는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오직 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공부하였다.얼마 후 성경공부를 하는 주일학교가 학교 선생님의 주선으로 시작되었는데, 메리는 첫날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미리 읽어보고 온다면 공부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과 자신이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첫 장이라고 알고 있던 말씀이 첫째 장이 아니고 둘째 장인 것을 알고 나서 ‘성경의 필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2년 전 자기 집에 와서 성경을 읽어도 좋다고 한 이반스 부인의 말을 잊지 않고 있던 메리는 매 토요일마다 가기로 약속하였다.드디어 처음으로 혼자서 성경을 읽게 된 메리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급하게 읽어서 성경 말씀을 제대로 마음을 새길 수 가 없었다. 이를 아쉬워한 메리는 “몇십 년이 걸려도 꼭 성경 한 권을 사겠다”고 다짐하였다. 성경을 가져야겠다는 그녀의 소망은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굳어져만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무로 저금통을 만들어 주면서 성경책 값을 마련할 수 있도록 그녀의 의지를 북돋아주었다.처음에는 일년 동안 애써 모은 것이 너무 적어 실망도 많이 하였고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학교도 못 가고 집안 일을 돕느라 돈을 모으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틈틈이 아이도 보고 삯바느질도 하고 닭도 치고 나무도 줍고 남의 일손도 도와가며 6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일하여 겨우 한 권의 성경책 값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웨일즈 성경은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흔하지도 않아서 웨일즈 지방에서조차 구할 수 없었다.수년 동안 모은 돈으로 몇 달에 걸쳐 빨라에 있는 찰스 목사에게서 겨우 웨일즈 성경을 구입했다는 윌리암스 선생의 말을 듣고 30km나 되는 길을 쉬지 않고 걸어 간 메리는 웨일즈 성경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인쇄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엄청난 절망감을 참을 수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이에 감동한 찰스 목사는 자기 성경을 그녀에게 내어 주며 위로하였다. 마침내 자기의 소유가 된 성경을 갖게 된 메리는 피곤함과 배고픔도 다 잊은 채 30km를 단숨에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함께 ‘메리의 성경’을 상 위에 놓고 공경하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성경 한 권을 갖기 위한 메리의 눈물겨운 이야기, 그리고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눈물을 흘린 메리의 이야기는 찰스 목사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갈급한 요구를 재인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802년 12월 찰스 목사는 런던에서 모인 기독교서회 회의에 참석하여 메리존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 이야기는 웨일즈 말로 된 성경을 갖기 원하는 웨일즈 사람의 한 표본이라고 역설하여 많은 참석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1804년 3월 7일 영국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되었다.이 새로운 사업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여 각지에서 헌금이 답지되고 성경책을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메리 존스의 성경에 대한 집념은 성서공회를 창립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고 이어서 1814년에는 네덜란드에, 1826년에는 스코틀랜드에 성서공회가 조직되는 등 세계적으로 성서사업이 활발하게 번져 나가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에는 13개국 대표들이 영국의 헤이워드  히드(Haywqrds Heath)에서 모임을 가지고 전 세계 모든 인류의 방언으로 성경을 펴서 말씀을 전할 목적으로 ‘세계성서공회연합회’를 조직하는 데에까지 이루게 되었다.현재 전 세계 197개국 가운데 126개국에 성서공회가 조직되어 성서사업을 수행해 오고 있으며, 성서공회는 조직되어 있지 않으나 성서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는 65개국으로, 지역별로 인접한 국가의 성서공회로부터 도움을 얻어 성서사업을 위해 일하고 있다.(출처: <성서한국> 1999년 봄 45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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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서와 나 - 박치순

내가 제일 처음 성경을 갖게 된 것은 소년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 날이었습니다. 가정은 믿지 않았고 살림은 넉넉지 못해서 성경책을 갖는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작해야 궤도 찬송가를 부르거나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격스런 찬송과 내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 속에서 전에 없었던 마음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닌 덕택으로 눈이 하얗게 쌓인 날 아침 곡이 없는 발간 뚜껑의 찬송과 함께 내 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성경책이 최우수상이라는 이름으로 내손에 들려졌습니다. 나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 감격했습니다. 내가 주일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 책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와 함께 소학을 마쳤으나 상급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 농사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오래전부터 교회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히 생각하시던 아버님께서 할 일이 많다면서 교회에 못 가게 하셨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어길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생각하여 아버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많은 매를 맞았고, 그것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그날 내 아버지는 그 빨간 뚜껑의 찬송과 그렇게도 귀한 성경책을 찢어 변소에 집어넣으신 일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픈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나는 그 길로 마음대로 예수믿고 또 전도자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공부길을 떠나 평안북도 강계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기독교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첫 여름방학에 집을 찾을 수 없는 나는 산수좋은 장수산 깊이 들어가 기도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생을 변화시킨 놀라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바람소리와 물소리 외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조용히 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간다고 볼이 붓도록 아버님에게 매 맞던 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주일을 범하지 않은 열심,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는 각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죄와 상관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새삼스럽게 수세기 전 교회사의 한 세대를 누빈 어거스틴의 회심 광경이 생각났습니다. 방탕하면서도 고민하던 그가 어느 날 정원을 거니는데 옆집에서 한 어린이가 책을 읽으라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들어가 성경을 펴 읽는 동안 로마서 13장 13절 낮에 같이 단정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에 부딛쳐 새 삶을 발견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이 자꾸만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나도 성경을 펴 들었습니다. 그 때 나는 마태복음 5장 53절~48절을 읽게 되었습니다.나는 그 순간 그렇게 열심이고 잘 믿던 나도 죄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추악한 죄인인 내 모습과 그 죄인을 대속하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십자가, 그리고 나를 새롭게 해 주는 성령의 역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부터 손에 들고만 다니던 성경이 내 마음속에 기록된 성서가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받은 성서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찢겨졌으나 어느 여름날 숲속에서 하나님께서 영으로 내 마음에 적어주신 말씀의 역사는 그 누구도 찢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나는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계속해서 살아 역사하심을 감사하게 느낌이다.“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출처: <성서한국> 1970년 6월 30일 19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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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말씀으로 말하게 하자” - 이용남 목사를 찾아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목사님을 찾아뵌 것은 목사님께서 본 공회에 재직하실 당시에 ‘교도소 성서보급회’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하셨고, 그 후에 보급회 회장도 맡으셔서 봉사하신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교도소 성서보급회’는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전인 1976년 3월 25일 종로에 있는 중앙감리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출발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교도소와 구치소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선교를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보급하기 위해서 설립된 단체입니다.”교도소 성서보급회를 설립하기까지는 김찬국 목사님의 산파 역할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교도소 성서보급회의 설립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군사정권 당시에 연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해직당한 김찬국 목사님(현 상지대학교 총장)이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 안에 신약성경은 있었는데 구약성경이 포함되어 있는 성경전서는 없더랍니다. 김 목사님은 구약학 교수인데 교도소 안에 구약성경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답니다. 당시 기드온협회가 교도소 안에 성경을 보급하고 있었는데, 신약성경만을 보급하고 있는 형편이었죠. 김 목사님이 출소한 이후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신구약성경을 넣어주자 해서 당시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모여 ‘교도소 성서보급회’를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도소 성서보급회가 모금을 해서 성경책 구입 경비의 50%를 대고, 나머지는 성서공회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해서 교도소에 신구약성경의 보급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도소 성서보급회의 성서보급이 현재 20여 년의 역사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교도소 성서보급회가 설립될 때, 창립 발기인으로는 어떤 분들이 참여하셨습니까?“당시에 도건일 목사, 유경재 목사(현안동교회), 김종희 목사(경신교회), 배상길 목사(목양교회) 등이 참여했고, 거기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이인수 장로가 합세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인수 장로(현 보급회 회장)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서보급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김목사님 등이 모금을 해오면, 저는 성서공회를 대신해서 교도소에 보급되는 성경을 50%의 가격으로 할인하여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 보급회가 전국의 교도소에 성경을 보내지 않는 교도소는 거의 없었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교도소 안에 많은 재소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고, 저도 그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하였습니다.”교도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급하다 보면 그 말씀으로 많은 재소자들이 변화 받은 사례도 있을텐데요. 지금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성경 도둑놈 이야기>“어쨌든 당시로서는 신구약성경을 보급하게 된 점이 퍽 고무적이었어요. 당시에는 교도소에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형편이어서, 많은 재소자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성경을 많이 읽었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서, 출소할 때 성경책을 가지고 나가다가 간수에게 들켰다고 해요. 교도관은 성경도 교도소의 기물인데 왜 들고 나가느냐고 빰을 때리며 야단을 치고는 성경도 빼앗더랍니다. 그 후에 그가 ‘나는 성경 도둑놈이었다’라는 글을 써서 교도소 성서보급회로 보내왔습니다. 더 잇아 나같은 성경 도둑놈이 없도록 성경을 충분하게 보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죠. 이 이야기가 기독교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모급이 이루어졌고, 더 많은 성경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성서보급회의 성서사업을 위해서는 성서를 구입하기 위한 헌금이 필요할 텐데요, 이 사업을 위해 어떤 분들이 모금에 참여하십니까?“회원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은데, 지속적 회원보다는 1회적 회원이 많습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분 중에는 목사님들이 꽤 많은데, 목사님들이 시무하시는 교회 예산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현재는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더러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그분들은 보급회에서 일하시는 임원들의 설교나, 특강을 통해 감동을 받아 후원하는 개인들입니다.”재소자들에게 성서를 보급하였을 때, 그분들이 받아들이는 정도는 어떻습니까?“저희들에게 긍정적인 소식이 많이 보고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안양교도소의 경우에는, 우리 보급회가 보내준 성경을 갖고 성경학교를 개최할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현재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이인수 장로님도 그 안에서 은혜받고 변화되어 나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아무래도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은 성서를 대할 때 일반 교인들하고는 많이 다르겠죠?“그들은 비교적 단순한 사람들이예요. 생활 방법이 단순하니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정해진 시간에 의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은 돈 벌어야 할 걱정이라고는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밖에 있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라고나 할까? 나도 가끔 교도소에 설교하러 가는데,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에게 괜한 두려움 같은 것이 없지 않아 있어서 그렇지, 메시지를 전하다 보면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오히려 나와 있는 사람들이 맨날 머릿속에 돈 생각밖에 안 들어있는 데 비해 이들은 단순해요. 밖에 있는 사람들이 돈 벌어야 하고, 애들 길러야 하는 등등의 복잡한 생각이 있는데 비해 그 사람들은 그게 없어요. 그들은 오히려 잘 받아들여요.<어느 살인범의 성경 이야기>전에 성서공회에서 전도지 관계의 일을 하셨던 안국선 목사님이 신문에 보도된 고O종 사건(자기 이모 목졸라 죽인 사람)을 보고, 기도하다가 교도소로 그를 찾아가 성경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O종 씨가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그를 포함한 살인범 등, 중한 죄를 짓고 복역하는 이들이 XX교도소에서 은혜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제가 그 곳을 찾아가서 취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을 만나고 나오는데, 그 곳 교도관 중의 하나가 ‘우리 XX교도소는 거꾸로 됐다’고 하더라구요. 그래 제가 ‘무엇이 거꾸로 됐습니까?’하고 물어봤더니, ‘원래 교도관이 하는 일은 죄수들이 답답하거나 상담하러 찾아오면 그들에게 상담해 주는 것인데, 우리 교도소에서는 반대로 교도관이 답답할 때 고O종이를 찾아갑니다. 그러면서 고O종이가 성경을 가지고 상담을 해 주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고, 때론 놀라운 답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고 씨를 만난 때가 그가 교도소에 들온 지 4, 5년쯤 되었을 때였는데, 그 친구 얘기가 그때까지 성경을 30번 정도 읽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밥먹고 그것만 한거지, 그래서 그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그의 성경을 보니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고, 많이 낡아 있었어요.“말씀으로 말하게 하자목사님께서 교도소 성서보급회에 거는 기대는 어떻습니까?“지금까지 교도소 성서보급회를 통하여 교도소에 보급된 성서의 반포수는 1994년 4월 말까지 성경전서가 140,818부, 신약전서가 2,565부에 이릅니다. 계속해서 교도소의 갇힌 자들에게 더 많은 양의 성서가 보급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보급회가 없었다면, 교도소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해마다 교도소에 보급되는 성경부수가 1만 부 정도라면, 굉장한 수치 아닙니까?”목사님께서는 한동안 성서공회에서 봉사하신 경험이 있으신데요. 이 때의 경험이 목사님의 목회에 영향을 끼쳤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제가 성서공회에서 일할 때 세계성서공회연합회(UBS)에서 내건 슬로건 중에 ‘말씀으로 말하게 하자(Let the Word speak)’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 설교 중에도 이 표어를 자주 인용합니다. 비교적 제가 설교 중에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는 편인데, 그것은 제가 성서공회에서 일한 수확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현장에서도 가급적이면 성경 원문을 많이 인용하려고 합니다. 예화도 가급적이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마지막으로, 성서사업에 대한 바람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지금까지 성서공회가 성서사업을 잘 해왔으나, 앞으로도 잘 해주리라 믿어요. 다만 요즈음 성경공회가 등장해서 안타까운데,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봐요. 바람이 있다면, 성서공회에다 전 세계의 성경에 관한 모든 자료와 문헌을 갖추어 놓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다음 세대들이 성경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면, 성서공회에 가서 성경에 대해서 모든 것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어요.”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이렇게 찾아와 주셨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출처: <성서한국> 1994년 겨울 40권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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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서자원을 개발하자 - 김준곤

책 한 권이 한 나라와 문화의 의식구조를 만드는 예가 허다하다. 인도의 의식구조를 진단해 보면 베다(Veda)경전과 관계가 있다. 동남아 일대의 불교권 국민들의 의식체질 속에는 불교경전이 뿌리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제국을 중심으로 한 3억의 회교국민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은 코란경전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우리들처럼 유교권 국민들의 전통적 의식습성 속에는 논어와 맹자 등의 영향이 많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일본인 1,700만 명이 열심히 믿고 있는 창가학회 회원들은 절복교전(折伏敎典)이라는 신앙지침서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아직도 마르크스의 자본톤으로 피 속까지 적화(赤禍)되어 있다. 자유와 혁명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루소(J.J. Rousseau)의 민약론(De Contrat Social)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상의 피를 받고 있다. 한편 8억의 크리스천은 성서를 생명의 말씀으로 먹으며 살고 있다. 3,500년이나 묵은 오래된 책인데 날이 갈수록 베스트셀러여서 1,200여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고 매년 쪽복음까지 1억 8천만 권이 팔린다고 한다. 또한 사상의 원천이어서 공산주의조차도 성서의 표절당한 이념이라고 토인비가 지적했거니와 민주주의의 불멸의 발언인 아브라함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위클리프(Wychff)의 최초의 영역성서 서문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는 민족들의 개화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남미와 북미의 오늘의 차이는 북미는 청교도들이 성서를 가지고 가서 건국정신의 터전을 삼은 데 비해 남미 기독교는 의식만 전해진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도 3, 4세기에 기독교가 널리 전해진 바 있어 유럽처럼 성서를 번역해서 일반화시켰더라면 현재의 구라파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문호 괴테는 도이치의 위인들과 위대한 것은 모두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도이치 말로 번역한 덕택이라고 말했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영국은 셰익스피어와 성서 두 책을 가진 나라인데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이 썼지만 성서는 영국을 만든 책」이라고 하였으며 60년간의 탁월한 선정을 통하여 영국기에서 해가 지지 않을 만큼 영광과 번영이 극치에 달했을 때 누가 묻기를 「그 비결이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서슴지 않고 그가 늘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성서」라고 대답했다.  약 100여 년 전 패전 텐막은 심각한 민족적 절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 니콜라이 그룬드빅(Nicolai Grundvig)과 그 동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나라를 사랑하라, 흙을 사랑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기숙하는 국민고등학교를 도처에 세워 오늘날의 텐막의 기틀을 닦았는데 그 때 국민고등학교 교과과정의 60%가 성서였다. 스위스는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나라다. 그 근본은 제네바가 철저히 성서주의자였던 존캘빈(John Calvin)의 성서적 행정의 표본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스위스의 대법원에는 지금도 법의 절대 표준이 성서에 있는데 그 벽화는 법관들이 서서 성서를 가리키고 있는 그림이다.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나라가 혼미해지면 종교부흥을 일으키곤 했다. 여호사밧 왕은 나라 안팎이 심히 어지러워지자 16명의 장관들을 각처로 파송해서 성서를 가르치게 했더니 민중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따라서 국방과 경제와 정치가 크게 부흥한 바 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각 급 학교의 교육의 기초는 히브리 성서이고 성서퀴즈가 전통적 민속게임이기도 하다. 소련에서도 성서인구가 나날이 늘고 지구상 어느 곳보다 순사한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있어 승리는 이미 예수 편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인 이 성서는 시대가 없는 인류의 책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경전보다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어 어느 책보다 많이 읽고 수백만이 믿고 그것으로 사는 우리 민족의 책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모든 어린이들이 어머니의 무릎에서 성서와 기도를 배운다면 그 이상의 민족교육은 없을 것이다. 성서로 닦아 놓은 마음은 옥토와 같아서 새마을을 심어도 잘되고 경제부흥의 나무를 심어도 잘 된다. 59,000여 자연부락 사랑방마다 서당처럼 성서를 가르치면 새마을과 함께 새마음이 가꾸어지고, 중고등학생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면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페니실린 항생제의 약효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약 1만 명의 임상실험을 했다고 들었다. 성서의 특효에 대한 임상실험은 페니실린 효과만큼 나은 통계적 임상케이스로 증명되고 있다.세계의 한국으로 등장할 통일한국의 새 얼도 이 책 속에서 안심하고 발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출처: <성서한국> 1973년 10월 31일 19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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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남수단 실룩어 성경 봉헌식 1년 후

말라칼(Malakal)은 아프리카 남수단 나일강 상류에 있는 도시이다. 2013년 5월 말라칼에서는 찬양과 환호성이 가득했다. 바로 간절히 바라던 첫 ‘실룩어 성경’의 봉헌식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지난해 실룩어 성경 봉헌식에 참석했던 엘리자베스 에드웍 와이는, 22년 긴 내전을 겪은 남수단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이 성경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꽤 긴 시간 동안 아버지를 살해한 이를 증오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상처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뿐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 실룩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지난 아픈 일을 잊고 털고 일어나는 데 큰 힘이 됩니다.”하지만 말라칼은 이제 더 이상 환호성과 찬양이 들리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말라칼을 비롯한 남수단 몇몇 곳에서 일어난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의 격렬한 내전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성경 봉헌식을 한 지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은 2013년 12월에 일어난 일이다.남수단성서공회의 총무 에드워드 카지보라(Edward Kajivora) 박사는 지금 말라칼을 비롯해 남수단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슬퍼하였다. 지금과 같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자기들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난 중에도 생명을 주는 ‘실룩어 성경’남수단의 내전으로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이 일로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바로 지난해 그들이 받은 ‘실룩어 성경’이 내전을 피해 난민촌이나 정착촌 등으로 도망간 실룩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로다(Roda)는 지금과 같은 힘든 시기에 실룩 성경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와 양식이 된다고 말한다.로다는 실룩어 성경 번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말라칼에 있던 그녀 또한 여느 실룩 부족 사람들처럼 이 격렬한 싸움에 휘말렸다. 거리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로다는 유엔(UN) 베이스 캠프로 도망쳤다.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고, 몸이 아파서 결국 주바(Juba)로 후송되었다.밤낮으로 성경을 읽는 실룩 사람들“실룩 사람들 중에 작년 기증식 때 성경을 받은 사람들은 밤낮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유엔 캠프에 있는 실룩 사람들이 쓰는 성경책은 너무 많이 봐서 닳아 없어질 지경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도 와서 이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분명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오토 그와도(Otto Gwado)는 또 다른 실룩어 성경의 번역자이고 성서공회의 직원이다. 그의 가족 또한 힘든 일을 겪었다. 그가 성서공회 일을 시작하려고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으로 먼저 나와 집을 알아보던 중 내전이 심해졌고, 말라칼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숲 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바까지 오는데 한 달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그의 온 가족에게 그 한 달은 참으로 힘겹고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많은 남수단 사람들처럼, 실룩 가족들도 이 내전 때문에 깊은 슬픔과 상처 그리고 불안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카지보라 총무는 말을 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듣기로 많은 실룩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가면서 성경책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착지인 와우 실룩이나 디탕, 룰 그리고 코톡과 같은 곳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슬픔, 트라우마, 그리고 불안감비록 유엔이 저희가 캠프에 성경을 ‘보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캠프에 들어올 때 성경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만은 성경을 갖고 있어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실룩 사람들에게 성경이 가장 필요한 때에 성경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실룩어 성경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전쟁 기간에는 필요로 하는 지역에 무언가를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부활절에 이루어진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내전 중에도, 남수단성서공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이 사람들이 다니기에 안전하지 않고 재정적인 궁핍함 때문에 성경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공회는 여전히 성서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도 그들이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성서공회는 2014년 부활절 기간 동안, 남수단 서편 국경지역인 에조(Ezo)에서 치료 사업을 시작했다.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이 사업 책임자인 클레로(Klero) 목사님은 아프리카에서 악명 높은 LRA라는 우간다 반군에게 고통당한 잔드(Zande) 사람들과 두 주간을 보냈던 분입니다. 이 지역은 또 다른 인접 분쟁지역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경에서 겨우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치료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LRA가 국경에 나타나 남수단 군에게 우리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라고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사진 > 기도하는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 참가자들에조의 부활주일<사진 > 부활주일 퍼레이드클레로 목사님은 부활절 기간에 치료 모임을 진행하면서 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담긴 사랑과 치료의 메세지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참 기뻤다고 고백했다. 참석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까지 용서하신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은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우리나라에 평화가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는 말을 클레로 목사님은 전했다.철저히 분단된 나라남수단은 정치적, 종족적으로 철저히 나누어졌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정부는 이번 전쟁이 종족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는 다릅니다. 이 싸움은 사실 크게는 딩카스(Dinkas)와 뉴어스(Nuers) 종족 사이의 일입니다. 이 두 종족 사이의 증오심은 상당히 깊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유엔의 난민캠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또한 정부군와 반란군은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군사로 쓰려고 모집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여기에 쉽게 끌려갑니다. 사람들이 쓰던 오래된 창과 활 대신 이젠 총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카지보라 총무는 마지막으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의 소망은 주님 한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서공회는 많은 남수단 사람들과 함께 끊임없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출처: 세계성서공회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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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첫 성경, 그 설렘

본 공회는 지난 2014년 7월에 멕시코성서공회의 요청으로 촐(Chol)어 신약전서 7,000부 를 제작하여 기증하였습니다. 이 성서의 봉헌예식은 멕시코성서공회의 주관으로 10월 10일 부터 12일까지 총 3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첫째 날 1,000명, 둘째 날 2,000명, 셋째 날에는 500명 정도의 촐 부족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봉헌식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였습 니다. 특별히 멕시코성서공회 총무는 본 공회와 한국교회 후원자들에게 촐어 신약전서의 기 증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말로 말씀하십니다. 멕시코의 툼발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촐 부족은 인구가 약 3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가 기독교인이고, 2천여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국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촐 부족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 운 스페인어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제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촐(Chol)어 로 된 성서를 읽으면서 말씀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료

[해외] 생명의 말씀, 삶이 되는 말씀 - 캄보디아 문자교실 -

9살 캄보디아 소녀 어크 콩(Eark Kong)은 성경 문자교실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어크는 그저 글자를 읽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에서 문자교실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어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단순히 글을 읽는 것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크는 성경 말씀에 담긴 생명을 알게 된 것이다.어크는 사실 그 지역 학교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캄보디아에서 어크처럼 가난하고 사는 곳이 변두리 지역이면 학교에 다니기가 매우 어렵다. “저 혼자서는 공부를 잘 못하겠어요. 매일 일을 하면서 공부하려면 조금씩 밖에 공부를 못해요. 학교는 가고 싶은데, 너무 멀어서 걸어갈 수가 없어요.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엄마와 할머니를 도와 매일 일하는 어크는 말했다.그래서 어크네 지역 교회 목사님은 어크네 집을 방문해서 성경 문자교실에 초대했다. 문자교실은 근방에 있던 캄보디아 성서공회를 통해 지원되는 사업이었다. 어크의 엄마는 가서 배우고 오라고 하였고, 곧 어크는 유창하게 글자를 읽게 되었다.하지만 글을 읽게 된 것만이 어크의 삶에 나타난 변화는 아니었다. 어크를 문자교실로 초대했던 그 목사님의 초청과 함께, 어크는 그 교회에 엄마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문자교실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고 교회에서 복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면서 어크와 엄마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저는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저와 저희 엄마를,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캄보디아성서공회에게도 어크와 같은 다음세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캄보디아 인구의 반 이상이 24세 미만이다. 하지만 국가적인 대학살 사건과 내전으로 인해 나라의 근간이 되는 교육과 사회 기반 구조는 여전히 미약하다. 또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캄보디아 젊은이들이 많다. 문자교실과 같은 프로그램과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성서보급 노력을 통해서, 캄보디아성서공회는 다음 세대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을 돕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문자교실에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 이 부모들 또한 한 번도 글을 읽는 법을 배워 본 적이 없다. 온 가족이 함께 성경을 읽으며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기 시작하면서 더욱 자신감 있는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다. 게다가, 읽는 방법을 알게 된 참가자들은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다. 구직 광고라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글 들을 이제 읽을 수 있게 되었다.프툼 셍(Ptum Seng)은 37세로, 세 아이의 엄마이다. 그녀도 세 아이를 모두 문자교실에 보냈다. 지역 학교가 아이들이 매일 걸어서 가기엔 너무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들이 점점 글을 잘 읽게 되자 온 가족이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성경을 읽고 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비록 제가 스스로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아이들을 통하여 제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고 큰 축복입니다. 아이들이 한 절 한 절 읽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출처: 미국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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