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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만나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ㅡ​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아들의 탄생을 고지 <판데르 베이던(R, van der Weyden)의 그림>히브리어 : gabriel뜻 : 하나님의 강한 자’ 또는 ‘하나님은 강하시다.성경에 나오는 이름이 있는 천상적 존재가브리엘은 미가엘을 제외하고는 성서에서 이름을 들어 지칭하는 유일한 천상적 존재입니다. 후기의 문서들에는 라파엘과 우리엘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브리엘은 구약성서에서는 <다니엘>에 나타나며 신약성서에서는 <누가복음>에 나타납니다. 다니엘이 자기가 본 환상, 곧 두 뿔을 가진 숫양이 외뿔을 가진 숫양에게 패배당하는 장면이 나타난 환상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처럼 보이는 한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브리엘아, 이 사람에게 그가 본 것을 설명해 주어라.’(단 8:16하) 다니엘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다니엘에게 그 환상의 의미를 알려 주었습니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왕들은 마게도냐 알렉산더 대왕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왕국은 결국에 그의 네 후계자들 사이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환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렇게 숫염소의 외뿔은 부러지고 이어서 새로운 네 개의 뿔이 돋아날 것이다.다니엘이 저녁 제사를 드릴 무렵, 자기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지난번에 환상에서 보았던 그 천사가 다니엘이 있는 곳으로 급히 날아 왔습니다(단 9:20-21). 그는 다니엘에게 예루살렘이 70년간 폐허 더미 상태로 있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풀이해 주었습니다. 종말에 대한 다니엘의 꿈을 풀이해 주려고 온 ‘사람의 모습을 띤’(단 10:18) 그 존재 또한 가브리엘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환상을 본 사람에게 환상을 풀이해 주기 위하여 천사가 등장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는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에서처럼 하늘의 사자에게 이름을 붙여 지칭한 것은 대단히 드문 현상입니다.아들의 출생을 미리 알려준 가브리엘<누가복음>에는 가브리엘이 두 번 나타나는데 그때마다 아들의 출생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성전에서 분향하는 의례를 집행하는, 나이 많은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났고, 그 다음에는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천사는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이름을 말해 줍니다.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의 아들은 (세례) 요한이라 부르고, 마리아의 아들은 예수라 부를 것이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말했다. ‘나는 가브리엘이오. 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자들 가운데 하나인데, 당신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소.’(눅 1:19) 누가의 이야기는 이전에 성서에 나온 천사 현현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삼손의 출생도 천사가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천사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창세기와 포로기 이전의 성서의 문서들에서 천사들은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 가운데 가시적인 것으로 형상화하는 존재로 여겨졌고, 이름은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포로기 이후 시대에 생긴 <다니엘>과 같은 유대교적 문서들에서는 천사들이 이름을 가진 독자적인 존재들로 등장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은 일곱 천사 또는 대천사들에 관해서 말하는데, 이들은 모든 천사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 곁에 머물고 있는 존재들입니이다. 성서 정경에 채택되지 않은 후대 문서인 '에녹 1, 2서'에서는 가브리엘이 그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 밖의 다른 전승들은 가브리엘을 최후 심판의 날에 나팔을 부는 천사로 표현합니다.Redaktion: Falko Spiller, Die Menschen der Bibel: Ein illustriertes Lexikon der Heiligen Schrift, 김창락 역,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4 중에서.

사진자료

2017 성서주일 포스터

2017년 성서주일 포스터입니다. 다운받으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설교자료

성경과 한국 사회의 변화(試論) - 이만열

성경의 한글 번역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도록 하여 성경의 교훈과 사상을 체화하도록 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자기시대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시대와 사회에 대해 응답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구한말 처음으로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기다리고 중요시했는가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얼마 안되었을 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crying need)”를 했다. 1898년경 성경 번역이 지지부진하자 평양에 사는 어떤 교우는 예수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이라고 전제한 후, 그 성경을 지방에 내려 보내주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린다”고 했고, 어느 서점 주인은 “신약전서를 전부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린다”고도 했다. 이렇게 성경 번역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국 초대기독교인들의 영적 갈급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당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필자의 경험이긴 하지만 해방 후 시골 교회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위인들의 행적을 듣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해방 후에 그랬다면 일제 강점하에서 구약에 나타난 위인들의 민족적인 사기를 읽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일제의 노예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블레셋을 상대로 한 삼손과,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면서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된 다니엘과 에스겔을 보면서 그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적 범죄가 갖는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엄숙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포로귀환의 때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적 시련 앞에서 응답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먼저 한말에는 국권수호 운동에 나섰던 뜻있는 젊은 야소교인들을 한국사에서 만난다. 이토오(伊藤博文)를 제거하려다가 자결의 길을 택했던 정재홍(鄭在洪)은 한말 교육자요 기독신자였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한국 외교부의 고문 자격을 가지고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본국에 가서 일제를 위한 공작을 꾀하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한국인 기독청년 장인환(張仁煥)에게 피살되었다. 천주교인 안중근(安重根)과 이토오를 포살하는 데에 동조한 우덕순(禹德淳)은 신앙적인 애국시를 남겼다. ‘야소교 동지’들과 함께 이완용ㆍ이용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명동 성당 앞에서 매국 총리대신 이완용 제거에 앞장선 이재명(李在明) 역시 기독청년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자기 시대와 민족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다.일제 강점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민족에 대한 응답적 삶은 더 광범하게 나타난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지도자들이 거사 참여에 앞서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서는 그들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신 민족을 위해서 순명(殉命)을 각오했던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관여한 이들이나 무장투쟁 혹은 의열운동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 이들 또한 성경과 기독교적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민족에 대해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자,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인만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신사참배에 저항, 많은 신자들이 투옥되고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를 냈다. 이러한 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의 범주에서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에 근거한, 선교사들의 표현을 빌면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노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뒷날 다시 한국을 찾아 몇 권의 저서를 남긴 매켄지(F. A. McKenzie)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투쟁의 원천이 성경에 있음을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크, 햄프던 및 조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어느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신문학 교수였던 최준이 “한글로서의 한국말 성경이 나타남으로써 한국의 국민대중들은 비로소 자아(自我)를 다시 찾게 되었고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립상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그가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계 신문이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을 폈고 자주 독립사상을 앙양했다는 지적과 함께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국 민족운동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저항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국권(독립)수호, 국권(독립)회복에 있었지만, 또 한 흐름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국 민족운동의 가장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만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기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의 도정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민주화의 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는 인민평등의 실현이다. 한국이 인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세봉건적인 혈통신분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유교적 봉건사회에서는 혈통에 의해 크게는 양천(良賤)으로 이분화했는가 하면 좁게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분법적 신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숙명적으로 주어진 혈통은 곧 신분제라는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이런 신분구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교육, 예의, 사상(安分) 및 법제적 측면에서 자신의 신분질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회적 장치를 공고히 했다. 혈통신분제는 숙명적이어서 개인적인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었다.그러나 기독교의 수용은 이런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평등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본래 혈통에 의해 차별화된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과 천민을 구분, 차별화하는 양천 제도가 있을 수 없다. 이같은 사상을 제시한 것이 기독교의 성경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의하면 혈통신분제는 인간사회, 특히 지배층이 독점적 지배를 위해 ‘숙명적인 질곡’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 사상에서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반인간적이고 반천륜적인 제도다. 노비제도와 양천(良賤)제도를 정비한 법제적 검토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이뤄졌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인민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과한 후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이런 혈통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실질적인 인민평등을 촉진한 것은 예수교요 그 기반인 성경이었다. 따라서 한말 성경에 기반한 예수교회에서는 혈통신분제를 극복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 박서양(朴瑞陽) 부자가 양반 신분 못지 않게 활동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은 혈통신분제를 용납하지 않는 성경과 교회 때문이었다.혈통신분제를 극복해 가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한국 사회는 서서히 군주ㆍ양반 중심의 전제군주적 구왕조(舊王朝) 회복을 의미하는 복벽(復辟) 사상을 극복하게 되었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제도’인 민주공화정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3.1운동이었다.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가 참여한 3.1운동은 그 독립선언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천명했다.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의 염원이 제도적으로 실현된 것이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1919년 4월의 대한민국의 약법(헌법)은 이를 보증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기독교의 이런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조밀하게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만민평등의 성경적 세계관이 한국의 민주화에 이렇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만열,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서울: 대한성서공회, 2011), 7~54페이지 중에서 발췌

설교자료

한글 성서와 초대교인들의 ‘성서신앙’ - 이덕주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성서공회의 기본 사역인 성서 번역과 출판과 반포 사업이 지닌 신학적 의미는 실로 크다. 성서 번역이나 출판은 단순한 경전 번역이나 책 만들기가 아니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짐으로 말씀 속에 담긴 복음은 새로운 문화의 토양 속에 뿌리를 내린다. 즉 토착 언어로 번역된 말씀을 읽은 토착민들이 깨달은 진리를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와 문화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환경에서 실천함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요 1:14)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와 그 문화는 ‘낯선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from the alien to the familiar) 바뀌는데 그것을 복음의 토착화(土着化, indigenization)라 부른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이러한 복음의 토착화, 말씀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는데 성서 번역과 인쇄, 그리고 반포 사역이 이루어지는 ‘말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토착교인들의 ‘말씀 공부’ 모임인 사경회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1. 사경회와 부흥운동한국교회의 사경회(査經會)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사경회 강사나 수강생들이 모두 교재인 한글 성서를 지녀야 한다는 사경회 특수성을 감안할 때 쪽복음 형태로나마 국내 번역본들이 여러 종류로 다량 인쇄되기 시작한 1896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사경회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교인들의 사경회에 대한 언급으로는 1897년 8월 말 서울에서 개최된 장로회 연합공의회에서 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 M. Baird)가 선교 계획을 보고하는 가운데 “평양으로 리샤고  평양에 사경회를 쥬쟝고”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1897년 이전 평양지역에서 사경회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이듬해(1898년) 6월과 7월 평양과 부산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대한 기사가 「그리스도신문」에 실렸다. “지나간 륙월과 칠월 두  동안을 평양교회에셔 사경회 하엿대 여러분 목들이 셩경에 깁흔 을 교우들의게 힘써 만히 쳣더라.  부산셔도 지나간 칠월에 사경회 엿대 목 아담씨가 십여명 교우들의게 누가복음  권을 다 셰히 공부식혓더라.”평양 사경회에서 두 달 동안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산에서는 한 달 동안 누가복음 전체를 배웠다. 이처럼 평양과 부산에서 개최된 사경회가 장로교회의 경우라면 감리교회의 경우는 1899년 1월 개최된 평양 사경회에 대한 보고가 남아 있다. “우리 교회에 유익 것은 셩경을 공부이라. 이럼으로 지  음력 十二월 二十일 위시여 샤경회를 셜시엿 각쳐 교우들과 본교회 형뎨 즁 공부를 힘쓰 사 십여인이 목 에 모히여 졔졔히 깃분 으로 하님 긔도고 아 아홉시로 열시지 로마인셔 공부고 오후 두시로 네시지 요한 一二三셔와 디도셔와 아각셔를 공부여   동안에 하님의 묵우신 은혜와 목의 셩실히 침으로 형뎨와 들이  눈을 열어 지식의 유익을 엇고 각각 밋 이 더욱 굿건케 엿오니 감다.” 역시 한 달 동안 40여 명이 모여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방금 인쇄되어 나온 여러 종류 사도서신을 갖고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경회가 신약성서 전체가 인쇄되어 나온 1900년 이후 더욱 활성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음은 평양에서 사역하던 미감리회 여선교사 노블(M. K. Noble) 부인이 1903년 가을에 개최할 여자사경회를 소개하면서 쓴 글이다. “이젼에 셩경이 부죡 에 누구던지 셩경을 시 동안만 보고져 여도 돈 십원을 내여야 보왓거니와 지금은 누구던지 셩경을 사셔 긔 집에 두고 늘 공부 수 잇 거 감사 일이요  사경회 치 거 반 열심케 하고 오도록 셩경공부 션들이 갑업시 오 이에게 칠 터이니 이 밋 사의 일치 못 맛당 됴흔 긔회니라.”누구든 원하면 성서를 구해 읽을 수 있게 된 교회 환경이 성경공부와 사경회를 활성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블 부인은 성서를 ‘아버지 편지’로, 사경회를 ‘아버지 편지 보러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셩경은 하님이 우리의게 주신 편지니 우리의게 주신거 다 열심히 공부고 십흘 거시오 우리 아바지의 편지와 경계 아모 이던지 치 이가 잇면 시작기 젼 두어날 동안에 사경회 올나가 길노 큰 무리가 늘 득히 단닐 터이니 그런고로 다 셩이 뭇기 무 일노 이러케 모혀가뇨 면 다 열심히 답하기 예비지니 우리 아바지 편지보러 가노라 내가 여호와의 뎐에 영원이 살이로다 며(시 二十三O六 ) 우리와 치 모든 사이 다 졉을 밧을 터이니 우리 치 갑셰다 우리와  하님 압흐로 나갑셰다 지니라.”이렇게 사경회가 활성화되면서 그 형태와 내용도 다양해졌다. 처음엔 성서 공부만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공부 외에 기독교 교리와 교인생활에 관한 기초 과정도 삽입했고 오후에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도 벌이고 저녁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경회 기간도 1-2주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교회 단위로 실시하기도 하고 지역 내 여러 교회가 연합해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연합 사경회를 ‘도사경회’(都査經會)라 불렀는데 평양에서 열린 도사경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구체적인 증언을 평양노회 역사기록(1925년)에서 읽을 수 있다. “[1907년] 一月 六日브터 平壤城에셔 平南都査經會를 開고 八所로 分야 工夫며 各學校에셔도 聖神밧기 爲야 祈禱會를 開엿 金燦星이 崇德學校에셔 祈禱會를 引導며 路可福音 十五章에 蕩子悔改比喩로 講道 時 三百餘名 小學生 一同이 大聲痛哭며 或昏倒氣節며 罪를 自服 所聞이 卽刻으로 査經會 各所에 遍傳니라. 時에 吉善宙가 第八所에셔 聖神要理를 敎授더니 聖神이 會衆에 臨 蔡廷敏이 大聲痛哭며 罪를 自服기 始作야 八所 一同이 一時 悔罪痛哭엿스며 每夜에 李吉咸 宣敎師의 引導로 禮拜 中 忽然히 急 바람이 臨 듯 더니 이윽고 聖神이 降臨매 滿堂聽衆이 放聲痛哭며 各其起立야 罪를 自服니 哭聲과 自服聲을 分辨키 難더라.” 그리고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토착교인들의 사경회와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이 더욱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토착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대단했다. 그 열정은 다름 아닌 ‘성서를 배우려는’ 학생의 열정이었다.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스왈른(W. L. Swallen)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성서 공부에 열정적인 학생들이다. 집에서도 공부하고 초등학교, 특수학교, 중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에서도 공부하고 사경회와 성경학원, 신학교에서도 공부한다.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려는 이들의 욕구를 충분하게 채워준 적이 없다. 성서 공부에 대한 열정은 남성 못지않게 여성들도 대단하여 어떤 이들은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삼일씩 걸어오기도 한다.”선교사들은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이삼일 걸려 수백 리 길을 걸어서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 같은 시기 언더우드의 증언이다.“한국 교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 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서를 배운다. 이 같은 대규모 사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소규모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북부 지역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1년 동안 이 같은 소규모 사경회를 192회 실시해서 연인원 1만여 명을 기록하였다.”사경회가 부흥운동의 요인이 되었듯이 다시 사경회는 교회 부흥의 요인이 되었다. 사경회와 교회 부흥이 떼어놓을 수 없는 상생(相生) 관계를 맺고 있음은 마펫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성서가 복음화의 제일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요인이 되어왔다. 한국에서 성서는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성서 지식으로 충만하여 그 능력과 영성과 기도 신앙과 관대함을 발휘하고 있다. 성서 공부와 사경회가 한국 교회 성장에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설교가 예배 정신을 개발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성서야말로 한국 교회의 신앙과 지식의 기반으로서 영적 생활을 추구해나가는 데 필요한 영감을 공급해주고 있다.”같은 평양에서 활동했던 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W. N. Blair)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한국 선교사업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사경회 제도이다. 개교회별로 매년 1주일 혹은 그 이상 모여 성서를 배운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오직 성서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한다. 이같이 성서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전체가 단합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케 되었다. 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 부흥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블레어는 한국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passover) 문화에 비유하였다. 그처럼 사경회는 1907년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축제’, ‘절기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구약성서도 번역되어 ‘성경 전체’를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된 1911년 이후에 그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평북 선천에서 활동하던 북장로회 선교사 로스(C. Ross)의 증언이다. “여러 사람의 수고로 신약은 이미 수년 전에 번역되었지만 구약이 한글로 번역된 것, 즉 성서 전체가 번역된 것은 불과 작년[1910년]의 일이다. 지금까지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학자들만 구약 본문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일반 평민들이 처음으로 성서 전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년은 기념비적인 해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사경회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는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학자들의 도움으로 [구약 본문을] 이 나라 말로 번역해 [사경회 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서 전체에서 보다 폭넓게 사경회 교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지역 선교부 선교사든, 다른 지역에서 파견 나온 선교사든, 토착교인이든 누구나 사경회 교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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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첫 성경, 그 설렘

본 공회는 지난 2014년 7월에 멕시코성서공회의 요청으로 촐(Chol)어 신약전서 7,000부 를 제작하여 기증하였습니다. 이 성서의 봉헌예식은 멕시코성서공회의 주관으로 10월 10일 부터 12일까지 총 3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첫째 날 1,000명, 둘째 날 2,000명, 셋째 날에는 500명 정도의 촐 부족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봉헌식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였습 니다. 특별히 멕시코성서공회 총무는 본 공회와 한국교회 후원자들에게 촐어 신약전서의 기 증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말로 말씀하십니다. 멕시코의 툼발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촐 부족은 인구가 약 3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가 기독교인이고, 2천여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국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촐 부족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 운 스페인어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제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촐(Chol)어 로 된 성서를 읽으면서 말씀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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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남수단 실룩어 성경 봉헌식 1년 후

말라칼(Malakal)은 아프리카 남수단 나일강 상류에 있는 도시이다. 2013년 5월 말라칼에서는 찬양과 환호성이 가득했다. 바로 간절히 바라던 첫 ‘실룩어 성경’의 봉헌식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지난해 실룩어 성경 봉헌식에 참석했던 엘리자베스 에드웍 와이는, 22년 긴 내전을 겪은 남수단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이 성경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꽤 긴 시간 동안 아버지를 살해한 이를 증오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상처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뿐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 실룩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지난 아픈 일을 잊고 털고 일어나는 데 큰 힘이 됩니다.”하지만 말라칼은 이제 더 이상 환호성과 찬양이 들리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말라칼을 비롯한 남수단 몇몇 곳에서 일어난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의 격렬한 내전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성경 봉헌식을 한 지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은 2013년 12월에 일어난 일이다.남수단성서공회의 총무 에드워드 카지보라(Edward Kajivora) 박사는 지금 말라칼을 비롯해 남수단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슬퍼하였다. 지금과 같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자기들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난 중에도 생명을 주는 ‘실룩어 성경’남수단의 내전으로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이 일로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바로 지난해 그들이 받은 ‘실룩어 성경’이 내전을 피해 난민촌이나 정착촌 등으로 도망간 실룩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로다(Roda)는 지금과 같은 힘든 시기에 실룩 성경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와 양식이 된다고 말한다.로다는 실룩어 성경 번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말라칼에 있던 그녀 또한 여느 실룩 부족 사람들처럼 이 격렬한 싸움에 휘말렸다. 거리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로다는 유엔(UN) 베이스 캠프로 도망쳤다.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고, 몸이 아파서 결국 주바(Juba)로 후송되었다.밤낮으로 성경을 읽는 실룩 사람들“실룩 사람들 중에 작년 기증식 때 성경을 받은 사람들은 밤낮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유엔 캠프에 있는 실룩 사람들이 쓰는 성경책은 너무 많이 봐서 닳아 없어질 지경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도 와서 이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분명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오토 그와도(Otto Gwado)는 또 다른 실룩어 성경의 번역자이고 성서공회의 직원이다. 그의 가족 또한 힘든 일을 겪었다. 그가 성서공회 일을 시작하려고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으로 먼저 나와 집을 알아보던 중 내전이 심해졌고, 말라칼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숲 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바까지 오는데 한 달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그의 온 가족에게 그 한 달은 참으로 힘겹고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많은 남수단 사람들처럼, 실룩 가족들도 이 내전 때문에 깊은 슬픔과 상처 그리고 불안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카지보라 총무는 말을 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듣기로 많은 실룩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가면서 성경책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착지인 와우 실룩이나 디탕, 룰 그리고 코톡과 같은 곳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슬픔, 트라우마, 그리고 불안감비록 유엔이 저희가 캠프에 성경을 ‘보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캠프에 들어올 때 성경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만은 성경을 갖고 있어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실룩 사람들에게 성경이 가장 필요한 때에 성경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실룩어 성경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전쟁 기간에는 필요로 하는 지역에 무언가를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부활절에 이루어진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내전 중에도, 남수단성서공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이 사람들이 다니기에 안전하지 않고 재정적인 궁핍함 때문에 성경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공회는 여전히 성서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도 그들이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성서공회는 2014년 부활절 기간 동안, 남수단 서편 국경지역인 에조(Ezo)에서 치료 사업을 시작했다.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이 사업 책임자인 클레로(Klero) 목사님은 아프리카에서 악명 높은 LRA라는 우간다 반군에게 고통당한 잔드(Zande) 사람들과 두 주간을 보냈던 분입니다. 이 지역은 또 다른 인접 분쟁지역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경에서 겨우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치료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LRA가 국경에 나타나 남수단 군에게 우리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라고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사진 > 기도하는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 참가자들에조의 부활주일<사진 > 부활주일 퍼레이드클레로 목사님은 부활절 기간에 치료 모임을 진행하면서 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담긴 사랑과 치료의 메세지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참 기뻤다고 고백했다. 참석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까지 용서하신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은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우리나라에 평화가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는 말을 클레로 목사님은 전했다.철저히 분단된 나라남수단은 정치적, 종족적으로 철저히 나누어졌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정부는 이번 전쟁이 종족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는 다릅니다. 이 싸움은 사실 크게는 딩카스(Dinkas)와 뉴어스(Nuers) 종족 사이의 일입니다. 이 두 종족 사이의 증오심은 상당히 깊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유엔의 난민캠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또한 정부군와 반란군은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군사로 쓰려고 모집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여기에 쉽게 끌려갑니다. 사람들이 쓰던 오래된 창과 활 대신 이젠 총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카지보라 총무는 마지막으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의 소망은 주님 한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서공회는 많은 남수단 사람들과 함께 끊임없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출처: 세계성서공회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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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에티오피아 그룸 페일(Groum Pale)의 고백

스무 살 에티오피아 청년 그룸 페일(Groum Pale)은 거리의 아이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배고픔과 두려움, 그리고 좌절의 연속이다. 오늘도 이 헌신적인 기독교 청년은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 지역에서 집을 잃고 떠도는 많은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눈다.지금 청년들과 아이들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암하릭어 성경을 읽고 있는 그룸을 보면, 늘 겁에 질려 있고 굶주려 있던 11년 전의 그룸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룸의 삶이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룸은 이웃 기독교인들의 사랑의 결실이다. 그 사랑 안에서 그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가 되었다.그룸과 그의 여동생의 부모님은 일찍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로 그룸 남매는 집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며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음식을 얻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걸핏하면 병에 걸렸고, 기생충에 위가 뒤틀리기도 했고,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렸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다.그룸이 아홉 살이 되던 해, ‘한나고아원’ 식구들을 만났다. 한나고아원은 집 없이 배회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단체로, 기독교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룸 남매의 건강을 챙겨줄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룸은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어린 시절을 길거리에서 보내면서 정말 끔찍한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제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거리의 아이로 자라면, 배우는 것이라고는, 싸움을 잘 하는 것과 모두를 의심하며 사는 것, 이 두 가지뿐입니다.”이런 그룸이 1년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그리고 굳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모두 에티오피아성서공회에서 받은 성경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었다.그룸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경 속에 담긴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낮에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밤이 되면 잠이 들기 전에 낮에 읽고 들은 성경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면 성경에 담긴 이야기 하나하나가 마치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면 그 말씀들이 제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메아리칩니다. 저에게 그 어떤 것보다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성경 말씀 낭송“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제 삶이 변하고 있습니다. 저나 제 친구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함께 읽고 듣던 성경 말씀을 함께 큰 소리로 낭송하며 그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합니다.”이제, 그룸은 학교 졸업반이다. 게다가 그 반에서 우등생이다. 그룸은 대학에 진학하여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에티오피아가 더 나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이 모든 것은 제가 특별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저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그 무언가가 없어도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분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기증 받은 성경 자료들학교 수업을 마치면 그룸은 거의 매일 거리의 아이들이나 고아원의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자리에 있다. 에티오피아성서공회에서 제공한 오디오 성경 기계들이 있었지만, 도난을 당하기도 했고, 고장이 나서 다른 나라에 고치러 보냈다. 그래서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성경뿐이다. 그룸은 그 성경을 아이들에게 직접 읽어주곤 한다.“제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은 제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읽었던 말씀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능한 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던 구절입니다. 이제 그 말씀이 저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그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그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씩 가까이 오는 것을 본다.(출처: 영국성서공회)

설교자료

[국내] 말하는 종이 - 이용남

1733년 유럽의 몇몇 선교사들이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 에스키모인들은 추하고 더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전적이고 잔인하였다. 그들은 그들끼리 사랑의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5년여 동안 열심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으나 그들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절만 하였다.어느 날 성서를 번역하고 있는 존, 벡이라는 선교사집에 에스키모인들이 몰려와 문을 걷어차며 들이 닥쳤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적개심이 발로 되었다 생각하여 그 선교사는 순교를 각오하였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든 그들은 펜, 잉크, 그리고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들 가운데 카야르낙이란 자가 물었다. “이것이 무어요?”존 선교사는 흰 것은 종이요 종이에 그려진 검은 표시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과 똑같은 말(글)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종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카야르낙은 퉁명스럽게 종이를 불쑥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종이가 말하게 해보시오! 우리가 보는 데서…빨리 하시오.”선교사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선교사는 좋은 생각을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종이를 훑어보다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번역된 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읽어가다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잠깐 쉬었다. 그때 존 선교사는 카야르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의 얼굴은 침울해 있었고 그의 볼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종이가 더 말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존 선교사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카야르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후에 남은 성경을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와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낼 정도로 찔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히 4:12)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라 없는 사람이요, 부모 없는 고아라고 어느 분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들보다 부모가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된다.지난달 성서사업의 일환인 찬조회원 모집 차 부산엘 갔었다. 특히 이번 방문 기간 중에는 상애원교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상애원교회는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용호동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음성 나환자들이 사는 상애원 마을교회다. 담임목사인 이만규 목사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아 피곤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 한 마디라도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난민들을 위한 시영주택단지를 돌아 숲이 우거진 언덕을 넘어 돌아서자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이국적인 느낌까지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닭소리 때문에 이야기를 주고 받는 데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건축된 지 퍽 오래된 듯한 교회에서는 벌써부터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의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실에서 잠깐 쉰 뒤에 단에 올라섰다. 싸한 기분이 목 언저리에 감돌면서 오래전 어느 병원 시체실에서 맡았던 악취가 떠올랐다. 성가대석과 장로님들 좌석을 제외하고는 그냥 마룻바닥이었다.나는 사회하시는 이 목사님에게 주보 한 장을 달라고 하였다. 이 목사님은 이교회는 주보가 없단다. 육백여 명이 넘는 교회에 왜 주보가 없느냐고 반문했더니 주보를 인쇄하면 한 달에 약 6,000원 가량이 지출되는데 그것을 절약해서 복음사업에 쓰자고 당회에서 결의하여 부산기독교 방송국에 헌금하고 있단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예배가 시작되고 이층까지 꽉 들어찬 교인들을 보자 한국 초대교회가 연상되었다. 찬송이 시작되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둥병으로 아래턱이 떨어진 장로님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잇몸을 움직이며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붙은 손바닥을 치며 열심히 찬송 부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돋보기 위에다 또 돋보기를 쓰시고 확대경을 손에 드신 장로님이 찬송가와 눈의 거리를 5센티 정도로 가까이 하여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이 장로님도 손가락이 모자랐다.설교를 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도저히 성서사업에 협조해달라고 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설교가 끝나자 나는 그들에게 기도해주십사라는 부탁으로 말을 맺었다. 예배가 끝나자 이 목사님께서 꼭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가라고 부탁을 하여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기로 하였다. 다른 교회와는 달리 저녁예배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저녁시간에도 거의 낮 시간과 같은 수의 집회였다. 나는 그들의 열심에 감동되고 그들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외침을 외쳤다.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께서 특별히 성서반포사업에 참여하자는 권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부모가 있어도 만나지 못하며 아이들도 학교 갈 나이가 되면 격리시켜 기숙사에서 공부하게 하는 그들 중에서 80여 명에 달하는 회원이 생겼다. 멀리서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 자식을 품에 두지 못하는 그들, 그러나 내 민족의 살길이 말씀에 있으니 말씀사업에 협조하겠다는 그들, 성서공회의 발전과 공회의 직원들을 위하여 특별히 통성 기도하던 눈썹 없는 형제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출처: <성서한국>1973년 10월 31일 19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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