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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서와 초대교인들의 ‘성서신앙’ - 이덕주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성서공회의 기본 사역인 성서 번역과 출판과 반포 사업이 지닌 신학적 의미는 실로 크다. 성서 번역이나 출판은 단순한 경전 번역이나 책 만들기가 아니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짐으로 말씀 속에 담긴 복음은 새로운 문화의 토양 속에 뿌리를 내린다. 즉 토착 언어로 번역된 말씀을 읽은 토착민들이 깨달은 진리를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와 문화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환경에서 실천함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요 1:14)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와 그 문화는 ‘낯선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from the alien to the familiar) 바뀌는데 그것을 복음의 토착화(土着化, indigenization)라 부른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이러한 복음의 토착화, 말씀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는데 성서 번역과 인쇄, 그리고 반포 사역이 이루어지는 ‘말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토착교인들의 ‘말씀 공부’ 모임인 사경회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1. 사경회와 부흥운동 한국교회의 사경회(査經會)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사경회 강사나 수강생들이 모두 교재인 한글 성서를 지녀야 한다는 사경회 특수성을 감안할 때 쪽복음 형태로나마 국내 번역본들이 여러 종류로 다량 인쇄되기 시작한 1896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사경회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교인들의 사경회에 대한 언급으로는 1897년 8월 말 서울에서 개최된 장로회 연합공의회에서 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 M. Baird)가 선교 계획을 보고하는 가운데 “평양으로 리샤고  평양에 사경회를 쥬쟝고”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1897년 이전 평양지역에서 사경회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이듬해(1898년) 6월과 7월 평양과 부산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대한 기사가 「그리스도신문」에 실렸다. “지나간 륙월과 칠월 두  동안을 평양교회에셔 사경회 하엿대 여러분 목들이 셩경에 깁흔 을 교우들의게 힘써 만히 쳣더라.  부산셔도 지나간 칠월에 사경회 엿대 목 아담씨가 십여명 교우들의게 누가복음  권을 다 셰히 공부식혓더라.” 평양 사경회에서 두 달 동안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산에서는 한 달 동안 누가복음 전체를 배웠다. 이처럼 평양과 부산에서 개최된 사경회가 장로교회의 경우라면 감리교회의 경우는 1899년 1월 개최된 평양 사경회에 대한 보고가 남아 있다. “우리 교회에 유익 것은 셩경을 공부이라. 이럼으로 지  음력 十二월 二十일 위시여 샤경회를 셜시엿 각쳐 교우들과 본교회 형뎨 즁 공부를 힘쓰 사 십여인이 목 에 모히여 졔졔히 깃분 으로 하님 긔도고 아 아홉시로 열시지 로마인셔 공부고 오후 두시로 네시지 요한 一二三셔와 디도셔와 아각셔를 공부여   동안에 하님의 묵우신 은혜와 목의 셩실히 침으로 형뎨와 들이  눈을 열어 지식의 유익을 엇고 각각 밋 이 더욱 굿건케 엿오니 감다.” 역시 한 달 동안 40여 명이 모여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방금 인쇄되어 나온 여러 종류 사도서신을 갖고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경회가 신약성서 전체가 인쇄되어 나온 1900년 이후 더욱 활성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음은 평양에서 사역하던 미감리회 여선교사 노블(M. K. Noble) 부인이 1903년 가을에 개최할 여자사경회를 소개하면서 쓴 글이다. “이젼에 셩경이 부죡 에 누구던지 셩경을 시 동안만 보고져 여도 돈 십원을 내여야 보왓거니와 지금은 누구던지 셩경을 사셔 긔 집에 두고 늘 공부 수 잇 거 감사 일이요  사경회 치 거 반 열심케 하고 오도록 셩경공부 션들이 갑업시 오 이에게 칠 터이니 이 밋 사의 일치 못 맛당 됴흔 긔회니라.” 누구든 원하면 성서를 구해 읽을 수 있게 된 교회 환경이 성경공부와 사경회를 활성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블 부인은 성서를 ‘아버지 편지’로, 사경회를 ‘아버지 편지 보러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셩경은 하님이 우리의게 주신 편지니 우리의게 주신거 다 열심히 공부고 십흘 거시오 우리 아바지의 편지와 경계 아모 이던지 치 이가 잇면 시작기 젼 두어날 동안에 사경회 올나가 길노 큰 무리가 늘 득히 단닐 터이니 그런고로 다 셩이 뭇기 무 일노 이러케 모혀가뇨 면 다 열심히 답하기 예비지니 우리 아바지 편지보러 가노라 내가 여호와의 뎐에 영원이 살이로다 며(시 二十三O六 ) 우리와 치 모든 사이 다 졉을 밧을 터이니 우리 치 갑셰다 우리와  하님 압흐로 나갑셰다 지니라.” 이렇게 사경회가 활성화되면서 그 형태와 내용도 다양해졌다. 처음엔 성서 공부만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공부 외에 기독교 교리와 교인생활에 관한 기초 과정도 삽입했고 오후에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도 벌이고 저녁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경회 기간도 1-2주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교회 단위로 실시하기도 하고 지역 내 여러 교회가 연합해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연합 사경회를 ‘도사경회’(都査經會)라 불렀는데 평양에서 열린 도사경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구체적인 증언을 평양노회 역사기록(1925년)에서 읽을 수 있다. “[1907년] 一月 六日브터 平壤城에셔 平南都査經會를 開고 八所로 分야 工夫며 各學校에셔도 聖神밧기 爲야 祈禱會를 開엿 金燦星이 崇德學校에셔 祈禱會를 引導며 路可福音 十五章에 蕩子悔改比喩로 講道 時 三百餘名 小學生 一同이 大聲痛哭며 或昏倒氣節며 罪를 自服 所聞이 卽刻으로 査經會 各所에 遍傳니라. 時에 吉善宙가 第八所에셔 聖神要理를 敎授더니 聖神이 會衆에 臨 蔡廷敏이 大聲痛哭며 罪를 自服기 始作야 八所 一同이 一時 悔罪痛哭엿스며 每夜에 李吉咸 宣敎師의 引導로 禮拜 中 忽然히 急 바람이 臨 듯 더니 이윽고 聖神이 降臨매 滿堂聽衆이 放聲痛哭며 各其起立야 罪를 自服니 哭聲과 自服聲을 分辨키 難더라.” 그리고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토착교인들의 사경회와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이 더욱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토착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대단했다. 그 열정은 다름 아닌 ‘성서를 배우려는’ 학생의 열정이었다.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스왈른(W. L. Swallen)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성서 공부에 열정적인 학생들이다. 집에서도 공부하고 초등학교, 특수학교, 중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에서도 공부하고 사경회와 성경학원, 신학교에서도 공부한다.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려는 이들의 욕구를 충분하게 채워준 적이 없다. 성서 공부에 대한 열정은 남성 못지않게 여성들도 대단하여 어떤 이들은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삼일씩 걸어오기도 한다.” 선교사들은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이삼일 걸려 수백 리 길을 걸어서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 같은 시기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한국 교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 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서를 배운다. 이 같은 대규모 사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소규모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북부 지역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1년 동안 이 같은 소규모 사경회를 192회 실시해서 연인원 1만여 명을 기록하였다.” 사경회가 부흥운동의 요인이 되었듯이 다시 사경회는 교회 부흥의 요인이 되었다. 사경회와 교회 부흥이 떼어놓을 수 없는 상생(相生) 관계를 맺고 있음은 마펫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성서가 복음화의 제일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요인이 되어왔다. 한국에서 성서는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성서 지식으로 충만하여 그 능력과 영성과 기도 신앙과 관대함을 발휘하고 있다. 성서 공부와 사경회가 한국 교회 성장에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설교가 예배 정신을 개발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성서야말로 한국 교회의 신앙과 지식의 기반으로서 영적 생활을 추구해나가는 데 필요한 영감을 공급해주고 있다.” 같은 평양에서 활동했던 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W. N. Blair)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한국 선교사업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사경회 제도이다. 개교회별로 매년 1주일 혹은 그 이상 모여 성서를 배운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오직 성서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한다. 이같이 성서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전체가 단합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케 되었다. 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 부흥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 블레어는 한국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passover) 문화에 비유하였다. 그처럼 사경회는 1907년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축제’, ‘절기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구약성서도 번역되어 ‘성경 전체’를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된 1911년 이후에 그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평북 선천에서 활동하던 북장로회 선교사 로스(C. Ross)의 증언이다. “여러 사람의 수고로 신약은 이미 수년 전에 번역되었지만 구약이 한글로 번역된 것, 즉 성서 전체가 번역된 것은 불과 작년[1910년]의 일이다. 지금까지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학자들만 구약 본문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일반 평민들이 처음으로 성서 전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년은 기념비적인 해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사경회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는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학자들의 도움으로 [구약 본문을] 이 나라 말로 번역해 [사경회 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서 전체에서 보다 폭넓게 사경회 교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지역 선교부 선교사든, 다른 지역에서 파견 나온 선교사든, 토착교인이든 누구나 사경회 교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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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첫 성경, 그 설렘

본 공회는 지난 2014년 7월에 멕시코성서공회의 요청으로 촐(Chol)어 신약전서 7,000부 를 제작하여 기증하였습니다. 이 성서의 봉헌예식은 멕시코성서공회의 주관으로 10월 10일 부터 12일까지 총 3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첫째 날 1,000명, 둘째 날 2,000명, 셋째 날에는 500명 정도의 촐 부족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봉헌식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였습 니다. 특별히 멕시코성서공회 총무는 본 공회와 한국교회 후원자들에게 촐어 신약전서의 기 증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말로 말씀하십니다. 멕시코의 툼발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촐 부족은 인구가 약 3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가 기독교인이고, 2천여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국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촐 부족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 운 스페인어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제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촐(Chol)어 로 된 성서를 읽으면서 말씀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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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남수단 실룩어 성경 봉헌식 1년 후

말라칼(Malakal)은 아프리카 남수단 나일강 상류에 있는 도시이다. 2013년 5월 말라칼에서는 찬양과 환호성이 가득했다. 바로 간절히 바라던 첫 ‘실룩어 성경’의 봉헌식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실룩어 성경 봉헌식에 참석했던 엘리자베스 에드웍 와이는, 22년 긴 내전을 겪은 남수단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이 성경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꽤 긴 시간 동안 아버지를 살해한 이를 증오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상처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뿐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 실룩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지난 아픈 일을 잊고 털고 일어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말라칼은 이제 더 이상 환호성과 찬양이 들리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말라칼을 비롯한 남수단 몇몇 곳에서 일어난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의 격렬한 내전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성경 봉헌식을 한 지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은 2013년 12월에 일어난 일이다. 남수단성서공회의 총무 에드워드 카지보라(Edward Kajivora) 박사는 지금 말라칼을 비롯해 남수단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슬퍼하였다. 지금과 같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자기들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난 중에도 생명을 주는 ‘실룩어 성경’ 남수단의 내전으로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이 일로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바로 지난해 그들이 받은 ‘실룩어 성경’이 내전을 피해 난민촌이나 정착촌 등으로 도망간 실룩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로다(Roda)는 지금과 같은 힘든 시기에 실룩 성경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와 양식이 된다고 말한다. 로다는 실룩어 성경 번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말라칼에 있던 그녀 또한 여느 실룩 부족 사람들처럼 이 격렬한 싸움에 휘말렸다. 거리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로다는 유엔(UN) 베이스 캠프로 도망쳤다.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고, 몸이 아파서 결국 주바(Juba)로 후송되었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는 실룩 사람들 “실룩 사람들 중에 작년 기증식 때 성경을 받은 사람들은 밤낮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유엔 캠프에 있는 실룩 사람들이 쓰는 성경책은 너무 많이 봐서 닳아 없어질 지경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도 와서 이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분명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오토 그와도(Otto Gwado)는 또 다른 실룩어 성경의 번역자이고 성서공회의 직원이다. 그의 가족 또한 힘든 일을 겪었다. 그가 성서공회 일을 시작하려고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으로 먼저 나와 집을 알아보던 중 내전이 심해졌고, 말라칼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숲 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바까지 오는데 한 달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그의 온 가족에게 그 한 달은 참으로 힘겹고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 “많은 남수단 사람들처럼, 실룩 가족들도 이 내전 때문에 깊은 슬픔과 상처 그리고 불안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카지보라 총무는 말을 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듣기로 많은 실룩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가면서 성경책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착지인 와우 실룩이나 디탕, 룰 그리고 코톡과 같은 곳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슬픔, 트라우마, 그리고 불안감 비록 유엔이 저희가 캠프에 성경을 ‘보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캠프에 들어올 때 성경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만은 성경을 갖고 있어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실룩 사람들에게 성경이 가장 필요한 때에 성경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실룩어 성경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전쟁 기간에는 필요로 하는 지역에 무언가를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부활절에 이루어진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 내전 중에도, 남수단성서공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이 사람들이 다니기에 안전하지 않고 재정적인 궁핍함 때문에 성경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공회는 여전히 성서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도 그들이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성서공회는 2014년 부활절 기간 동안, 남수단 서편 국경지역인 에조(Ezo)에서 치료 사업을 시작했다. 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이 사업 책임자인 클레로(Klero) 목사님은 아프리카에서 악명 높은 LRA라는 우간다 반군에게 고통당한 잔드(Zande) 사람들과 두 주간을 보냈던 분입니다. 이 지역은 또 다른 인접 분쟁지역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경에서 겨우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치료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LRA가 국경에 나타나 남수단 군에게 우리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라고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 참가자들 에조의 부활주일 부활주일 퍼레이드 클레로 목사님은 부활절 기간에 치료 모임을 진행하면서 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담긴 사랑과 치료의 메세지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참 기뻤다고 고백했다. 참석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까지 용서하신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은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우리나라에 평화가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는 말을 클레로 목사님은 전했다. 철저히 분단된 나라 남수단은 정치적, 종족적으로 철저히 나누어졌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정부는 이번 전쟁이 종족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는 다릅니다. 이 싸움은 사실 크게는 딩카스(Dinkas)와 뉴어스(Nuers) 종족 사이의 일입니다. 이 두 종족 사이의 증오심은 상당히 깊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유엔의 난민캠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정부군와 반란군은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군사로 쓰려고 모집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여기에 쉽게 끌려갑니다. 사람들이 쓰던 오래된 창과 활 대신 이젠 총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카지보라 총무는 마지막으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의 소망은 주님 한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서공회는 많은 남수단 사람들과 함께 끊임없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출처: 세계성서공회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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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에티오피아 그룸 페일(Groum Pale)의 고백

스무 살 에티오피아 청년 그룸 페일(Groum Pale)은 거리의 아이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배고픔과 두려움, 그리고 좌절의 연속이다. 오늘도 이 헌신적인 기독교 청년은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 지역에서 집을 잃고 떠도는 많은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눈다. 지금 청년들과 아이들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암하릭어 성경을 읽고 있는 그룸을 보면, 늘 겁에 질려 있고 굶주려 있던 11년 전의 그룸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룸의 삶이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룸은 이웃 기독교인들의 사랑의 결실이다. 그 사랑 안에서 그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가 되었다. 그룸과 그의 여동생의 부모님은 일찍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로 그룸 남매는 집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며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음식을 얻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걸핏하면 병에 걸렸고, 기생충에 위가 뒤틀리기도 했고,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렸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다. 그룸이 아홉 살이 되던 해, ‘한나고아원’ 식구들을 만났다. 한나고아원은 집 없이 배회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단체로, 기독교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룸 남매의 건강을 챙겨줄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룸은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을 길거리에서 보내면서 정말 끔찍한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제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거리의 아이로 자라면, 배우는 것이라고는, 싸움을 잘 하는 것과 모두를 의심하며 사는 것, 이 두 가지뿐입니다.” 이런 그룸이 1년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그리고 굳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모두 에티오피아성서공회에서 받은 성경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룸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경 속에 담긴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낮에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밤이 되면 잠이 들기 전에 낮에 읽고 들은 성경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면 성경에 담긴 이야기 하나하나가 마치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면 그 말씀들이 제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메아리칩니다. 저에게 그 어떤 것보다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성경 말씀 낭송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제 삶이 변하고 있습니다. 저나 제 친구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함께 읽고 듣던 성경 말씀을 함께 큰 소리로 낭송하며 그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합니다.” 이제, 그룸은 학교 졸업반이다. 게다가 그 반에서 우등생이다. 그룸은 대학에 진학하여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에티오피아가 더 나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특별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저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그 무언가가 없어도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분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기증 받은 성경 자료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그룸은 거의 매일 거리의 아이들이나 고아원의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자리에 있다. 에티오피아성서공회에서 제공한 오디오 성경 기계들이 있었지만, 도난을 당하기도 했고, 고장이 나서 다른 나라에 고치러 보냈다. 그래서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성경뿐이다. 그룸은 그 성경을 아이들에게 직접 읽어주곤 한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은 제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읽었던 말씀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능한 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던 구절입니다. 이제 그 말씀이 저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그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그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씩 가까이 오는 것을 본다. (출처: 영국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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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말하는 종이 - 이용남

1733년 유럽의 몇몇 선교사들이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 에스키모인들은 추하고 더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전적이고 잔인하였다. 그들은 그들끼리 사랑의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5년여 동안 열심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으나 그들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절만 하였다. 어느 날 성서를 번역하고 있는 존, 벡이라는 선교사집에 에스키모인들이 몰려와 문을 걷어차며 들이 닥쳤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적개심이 발로 되었다 생각하여 그 선교사는 순교를 각오하였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든 그들은 펜, 잉크, 그리고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들 가운데 카야르낙이란 자가 물었다. “이것이 무어요?” 존 선교사는 흰 것은 종이요 종이에 그려진 검은 표시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과 똑같은 말(글)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종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카야르낙은 퉁명스럽게 종이를 불쑥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종이가 말하게 해보시오! 우리가 보는 데서…빨리 하시오.” 선교사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선교사는 좋은 생각을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종이를 훑어보다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번역된 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읽어가다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잠깐 쉬었다. 그때 존 선교사는 카야르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의 얼굴은 침울해 있었고 그의 볼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종이가 더 말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존 선교사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카야르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후에 남은 성경을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와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낼 정도로 찔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히 4:12)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라 없는 사람이요, 부모 없는 고아라고 어느 분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들보다 부모가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된다. 지난달 성서사업의 일환인 찬조회원 모집 차 부산엘 갔었다. 특히 이번 방문 기간 중에는 상애원교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상애원교회는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용호동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음성 나환자들이 사는 상애원 마을교회다. 담임목사인 이만규 목사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아 피곤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 한 마디라도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 난민들을 위한 시영주택단지를 돌아 숲이 우거진 언덕을 넘어 돌아서자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이국적인 느낌까지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닭소리 때문에 이야기를 주고 받는 데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건축된 지 퍽 오래된 듯한 교회에서는 벌써부터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의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실에서 잠깐 쉰 뒤에 단에 올라섰다. 싸한 기분이 목 언저리에 감돌면서 오래전 어느 병원 시체실에서 맡았던 악취가 떠올랐다. 성가대석과 장로님들 좌석을 제외하고는 그냥 마룻바닥이었다. 나는 사회하시는 이 목사님에게 주보 한 장을 달라고 하였다. 이 목사님은 이교회는 주보가 없단다. 육백여 명이 넘는 교회에 왜 주보가 없느냐고 반문했더니 주보를 인쇄하면 한 달에 약 6,000원 가량이 지출되는데 그것을 절약해서 복음사업에 쓰자고 당회에서 결의하여 부산기독교 방송국에 헌금하고 있단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예배가 시작되고 이층까지 꽉 들어찬 교인들을 보자 한국 초대교회가 연상되었다. 찬송이 시작되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둥병으로 아래턱이 떨어진 장로님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잇몸을 움직이며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붙은 손바닥을 치며 열심히 찬송 부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돋보기 위에다 또 돋보기를 쓰시고 확대경을 손에 드신 장로님이 찬송가와 눈의 거리를 5센티 정도로 가까이 하여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이 장로님도 손가락이 모자랐다. 설교를 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도저히 성서사업에 협조해달라고 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설교가 끝나자 나는 그들에게 기도해주십사라는 부탁으로 말을 맺었다. 예배가 끝나자 이 목사님께서 꼭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가라고 부탁을 하여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기로 하였다. 다른 교회와는 달리 저녁예배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저녁시간에도 거의 낮 시간과 같은 수의 집회였다. 나는 그들의 열심에 감동되고 그들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외침을 외쳤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께서 특별히 성서반포사업에 참여하자는 권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부모가 있어도 만나지 못하며 아이들도 학교 갈 나이가 되면 격리시켜 기숙사에서 공부하게 하는 그들 중에서 80여 명에 달하는 회원이 생겼다. 멀리서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 자식을 품에 두지 못하는 그들, 그러나 내 민족의 살길이 말씀에 있으니 말씀사업에 협조하겠다는 그들, 성서공회의 발전과 공회의 직원들을 위하여 특별히 통성 기도하던 눈썹 없는 형제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출처: 1973년 10월 31일 19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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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서자원을 개발하자 - 김준곤

책 한 권이 한 나라와 문화의 의식구조를 만드는 예가 허다하다. 인도의 의식구조를 진단해 보면 베다(Veda)경전과 관계가 있다. 동남아 일대의 불교권 국민들의 의식체질 속에는 불교경전이 뿌리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제국을 중심으로 한 3억의 회교국민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은 코란경전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우리들처럼 유교권 국민들의 전통적 의식습성 속에는 논어와 맹자 등의 영향이 많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일본인 1,700만 명이 열심히 믿고 있는 창가학회 회원들은 절복교전(折伏敎典)이라는 신앙지침서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아직도 마르크스의 자본톤으로 피 속까지 적화(赤禍)되어 있다. 자유와 혁명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루소(J.J. Rousseau)의 민약론(De Contrat Social)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상의 피를 받고 있다. 한편 8억의 크리스천은 성서를 생명의 말씀으로 먹으며 살고 있다. 3,500년이나 묵은 오래된 책인데 날이 갈수록 베스트셀러여서 1,200여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고 매년 쪽복음까지 1억 8천만 권이 팔린다고 한다. 또한 사상의 원천이어서 공산주의조차도 성서의 표절당한 이념이라고 토인비가 지적했거니와 민주주의의 불멸의 발언인 아브라함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위클리프(Wychff)의 최초의 영역성서 서문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는 민족들의 개화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남미와 북미의 오늘의 차이는 북미는 청교도들이 성서를 가지고 가서 건국정신의 터전을 삼은 데 비해 남미 기독교는 의식만 전해진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도 3, 4세기에 기독교가 널리 전해진 바 있어 유럽처럼 성서를 번역해서 일반화시켰더라면 현재의 구라파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문호 괴테는 도이치의 위인들과 위대한 것은 모두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도이치 말로 번역한 덕택이라고 말했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영국은 셰익스피어와 성서 두 책을 가진 나라인데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이 썼지만 성서는 영국을 만든 책」이라고 하였으며 60년간의 탁월한 선정을 통하여 영국기에서 해가 지지 않을 만큼 영광과 번영이 극치에 달했을 때 누가 묻기를 「그 비결이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서슴지 않고 그가 늘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성서」라고 대답했다. 약 100여 년 전 패전 텐막은 심각한 민족적 절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 니콜라이 그룬드빅(Nicolai Grundvig)과 그 동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나라를 사랑하라, 흙을 사랑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기숙하는 국민고등학교를 도처에 세워 오늘날의 텐막의 기틀을 닦았는데 그 때 국민고등학교 교과과정의 60%가 성서였다. 스위스는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나라다. 그 근본은 제네바가 철저히 성서주의자였던 존캘빈(John Calvin)의 성서적 행정의 표본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스위스의 대법원에는 지금도 법의 절대 표준이 성서에 있는데 그 벽화는 법관들이 서서 성서를 가리키고 있는 그림이다.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나라가 혼미해지면 종교부흥을 일으키곤 했다. 여호사밧 왕은 나라 안팎이 심히 어지러워지자 16명의 장관들을 각처로 파송해서 성서를 가르치게 했더니 민중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따라서 국방과 경제와 정치가 크게 부흥한 바 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각 급 학교의 교육의 기초는 히브리 성서이고 성서퀴즈가 전통적 민속게임이기도 하다. 소련에서도 성서인구가 나날이 늘고 지구상 어느 곳보다 순사한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있어 승리는 이미 예수 편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인 이 성서는 시대가 없는 인류의 책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경전보다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어 어느 책보다 많이 읽고 수백만이 믿고 그것으로 사는 우리 민족의 책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모든 어린이들이 어머니의 무릎에서 성서와 기도를 배운다면 그 이상의 민족교육은 없을 것이다. 성서로 닦아 놓은 마음은 옥토와 같아서 새마을을 심어도 잘되고 경제부흥의 나무를 심어도 잘 된다. 59,000여 자연부락 사랑방마다 서당처럼 성서를 가르치면 새마을과 함께 새마음이 가꾸어지고, 중고등학생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면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페니실린 항생제의 약효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약 1만 명의 임상실험을 했다고 들었다. 성서의 특효에 대한 임상실험은 페니실린 효과만큼 나은 통계적 임상케이스로 증명되고 있다. 세계의 한국으로 등장할 통일한국의 새 얼도 이 책 속에서 안심하고 발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출처: 1973년 10월 31일 19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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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름다운 일들

과부의 엽전 두 푼 “식모살이 푼푼이 모은 돈, 몽땅 성서사업에 희사” - 심정숙 아주머니의 미거 식모살이 하는 아주머니가 푼푼이 모은 돈 9천원을 성서공회 사업에 써달라고 전하여 왔습니다. 그는 서울 시내 서대문구 대신동 142의 2호 장석영목사댁에서 식모살이 하는 심정숙(56세) 아주머니로서 지난 2월 14일 본 공회에 친히 찾아와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써 “푼푼이 모은 약소한 것이오나 금액을 보시지 마시고 제 마음을 보시고 받아 주시오”하고 일금 9천 원을 정중하게 전하여 왔습니다. 이에 감격한 직원들은 총무에게 안내한 후 동기와 사연을 물은즉 별로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우연히도 장석영 목사님께 온 이 책상 위에 있어서 읽고 읽고 또 읽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서공회 사업에 무엇인가 협조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고 하며 들고 온 손가방 속에서는 성서한국의 표지가 해어질 정도로 닳아져 통독한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특히 “전쟁의 환난 중에서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 살면서도 무사히 지내온 것을 감사하는 뜻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굳은 신앙의 태도가 엿보였습니다. 심정숙 아주머니는 예산읍에서는 한때 그곳 감리교회의 권사로도 있었다 하며 작년 12월에 이곳 장석영 목사 댁에 와 있으며, 아들 둘이 충북 충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합니다. 그리하여 필자가 조용히 묻기를 “춘궁기가 다가와서 어려울 터인데 아들들의 농비에라도 보태어 쓰도록 할 것인데……” 하였더니 그는 정색하며 “그보다도 더 급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하며 “우리도 남의 도움만 받지 말고 속히 자립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끊어서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던 우리는 너무도 감격하여 눈시울이 뜨거워 더 묻지를 못하였으며 이 정성어린 “과부의 엽전 두 닢”은 필연코 현재 전개되고 있는 자립대책 기금의 밑거름이 되게 할 것을 다짐하면서 9천 원 중 3천 원은 평생회원 회비로, 6천 원은 자립찬조금으로 각각 입금하였습니다. 심씨 아주머니는 현재 신촌 대신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놓고 간 현금 속에서 나타난 여사의 편지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에 뒤 따른 미거 “불구의 몸으로 눈물의 정성” - 권영석씨 금일봉 위의 심정숙 아주머니의 정성 어린 자립 찬조 성금의 신문 기사를 읽고 무척 감복하고, 나도 비록 불구의 몸이지만 이대로 있을 수 없다하며 금일봉과 함께 지난 3월3일 다음의 편지 사연을 적어 본 공회에 보내온 갸륵한 미거가 있습니다. 그는 즉 경북 안동군 남선면 외하동 외하교회 권영석씨로 불구의 몸이란 것을 밝혀 왔습니다. 경북 안동 외하교회 권영석 올림> 또 하나의 미거 “14년 전의 회상 되새기며 홍익제 목사의 양심 수표” -성서 사업은 이래서 유지된다. 6·25전,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어느 봄에 본 공회와 거래 관계로 약간의 성서대금이 청산되지 못하여 지금껏 마음에 꺼리어 오다가 지난 날의 회상을 되새기며 금 1,000원을 보내온 사실이 있습니다. 즉 지난 1월 31일부로 다음의 사실을 적은 대체 송금표는 현재 목포 성산교회의 홍익제 목사의 양심 수표였습니다.(당시에는 전남 담양에 계셨다 함) 14년전의 서류는 난리로 소실되었고, 또한 부산 피난 생활에서도 화재를 당하여 본 공회의 서류라고는 재가되고 말았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 뒤 서류에 남은 외상값 마저도 제대로 받기 힘들고 갚으려 하지도 않으려는 세상에 이러한 양심 수표를 받게 된 공회 총무나 기타 직원 일동은 그저 감사 감격한 나머지 “하나님의 상점”은 이래서 유지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략, 졸자 1950년 봄 (혹 전년 말) 귀 공회의 성서(지의혹 견포의 소책) 20권을 당시 특별로 외상 구입하여 대금을 판매하는 대로 계산키로 하였던 것인데 6.25 사변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후 그 대금을 상환하려고 하다가 혼란기에 한해한해 지나서 지금까지 미뤄왔던 것이옵니다. 그 당시에 전남 담양교회 목사로 재직 시였습니다. 화폐 개혁 전 여러해 전에는 항상 1만환을 보내겠다고 생각하고만 있었던 것인데 이제 비로소 소액이오나 금 1,000원을 앙송하오니 수령 후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 하략- 목포 성산교회 홍익제 목사 배상> 한일교회 주교 어린이들 “정성어린 이바지 들고” - 성서공회 내방 지난해 12월 27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내 신당동 67번지 소재 한일교회(기장) 유년주일학교 어린이 일동이 정성어린 헌금 3천원을 가지고 대표 17명이 인솔자 노별수, 홍지자 두 선생님을 따라 성서공회에 내방하였습니다. 본 한일교회는 권연찬 목사의 담임과 김익선 목사의 지도 아래 주일학교 지도도 하여온다는바 특히 평소에도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하는 성서사업을 이해토록 교육함은 물론,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인식시키기 위하여 공회의 활동상황을 견학토록 데리고 왔었습니다. 그리하여 총무실에서 성서공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듣고 어린이들로부터 질문을 받아 보기도 하는 등 재미있는 시간을 가진 바도 있습니다. 협성고등공민학교에서도 성서주일 헌금을! 시내 내수동에 위치하고 있는 협성고등공민학교에서는 금년도에 학교로서 제일착으로 성서주일을 지켜 그 헌금을 보내 왔습니다. 즉 동교 지도과장의 인솔 하에 학생대표 세 사람이 지난 12월 9일(성서 주일 다음날) 헌금을 하자고 본 공회에 찾아 와서 금 300원을 납입하였습니다. 동교는 매해 성서주일을 지키고 있으며 지도 과장의 지도 아래 종교부의 활동이 활발함은 물론 고등공민학교로서는 동교가 아직까지 성서주일을 지키는 유일한 학교로 나타나 있습니다. (출처: 1964년 제10권 제2호/자립 대책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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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역 성경

성경 말씀: 롬 10: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 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 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새로운 언어로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언어권에 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서 번역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 가가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 니다. 다른 언어권에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의 언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외국어입니다. 구약 성경은 고대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 니다. 고대의 성경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고, 선교지의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습니다. 고 대의 언어를 자기의 언어도 아닌 선교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초기 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던 게일 목사님은 국내 최초의 한국어 신약젼셔 (1900)의 번역을 마쳤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척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뉴욕의 60층짜리 생명보험 건물을 짓는 일도 이 일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 걸렸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놓기 위해 땅을 파야 하듯, 문장들을 골라내고 단어들의 의미를 파헤치며 엄습해오는 말라리아와 피곤과 싸우면서 선택하고 재어보고 판단하고 기록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파나마운하를 파는 것과 맞먹는 일로 여겨집니다. 말 그대로 파나마운하 인 이 신약성경은 두 개의 대양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이 없으신 사랑과 무한정 늘어나는 인간의 욕망을 연결시키는 운하입니다. 실제로 국어 문법서 한 권 없고, 제대로 된 국어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성경 원문의 의미를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한국어를 찾아내서 번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11월 24일에는 대한성서공회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한글 성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때 에 첫 한글 성서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부터 최초의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 그리고 초기에 번역하여 출간된 여러 단편 성서들과, 1911년의 최초의 한글 성경전서, 그리고 현재 의 개역개정판에 이르기까지 73권의 성경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에는 백여년 전 지구의 반대편에서부터 복음의 빛이 없는 암흑의 땅 조선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일에 참여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고 암송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의 신앙 이 서려 있습니다. 첫 한국어 번역 성서는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 목사님이 번역한 누가복음이었습니다. 스코 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것이 1866년이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1872년 2월에 중국선교사로 선택되었고, 3월 25일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을 하고 중국으로 출발합니다. 그의 나이 30세 때이며, 이 때가 고종 10년입니다. 미국과 일본을 거쳐 그해 8월 23일에 중국 산동의 지푸(芝罘, 지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지푸에는 스코 틀랜드 선교부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님이 1863년부터 선교 를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암슨은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전도를 나섰다가 대동강 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조선에 파송했던 목사님입니다. 윌리암슨은 1867년에 조선과 중국 국경에 인접한 세관인 봉황성의 고려문까지 선교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 의 종적을 찾으러 갔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에는 쇄국정책으로 한국의 문호 가 닫혀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윌리암슨의 권유로 1872년 10월에 영구(Yingkou, 中国 辽宁省 营口市)를 지나 우장(牛莊)으로 가서 겨울을 납니다. 다음해 1873년 2월 로스 목사의 아내는 아들 드러 문드(Drumund)를 낳고 건강이 나빠져서 3월에 죽었습니다. 영구나 우장 등의 겨울 날씨는 매우 춥기도 하지만, 신혼 후 임신의 몸으로 선교지까지 긴 여행을 하면서 건강이 나빠져 있 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교지에서 아내를 잃은 로스 목사님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여 선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둠의 땅인 한국에 복음을 전할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로스 목사님은 중국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조선에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 10월 9일 한국인 들의 왕래가 많은 고려문에 찾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조선 사람을 찾았습니다. 로 스 목사님은 중국인 여관에 짐을 풀고 그곳에 머물면서 조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숙소를 완 전히 개방하고 하루종일 한국인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말을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인 데 대하 여 실망하면서 우장으로 돌아갑니다. 로스 목사님은 1876년 봄에 다시 고려문을 찾아갑니다. 로스는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했을 때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어학 선생을 찾습니다. 그러는 중 소가죽을 배에 싣고 압록강 을 건너다가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무일푼이 된 한 의주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한국어 교 사를 찾는 로스 목사를 만나 한국어 교사가 되기로 약속을 하고, 로스 목사는 그에게 두 달치 의 돈을 선불로 주었지만, 서양인을 도와주면 사형에 처한다는 국법이 무서워서, 삼 일째 되 던 날 밤에 도망을 치고 맙니다. 이 도망 사건은, 그 당시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로스는 여러 차례 실패를 하면서 다시 사람을 찾았고, 마침내 이응찬이라고 하는 조선인을 만납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1877년에 한국어 초보(Corean Primer)를 발행했습니다. 문법부가 6쪽이 있고, 한국어 알파벳이 5쪽이며, 뒷부분은 회화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한국어 문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응찬 및 몇 명의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고전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번역자들이 먼저 중국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로스 목사님과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일일이 그리스어 성경과 대조 하면서 번역을 검토하고 수정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도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875년 말에 만주로 전임되어 로스 목사의 동 역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에든버러 연합장 로교회를 졸업하고 1871년 말에 중국 선교사로 지부에 도착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은 1876년 초에 로스 목사의 아들을 돌보기 위해 중국에 와 있던 로스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 을 하였고, 후에 로스 목사님의 한국어 성경 번역에 참여하였습니다. 번역문이 완성되면, 그것을 다시 고전 한문으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한국어 번역이 온전하게 되었는지를 점검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약 번역을 계속하여 1887년에 신약전서의 번역 을 완성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이 번역과 출판을 위하여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에 서 비용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원래 의미를 최대한 정확히 옮기는 것과 번역 언어의 관용적 표현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깝게 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1890. 11. 4일자 서신)이라고 ‘번역 원칙’을 밝히고 있습니다. 존 로스 목사님은 그의 책 '존 로스의 한국사'(1891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자국의 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낯선 사람들에게 인정하기를 꺼리며, 늘 한 자를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알려진 후에도 가르쳐 주기를 내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글로 말을 쓰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이 곳에서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한문 기독교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에 더 능숙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한글은 읽기조차 싫어했다.” 한국인 학자들은 자신들이 진서인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어 문자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로스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 학자들이 본토어로 된 책의 단순성을 비웃을지라도, 한국의 모든 여성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라야 성경 언어입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러한 말도 했습니다. “1천2백만 또는 1천5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선의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한글 성서가 한국에 전파되어서, 한국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한문 성경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1883년 5월 30일자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였던 루미스의 편지에는 이수정의 친척이자 친한 친구였던 한 사 람이 18 년 전에(1866년의 병인박해) 천주교로 개종한 죄로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 습니다. 이것은 이수정 스스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 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것을 감수하면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 니다. 조선 말기는 이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처형의 대상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사실상 목숨을 걸 각오를 하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환 부역조’(換父逆祖: 부모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르다) 했다는 말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대표 적인 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시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큰 결단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83년 5월 11일에 루미스가 미국성서공회 길맨 총무에게 쓴 편지에는, 일본에 사절단으로 온 한국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수정의 가장 큰 소망은 자기 민족에게 성경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다른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 듣고, 또 한국을 위해서도 성경 반포사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선 한한(漢韓) 성 경 번역을 시작한 다음 한글 성경 번역에 들어가자는 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루미스는 이 번역이 신약 전체가 번역되었다고 말했지만, 마태복음으로부터 사도행전까지만 책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마가복음 은 1885년에 요코하마에서 출판이 되었습니다. 루미스 총무가 경비를 지원하면서 번역을 하도 록 권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출판까지 합니다. 이수정은 자기를 데려가려고 한국에서 돈을 가지고 온 동생에게, 자기는 돈이 필요 없으며, 자신과 백성에게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루미스의 편지 에는, 이수정의 가장 큰 소망이 자기 민족에게 성경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 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한국어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님이 국내에 들어와서 국내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성서번역자회를 조직하면서, 국내에서 새롭게 성경을 번 역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1900년에 신약전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이 성경은 계속 해서 수정이 되면서 1911년에 최초의 셩경젼셔가 완성됩니다. 이 번역이 끝난 뒤에, 성서번역자회 회장이었던 언더우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 번역자는 그가 사용하려고 하는 언어와 원래의 성서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잘 알 아야 한다. (2) 원래의 뜻은 되도록 이 나라 말에서 사용되는 매개개념으로 완벽하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3) 이러한 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원래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조선인 학자를 확보하는 일이다. (4) 장래에는 이러한 학자를 키워서 성서 번역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1938년에는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원문대로’라는 번역 원칙을 따라 개역을 하고, 이 때는 한국인 학자들도 성경의 개역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다시 1961년과 1998 년에 개정이 되어 오늘까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한국인 학자들만 의 힘으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는 아직 성경이 있는 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전혀 번역되지 않은 언어들도 많습니다. “2014년 세계 성서 번역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6,901개 언어 중에 성경은 542개 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신약은 1,324개, 단편은 1,020개입니다. 아직 약 13억 명이 사용 하는 6,359개의 언어는 성서 번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성서의 일부만 번역이 된 상 태입니다. 2015년 12월 현재,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첫 번역 성경은 100여 년 전의 한국과 상황이 거의 같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첫 성경을 번역할 때는,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본토인이 외국어 성경으로부터 먼저 자기들의 언 어로 번역을 하고,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성경 번역 컨설턴트가 원문에 비추어서 그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는 130여 년 전에 첫 한글 성경을 번역할 때 외국 성서공회들로부터 도움 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2011년 ‘한글 성경 완역 및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얀마의 5개 소수 민족 성경 번역 사업’인 파오 구약 번역, 쿠미 친 구약 번역, 하와 나가 구약 번역, 쿠알심 신약 번역, 라시드 신약 해설 번역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에서 파오 구약 번역은 본 공회 번역실에서 직접 번역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에 한 글 성경 번역을 위하여 서구의 교회와 성서공회들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면서,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경 번역에 도움이 필요한 성서공회를 재정으로 그리고 인력으로 돕는 것입니다. 번역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하고, 번역이 이루어졌을 때, 번역을 점검할 수 있는 학자를 보내서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정확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 록 돕습니다. 그리고 첫 번역이 완성되었을 때, 조판을 지원해 주고, 또 인쇄 제본뿐만 아니 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나라까지 운송하는 비용까지 감당하여 지원해 줍니다. 소수 민족의 경우나 아직 교회가 성숙하게 성장해 있지 않은 경우에, 스스로의 힘으로 성경 번역 비용이나 조판 비용 인쇄 제작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을 위해서 우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1881년 로스 목사님의 보 고에는, 스코틀랜드 프리하이 교회의 엘진 목사님은 ‘고아 소녀들의 연주회 수익금’ 1.15파운 드를 보내주었으며, 랜즈다운의 도비 목사님은 한 가난한 사람의 연보 10실링을 보내주었는 데, 그의 가난을 생각할 때 이 기부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의 성서사 업은 외국 성서공회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외국 성도 들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또 실제로 다른 나라의 성 경 번역과 보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도움을 받았던 것도 복이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더욱 큰 복입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지원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보내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설교자료

성경 번역과 보급을 위한 아름다운 헌금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개신교 최초의 한글 성서는 1882년 중국 심양(선양)에서 번역 출간된 존 로스 목사와 존 매킨타이어 목사가 한국인 번역자들과 함께 번역하고 출간한 입니다. 성서 번역에 앞서 로스 목사는 1877년에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교습서인 《Corean Primer》를 출간합니다. 그리고 이응찬과 함께 한글 성경의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1878년 4월에는 서상륜과 함께 누가복음을 번역합니다. 로스 목사는 자신의 선교사 봉급에서 떼어낸 자금으로 1877년 여름부터 1879년 안식년 휴가를 떠날 때까지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에게 마태복음에서부터 로마서까지 번역하도록 합니다. 이 과정에 소요된 비용이 50파운드 정도 됩니다. 당시에 10파운드가 조선인 권서 1명을 1년 정도 고용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하니, 50파운드의 비용이 얼마 정도의 비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스 목사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 있는 동안의 번역 경비는 매킨타이어 목사의 ‘아내의 지갑’에서 나왔습니다. 로스는 안식년 휴가 중인 1879년 6월에는 교단 선교위원회에 참석하고, 7월에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 한글 성경 출간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 요청에 대해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서는 1880년 10월 26일 한글성경위원회에서 인쇄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11월 22일 재확인합니다. 이 결정에 따라 슬로완 총무는 로스에게 50파운드, 매킨타이어에게 50파운드를 지불했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일본지부 릴리 총무가 요코하마에서 주조한 연활자 35,563개를 상해를 거쳐 잉커우에 있는 매킨타이어에게로 발송했습니다. 활자 비용은 운송비를 포함해서 25파운드였습니다. 로스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한글 성경 발행을 도와줄 것을 스코틀랜드 교회에 호소했습니다. 여기에 많은 교인들이 도와줄 것을 약속하거나 헌금을 합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새 번역본 소식을 듣자마자 제한된 범위 내에서 활자를 지원해 주기로 선뜻 동의했다. 그러나 공회의 자금이 일반 불경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사업 전부를 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활지 비용 및 매킨타이어와 내가 지금까지 번역 작업을 준비해온 비용 130파운드를 지원했다. 우리 교회(연합장로교회) 내에서 진지하고 실제적인 기독교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신사 한 분이 인쇄기와 잉크 등 필요한 것을 구입하도록 35파운드를 내어놓았다. … ‘자유높은교회’(Free High Church)의 엘진(Elgin) 목사는 한글 역본을 위한 첫 기부금으로 1.15파운드를 보냈는데, 그것은 ‘고아 소녀들의 연주회’ 수익금이었다. 랜즈다운(Landsdown)의 도비(Thomas Dobbie) 목사는 한 가난한 사람의 연보 10실링을 전해 주었는데, 그의 가난을 생각할 때에 이 기부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말 성경 번역을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고 출판하여 보급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각국 성서공회와 교회에서는 ‘성서공회주일’(Bible Society Sunday)을 정하여 1년에 한 번씩 헌금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성서공회주일을 지킨 것은 1899년입니다. 이 때 몇몇 교회에서 성서공회주일을 기념했고, 102원 36전이 헌금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교회에서는 특별예배를 드렸는데, 설교의 공통된 주제들은 성경의 가치와 성경의 요구 및 권위 그리고 성서공회들의 목적과 목표에 대한 것이었다. 몇몇 교회에서는 연보를 거두어 성서공회 기금에 102원 36전을 보태었다.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이 금액은 ‘아름다운 헌금’이다. 한국의 성서사업이 외국의 지원으로부터 완전하게 자립을 하는 것은 1979년입니다. 대한성서공회는 1979년에 재정적으로 자립을 하면서 그 이듬해부터 세계 성서운동에 협력하기 위해 지원금 1만 불을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작은 금액이지만 해마다 조금씩 기여를 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해부터는 차차 지원액을 늘려가다가 1993년에는 30만 불을 지원했습니다. 1995년 대한성서공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4년부터는 1997년까지 4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 연간 100만 불씩 지원금을 보내기로 하고 이를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최근까지 보조금을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 매년 100만 불을 보냈고, 거기에 더하여 미자립성서공회에 성경을 무상으로 기증했습니다. 로스 목사는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도 초기부터 성서 사업을 위하여 작지만 아름다운 헌금들을 했습니다. 최초의 번역에 대한 지원으로부터 생각하면, 한국 교회의 성서사업이 외국의 성서공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거의 100년이 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사랑해온 한국 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크게 부흥 발전하였고, 다른 나라의 성서 사업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자유높은교회’(Free High Church)의 엘진(Elgin) 목사가 한글 역본을 위한 첫 기부금으로 보내주었던 ‘고아 소녀들의 연주회’ 수익금 1.15파운드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받은 복음을 다시 땅 끝까지 전하는 일은, 먼저 복음을 전해 받은 우리의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하였으니, 먼저 복음을 들은 우리들의 발이, 성경 말씀대로, 좋은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한국 교회에서 처음 드렸던 ‘아름다운 헌금’은 매우 작은 금액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아름다운 헌금’으로 전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한 권이 한 명의 선교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에까지 성경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아직 백 년 전의 우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고,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이유로 성경을 보급하기 어려운 곳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성경을 보내는 일은 이제 ‘자유높은교회’의 고아 소녀들의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우리의 일입니다.

설교자료

성서는 어떠한 책인가? (디모데후서 3:15-17) - 정진경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요 둘째는 성서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분리하면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서가 없으면 교회가 없고 교회가 없으면 성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읽어보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이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신사들의 신앙과 생활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 성서보다도 교회를 우월한 위치에 둡니다. 즉 눈에 보이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절대 권위로 인정하고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완전히 보증하여 주는 것은 교회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가톨릭도 물론,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성서의 해석은 교회에 의하여 공인되는 것이며 교회의 전통과 성서를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의 궁극의 권위는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교회보다도 성서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성서만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과 권위로 삼고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르쳐 준다고 믿으며 개신교회의 경전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갖습니다. 성서는 구약과 신약 두 권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은 율법과 예언의 책이며 그리스도 이전의 기록이고 장차 오실 구세주를 보여줍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언행록이며 그의 제자들의 신앙고백의 기록입니다. 즉 오신 구세주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기초요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성서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에 이르러 끝이 납니다. 창세기는 천지창조의 기록이며 계시록은 천지 완성의 기록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글은 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없습니다. 고로 이 책은 일개의 민족사나 세계사가 아니라 우주의 유래와 목적과 종국을 설명해주는 우주사입니다. 그러면 성서는 어떠한 내용의 글입니까? 첫째로 성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글입니다. 계시란 말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표시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인간의 지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적응으로서만 성립됩니다. 적응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고 인간의 능력에 적합한 방도를 취하여 계시함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볼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심을 말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듯이 성서를 떠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고로 루터는 성서와 예수를 비교하면서 보자기에 싸인 아기라고 비유했습니다. 두 번째로 성서는 인생의 글입니다. 성서가 인간 역사를 두고두고 건져 온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 문제요 둘째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성서는 이 두 가지 큰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는 글입니다. 1,600여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서 지위와 지식과 환경이 각각 다른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성서의 내용은 인간의 죄와 구원이라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사회와 국가, 역사의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금도 은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절망에서 구해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하여 단절된 장벽을 헐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런 사실을 세밀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고로 성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세 번째로 성서는 영원불멸의 글입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성서와 같이 시대마다 박해를 받은 책은 없습니다. 학자의 손으로 제왕의 손으로 교권자의 손으로 실로 무수한 조소와 박해를 받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요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불멸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이신 산 그리스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사도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이 떨어지나 오직 주의 말씀만은 세세토록 있다”(벧전 1:24)고 하였고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이 영원토록 하늘에 굳게 섰나이다”(시 119:89)라고 노래했습니다. (출처: 1981년 12월 31일 27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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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말씀 (창세기 12:1~4) - 김동익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세기 12:1~4) 미국의 정신 분석가이며 사상가로서 작년에 작고한 「에리히 프롬」(Erich From)은 인간을 가리켜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희망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동물은 과거의 경험과 관습에 의해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내일을 꿈꾸며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는 성취욕구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성공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성공이냐 할 때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성공은 붙잡히는 것이 아니고,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인간은 두 가지의 느낌 중에서 성공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소유의 욕구가 충족될 때 성공의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한편 소유는 못할지라도 창조의 욕구가 충족될 때 느껴지는 성공의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것이 발견되거나 발명될 때 또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질 때 느껴지는 성공의식입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소유적인 인간으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창조적인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활용하여 창조적인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는 데 급급했습니다. 창조보다는 소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삶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숱한 죄악과 더불어 불안과 염려, 시기와 다툼, 수고와 고통의 어둠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은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전환하여 보다 밝은 내일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이 전환을 가리켜 혁명적 전환 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극적인 전환점을 가진 한 인간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보다미아 북부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유브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 있는 곳이어서 고대 중동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부유한 족장이었습니다. 갈대아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은 소유적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을 더 사고, 재산을 모으고, 아내를 얻고, 가정을 이루는 등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만족한 생활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들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은 인간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고, 새로운 삶을 갖도록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는 말씀이 들려 왔을 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4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안일한 자기중심의 삶에서 일어나 내일을 향해 삶의 목적을 갖추도록 합니다. 즉 “어떻게 사느냐”에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의 삶의 자세를 갖도록 합니다. 둘째,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2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복의 소유자에서 한걸음 나아가 “복의 근원” 곧 복의 기여자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의 자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남을 위해 자신을 줄 수 있는 삶을 갖추도록 하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복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말씀은 인생으로 하여금 절망 속에 좌절하지 않게 하고 희망 속에 믿음을 키워나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지방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슬하에는 자식 하나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황혼기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면에 희망을 포기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을 때 인생의 새 봄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새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시편의 노래처럼 아무리 캄캄한 인생행로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을 밝게 비춰 줍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출처: 1982년 6월 30일 28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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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손에는 성서를 (시편 119:9~16) - 이승하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 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19:9~16) 블란서의 젊은이가 군에 입대할 때는 두 권의 책을 갖고 나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서요, 다른 것은 파스칼의 ‘팡세’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입니다. 거기에 인간을 위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이네는 병으로 죽기 직전에 ‘나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성서였다’고 남겼습니다. 성서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살펴서 성서를 대하면 그 후의 나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는 이룩되어져 가는 인격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엇으로 그 고귀한 인간을 완성할 것입니까? 헬라어로 젊은이라는 말은 ‘새롭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고로 지금까지 있던 것을 추구하지 말고 새롭고 창조적인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무궁한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었을 때 매우 교만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를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성서를 갖고 가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후 그는 성격적으로 겸손하고 유순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훌륭한 문학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서가 그에게 없었다면 그의 불후의 작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유명한 서적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성서는 만고불후의 영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시절만 아니라 평생을 두고 간직해야 할 말씀입니다 특별히 고난의 때에 그 말씀은 깊은 감명과 위로를 줍니다. 중국의 장제스는 어려운 감옥생활에서 성서를 읽고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말씀의 명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순간이라도 버리지 말고 성서를 명상한다는 것은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리빙스턴을 이어 아프리카 탐험을 한 미국의 탐험가 스탠리는 아프리카 탐험을 시작할 때 73권의 책을 갖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대지방의 내려 쪼이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도저히 그 책들을 갖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한 권씩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일 마지막까지 보관하고 있던 책은 바로 성서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손에 있던 성서는 그의 생명과도 같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그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성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편 기자는 역설했습니다. 그 말씀이 젊은이의 행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배워야 합니다. 세 번째로 그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새로운 신앙적 인격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바른 기독교의 신앙은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이룩됩니다. 성서는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손에 들려져 있어야 할 무기입니다. 이 세대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오직 이 말씀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기본적인 자세를 갖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제국이었던 로마를 복음화하는 데 가장 큰 고난의 길을 오직 말씀으로 끝까지 이기고 나갔습니다. 학생의 손에 전문서적이 들려지기 전에, 기술자의 손에 도구가 들려지기 전에, 운동선수의 손에 그 운동구가 잡히기 전에, 군인의 손에 무기가 들려지기 전에, 구제하는 사람의 손에 구제품이 들려지기 전에 먼저 성서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행위이며 그것이 그 인생의 모든 행위를 주관할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성서가 되어야 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윌리암 콜린즈는 만년에 신약성서 한 권만 항상 손에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 그것이 가장 훌륭한 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은 가장 귀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며 사람에게 가장 감명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며, 오늘도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핵무기의 감축을 위하여 동서양의 정치가 초긴장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더 훌륭한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는 한 어떤 전쟁도 도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래를 창조해 가야할 미래의 주인공들이여, 무엇을 원합니까? 그 이상을 손에 들려진 성서로 성취하기 바랍니다. (출처: 1985년 여름 제31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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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 8:1~3) - 임영수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1~3) 몇 년 전 스위스 취리히에 얼마동안 머물면서 경험한 일입니다. 저녁 무렵 호숫가에 나가보면 잘 조화된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연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몹시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의 젊은 남녀 마약중독자들이 몰려들어 천태만상을 이룹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는 안정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부유층에서 그런 유의 청소년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살아있지만 죽었다’고 하는 성서에서의 표현이 바로 이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들에게 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교회가 주어야 된다고 하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교회에 나가보면 건물은 웅장하나 앞자리에 노인 몇 사람뿐이며, 논리적으로 철학적인 설교가 선포됩니다만 그들의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위스에는 성경이 없는 집이 없으며 중고등학교에서는 성경이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성경을 반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농부가 하나의 쌀을 생산해내면 쌀이 필요한 사람이 사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부가 식구들 구미에 맞게 밥을 지어야 식구들이 먹고 건강한 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성서공회에서 각국 나라의 말로 성서를 찍어내는 일 자체가 영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므로 일선의 목사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영적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잘 요리해서 공급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공회가 하는 일과 교회 목사들이 하는 일은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찍어내도 이것이 잘 배포되지 않으면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려 해도 북한에서처럼 잘 접할 수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일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여기에 또한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여야 성서공회와 목사가 하는 일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기갈 가운데 있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책보다 쉽게 구입할 수 있고 거리상으로나 시간상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의 교회가 좀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역사 속에서 바르게 선포하고 알려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서공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산하고 또 전 세계에 수출하는 데 힘쓰며, 우리 일선의 목사들은 성령의 도움 안에서 열심히 이것을 풀어서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선포되어질 때 오늘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사람의 귀에 바르게만 들려지면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을 만들어간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성입니다. 우리의 말은 아무런 능력도 실효성도 없지만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입으로부터 나오고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바르게만 받아들여지면 상당히 놀라운 창조의 역사적 사건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목회를 현장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찍어내고 선포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역사를 구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데 우리의 소망과 기대를 걸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큰 의미와 보람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 1988년 6월 34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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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역사” (히브리서 4:12) - 최종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브리서 4:12) 창세 이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많은 사건들 가운데 말씀의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교회를 갱신케 하여 사역하게 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현현하신 그리스도가 그 신앙을 바로 고백하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의 사령부가 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감격스럽게 새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계시된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를 고백하는 믿음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을 가지고 창조의 뜻하신 어둠과 빛, 진선미 그리고 선이 끊임없이 새롭게 창출되어 나갈 수 있도록 교회는 운동하는 힘을 가지고 역사하게 된 것인 줄 압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많은 과제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굴절현상을 창출해가고 있는 아픔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대로 통일을 제안하고 심지어는 우리 교회에서까지 통일에 대한 제안이 극렬해져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바벨탑은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방언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엄숙히 교훈해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수없는 역사의 심판을 거듭해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이 많은 문제들은 어디에서 풀어 해결을 볼 수 있을까요? 이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그리스도의 계시적인 목적으로 역사하는 이 교회가 그 말씀의 운동력을 가지고 여기 히브리서가 말씀한 것처럼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하게 할 때 가능한 그러한 희망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줄 압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많은 지역적인 문제를 고함쳐 외치지 아니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할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살아있는 이 말씀, 혼돈된 땅 위에서 진선미를 창출해내는 창조의 생명력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이 인간 역사를 구출하시기 위해서 친히 그 말씀이 인격을 이루시고 현현하셔서 그 메시야를 고백하는 신앙 위에 그 교회로 하여금 끊임없는 역사의 갱신을 이룩하게 하시며, 이 교회가 살아 있는 말씀의 선포와 이 말씀의 경첩, 이 말씀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는 그러한 신앙의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굳이 18세기 웨슬레의 말씀의 운동이라든지 성령의 운동, 칼빈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 등과 같은 예를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무도 목마르도록 요청되는 오늘의 명제인 것입니다. 참으로 귀중한 보화인 이 말씀들이 비록 질그릇에 담겨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이 보화의 새로운 빛이 이 어둠 속에, 이 혼돈 속에 비춰져서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진리의 길을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전개해야 할 시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성서공회가 말씀의 선포에 박차를 가하는 이 사역은 실로 하나님 앞에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더 가져다주는 사역이라고 믿습니다. 영광이 여기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1989년 6월 35권 1호)

설교자료

하나되게 하소서 (요한복음 17:11) - 정진경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1)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지상 생활을 거의 마치려는 무렵에 드린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또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마치기 전에 유언과도 같은 위의 두 가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나는 하나가 되라는 일치에 관한 말씀이고, 또 하나는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선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한 세기 동안에 두 번째 위임사항인 증인의 책임은 비교적 성실히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분부이신 하나되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크고 아픈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열이요, 분파주의입니다. 온 세계가 지금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하나의 세계를 바라는 의지는 만민의 공통된 이념이요, 세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는 먼저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하나될 때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세계의 질서도, 인류의 평화도, 교회의 일치와 연합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되는 길을 제시하면서 “너희는 먼저 주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하고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것들이 ‘하나의 뜻’을 위해 조화를 이루고 협력을 할 때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저런 많은 연합기관을 조직하고, 규약을 만들고, 인물을 배치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인 활동만으로는 연합운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마음과 사랑과 뜻의 내적 일치가 없이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연합운동은 먼저 우리의 마음이 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가 되는 길을 가르치면서 ‘다툼이나 허영’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다투면 경쟁심이 생기고, 경쟁심이 커지면 승부욕이 조장되어 자기집착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자기의 주관적인 고정관념이 굳어지면 자신을 비울 수가 없고, 자기를 비우지 못하면 상대방을 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때는 연합정신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를 포용할 수 있었고 반역하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1994년 9월 40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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