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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3

3. 개역한글판 성경의 출판 준비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개정 작업과 조판 및 출판이 육이오 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완성된 역사는, 돌아볼수록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온통 혼란 속에 있을 때도 성서 사업을 감당했던 분들은 흔들림 없이 옛 철자법으로 되어 있던 <셩경개역>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정하는 작업을 서둘러 추진했던 일은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신문과 잡지 등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출판되고 있었습니다. 성서 사업을 추진했던 분들은 성경의 철자법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임영빈 총무가 1949년 3월 취임한 후 주력한 사업은 새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의 출판이었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개역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하여 1949년 상반기에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출판했고, 이어서 성경 전체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했으며, 조판 작업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모든 출판물이 새 한글 철자법을 채용하자, 성서공회도 새 철자법에 맞는 개역 성경을 출판하는 것이 시급했다. 1947년 성서위원회에서 김춘배 목사가 “성경을 새로 인쇄하려면 새 철자법을 사용하자”는 안을 제기했다. 1948년에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개역 성경의 철자법을 수정하기 시작하여 새 맞춤법을 적용한 『마태복음』을 출판했으나, 통일안의 기준에서 벗어나 많은 지적을 받은 후 중단 상태에 있었다. 임영빈 목사가 1949년 3월 제2대 총무로 취임한 후 주력한 첫 사업은 새로운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철자법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르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졌던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개역 한글판 성경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일단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1949년 상반기에 출판했고, 10월 말까지 3만 권 이상을 반포했다. 개역 성경의 맞춤법 수정 작업은 시작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50년 2월에 마무리될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김태룡이 성서 위에 그대로 붉은 잉크로 수정을 하면 강병주(姜炳周) 목사가 이를 감수하고 다시 임영빈 총무가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태룡은 이 작업이 끝나면 문교부 추천으로 강릉사범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임영빈 총무의 부탁으로 그 해 4월부터 공회 출판부의 정식 직원이 되어 성서의 조판과 출판을 담당했다. 1950년 4월부터 성경전서의 활자 개발과 조판 작업에 들어갔으며, 6월부터 교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경전서 100여 페이지의 초교가 나왔을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고, 폭격으로 인쇄 공장이 파괴되면서 성경전서의 출판은 중단되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2

2.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이 되고,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성서 사업을 담당했던 분들은 성서공회 재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성서 보급 사업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진: 이 시기에 ‘연합성서공회(세계성서공회연합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신약개역>]] 성서공회는 해방 직후 혼란과 분열 속에서도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재건에 착수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리 점령 결정에 따라, 하지(J. R. Hodge) 중장 지휘 하에 미 육군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1945년 9월 9일 남한에 군정을 포고하고, 12일 아널드(A. V.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미 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정태응 총무는 미 군정 당국에 조선성서공회의 역사를 보고하고 적산으로 편입된 재산의 반환과 성서사업 재개를 요청했다. 군정의 적산 관리국은 9월 19일 공회의 사업 재개를 허락하고, 일제가 압류했던 재산을 정태응 총무에게 반환하고 적산 해제를 통고했다. 공회의 자산을 돌려받은 정태응 총무는 10월 11일 종로 성서회관을 다시 열고 성경 판매를 재개하는 한편, 오긍선 의사와 김관식 목사와 함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회 재건을 논의했다. 위원회는 이 날짜로 공회에 토지를 헌납한 이풍한(李豊漢) 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풍한은 대한제국 말기에 판서를 지냈으며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대지주였는데, 소유하고 있던 논밭 80만 평 가운데 30여만 평을 공회에 기증했다. 그가 이런 막대한 토지를 기부한 것은 해방의 충격과 함께 오랜 친구인 정태응 총무의 설득과 공회 사업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이풍한은 1945년 12월 언더우드(H. H. Underwood) 박사와 함께 성서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6년 11월 7일 해방 후 첫 성서위원회 연례회의가 열렸다. 성서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성서공회 재단 설립을 위해 임명된 실행위원회는 1947년 4월 30일 회의에서 재단법인 신청을 위한 공회 정관을 제정했다. 재단법인 설립은 재정적 자립과 함께 조선성서공회가 독립하고,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협력 기구로 남는 것을 의미했다. 1948년 5월 7일 미국성서공회 로버트슨(James C. F. Robertson) 박사가 한국에 부임하여, 임시 부총무 스코트를 대신하여 미국성서공회 대표자로서 부총무직을 맡았다. 정태응 총무는 70세 정년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성서공회에서 은퇴하고, 그의 후임은 성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에서 결정하도록 결의했다. 1948년 12월 23일에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는 이러한 결의에 따라 성서위원회의 지명 추천을 받은 임영빈 목사를 정태응 장로 퇴직 시 후임 총무로 임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조선성서공회의 명칭을 대한성서공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8월 23일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공식 출범한 공회는 1948년 11월부터 대한성서공회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49년에 공회에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조선성서공회가 대한성서공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임영빈 신임 총무가 취임했으며, 회계연도도 10월 31일자로 마감하도록 변경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를 협력공회로 초청했으며, 세 협력 공회의 대표는 한 명으로 하기로 하고 그를 부총무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회 이사들을 새로 선출했는데, 이후 성서위원회가 후보를 추천, 선임하기로 했다. 1949년 10월 26일 문교부장관의 명의로 대한성서공회 재단법인 인가가 나왔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성서공회는 군정 당국으로부터 적산에 포함되어 있던 성경전서 15,320권, 신약/구약전서 42,961권, 단편 509,343권(총 가치 91,207원)을 돌려받았고, 곧바로 이들의 판매에 들어갔다. 그 결과 12월까지 세 달 동안 성경전서 1,634권, 신약/구약전서 8,949권, 단편 231권을 판매했다. 몇 년 동안 성경이 판매되거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심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성경을 구하러 서울까지 오는 이들도 있었고, 성경을 구입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회가 가진 성경 재고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에 대처할 수 없었고 새로 인쇄할 비용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1945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기증한 미국성서공회에 다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1946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영국성서공회는 중국 중경에 있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위해 1,000부의 신약전서를 출판하도록 지원했다. 1945년 9월에 인쇄된 이 신약전서는 중국에서 미국성서공회 대리인으로 활동하던 모르텐슨(Ralph Mortensen)에 의해 9월 20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임정 부주석 겸 한인기독교공동체 회장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전달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성경 반송이 봉쇄된 상황에서 출판된 이 중경판 신약전서는 긴밀한 국제 협력의 산물이었다. 임정 요인과 독립지사들은 해방 이후 출판된 이 첫 한글 신약전서를 들고 10월과 11월에 귀국했다. 미국성서공회는 미국장로회의 지원으로 1945년 9월 뉴욕에서 25,000부의 한글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이 가운데 수천 권이 먼저 하와이에 있던 전쟁포로수용소의 한국인 포로들에게 보내졌다. 미국성서공회는 1947년 50,000부의 한글 신약전서와 25,000부의 복음서를 인쇄하여 미 군정 당국의 협조를 통해 서울 공회에 기증했다. 한편 성서공회 사업을 위해 과거에 오랫동안 실시했던 5월 마지막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는 전통도 1946년에 회복되어, 180여 개 교회가 성서주일 헌금 23,454원 59전을 공회에 전달했다. 이 가운데 6,200원은 정동교회 미군 예배에서 연보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금도 일반 후원자 10원, 특별 후원자 100원, 평생 후원자 1,000원 세 종류로 모집하여 437명의 후원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33,590원을 기부했다. 1946년 여름 홍수로 많은 교인들이 집을 잃었다. 공회는 이들을 위해 성경을 무료로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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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1

<대한성서공회사 3>에는 1945년 해방 전후의 성서사업으로부터 2002년까지의 성서 사업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제 말 성서 사업이 강제로 중단된 때로부터, 해방 후 성서 사업이 다시 시작된 일과,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출판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진 일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그리고 육이오의 전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의 개정과 출판과 보급을 뒤돌아봄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성경이 선배 신앙인들이 피와 땀의 결실인 것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서주일 설교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가려 뽑아서 소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서공회사 3>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성서 사업 강제 종료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지를 받던 마지막 시기인 194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는 성서 사업 자체를 압박하다가 마침내 성서사업 자체를 중단시킵니다.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는 내용을 보면, 식민 통치의 은혜가 아니라 그 속셈이 얼마나 간악한지를 역설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신사참배와, 일본인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인 동방요배를 하며, 승전기도회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광복과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습니다.]] 1940년 9월 19일 실행위원회가 조직된 날 저녁 정태응 총무는 공회의 다른 직원 두 명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구속되었다. 외국인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는 간첩 혐의였다. 그는 70일 동안 감금된 후 11월 28일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 정책에 협력하도록 협박을 받았다. 정태응이 수감 중이던 11월 21일, 성서위원회 임시회의는 외국 선교사를 배제한 채 21명의 한국인과 일본인만으로 위원을 구성하기로 정관을 개정했다. 1941년 1월 1일 조선성서공회는 홉스 총무와 정태응 총무 책임 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월 10일 일본교회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서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 설립 방안을 논의했으며 3월에 재단법인을 구성했다. 이는 3월에 김경삼이 장로회 총회 특별위원을 통해 시가 30만원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기증하여 매년 경상비 1만 5천원을 공회에 제공하면서 법인 구성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4월 1일 정인과가 공회의 총무로 취임하고 공회의 업무를 장악했는데, 이는 일제 당국의 강요에 의해 통과된 계약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홉스 총무는 1941년 3월 18일 모든 재고와 재산을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에 인계하고 사업을 마감했다. 태평양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홉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태응을 조선성서공회 대리총무 겸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권한을 위임한 후, 안식년 휴가를 명목으로 5월 23일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이는 1895년 켄뮤어 총무의 부임 이후 46년간 서울 지부를 통해 성서사업을 해 온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정태응은 다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10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이 영국 이름이지만, 일본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석방되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노력한 끝에 공회 재단의 자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12월 22일 적산 관리법과 적산 관리 시행령을 공포하고, 29일 ‘적산관리법 시행규칙’을 공포한 후, 외국 선교부나 외국인이 관여한 재산을 압류했다. 1942년 5월 23일 모든 공회의 자산은 적산 관리인인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지부장의 손에 들어갔다. 정인과 총무를 비롯한 공회의 친일 직원과 성서위원회 위원들은 공회의 자산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6월 9일에는 성경 판매 중지 명령에 의해 성서사업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다만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 1942년 6월부터 4년간 성서공회 사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일본 천황제 이념과 국체의 본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와 모든 기독교 문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한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유대 민족주의 요소가 강한 구약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요한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하며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와 승전기도회에 참여했다. 그런 훼절과 수난의 교회에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해방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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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문서를 불태운 과부 교인

강화읍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과부교인’ 김씨 부인이 있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였지만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란 여종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어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18장을 읽다가 18절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였다. 그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 즉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요?” 그러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 “마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들이기로 했다. 종에서 양녀로 신분이 바뀐(롬8:14) 복섬이는 더욱 정성스럽게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얻은 딸로 더욱 기뻤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의 감동 또한 컸다.    이런 식이었다.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읽었다. 강화의 어떤 교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했던 것처럼 침으로 갠 진흙을 맹인 눈에 바르고(요9:6) 기적이 나티나기를 기다려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 같은 ‘문자적’ 신앙을 미신적인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문자적으로’ 실천함으로 뒤이어 나타날 이적에 기대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개종 1세대’는 성경을 읽되 ‘해석’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성경을 읽는 한국 교회 특유의 소박한 신앙 전통이 수립되었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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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문서를 태운 부자 교인

1900년 무렵 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에 종순일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잘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 전도사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교인이 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19:21)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들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음 섬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 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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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성서주일 포스터

* 2018년 성서주일 포스터입니다. 다운받으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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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케도니아인

한국에 (개신교)복음이 들어오던 1870~80년대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변동기에 겪어야 할 혼돈과 창조의 시대였다.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내적인 개혁과 외적인 개방을 요구하는 신진세력과 기존 가치 체제와 사회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 세력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빚어질 것은 자명했다. <‘조선에서 가장 귀한 책’>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대원군을 중심한 수구세력과 명성황후를 중심한 진보 세력의 무력 충돌로 발전된 이 사건 와중에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데 공험한 이수정이란 양반이 있었다. 그는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처음 목적은 농학과 법률, 우편, 해운 등 ‘개화된 문명’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882년 9월 일본에 도착한 직후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였던 츠다센을 만났다. 그런데 츠다센은 유럽 유학 중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농학사’를 설립, 운영하면서 일본 농업의 근대화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수정은 츠다센을 방문해 대화하는 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한문 족자에 눈길이 쏠렸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 팔복’ 말씀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동양의 고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츠다센은 이 호기심 많은 이방인에게 족자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읽을수록 그 책에 빨려 들었다. 그가 성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둘이 책을 한 보따리 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오.” 그리하여 ‘조선에 가장 귀한 책-성경’에 대한 외경스런 탐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도쿄로 게츠죠교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다. 이수정은 세례 받은 직후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권유와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그에게 지급되던 장학금을 중단하고 귀국을 종용하였고 가족도 나와서 “목숨이 위험하니 어서 빨리 ‘사교’(邪敎)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어떤 위협과 회유도 그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그는 성경 번역에 몰두하여 1884년, 한문 성경에 우리말 토(吐)를 단 형태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나왔고, 곧이어 마가복음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여 1885년 2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란 쪽복음이 인쇄되었다.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호소>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루미스와 매클레이, 녹스 등 자신을 돕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교회에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1883년 12월 13일에 쓴 편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 나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 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그의 편지도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성경을 번역한 것도 ‘민족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나와 선교하는 것이었다. 국내 분위기도 바뀌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 정보는 나라를 개방해서 외국과 교류하여 백성들의 처지를 개선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용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말라고 호소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배치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걱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나라 교사”는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66년 천주교인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만향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 전술이었다. 이수정은 이러한 ‘침략적 종교’가 지닌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근대화를 위한 개방과 개혁은 민족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수정은 우리 민족의 자기 개혁의 원리를 복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가르쳐 줄 선교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바는 지금 당장이라도 몇 명을 이곳 일본에 보내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협의하면서 사업 준비를 하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고 가장 안전하도고 적절한 방법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기를 간절하게 빌고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영문으로 번역된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같은 미국의 선교 잡지에 소개되었고 이 일로 이수정은 서방 기독교계에 ‘한국의 마케도니아인’(Macedonian of Korea)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시아의 서쪽 끝, 드로아에 머물고 있던 바울의 꿈속에 나타나 그로 하여금 유럽 선교의 길을 열게 만들었던 마케도니아인처럼(행 16:8~10), 아시아의 동쪽 끝 한국에서 건너온 이수정의 호소는 복음 선교의 물꼬를 한국 쪽으로 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편지가 서방에 전달된 1년 후 미국 교회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고 1885년 2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 한국 선교 개척단이 한국으로 가기 전 일본으로 들렀을 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한국 언어와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중 선발대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했을 때, 그들 짐 속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 마가복음이 들어 있었다. 어느 지역 개척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간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희귀한 경우였다. 출처 : 1999년 성서한국 가을 45권-3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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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외우는 사람들

성경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유대인들은 유대식으로,헬라인은헬라식으로,유럽인은 유럽식으로,아프리카인은아프리카식으로 대했다.마찬가지로 한국은 한국식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해석하고, 실천했다. <사경회 : 한국 교회의 ‘유월절’>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대할 때 종교적 경외심을 갖고 최상의 예를 표하였다.성경은 함부로 해서는 안될 종교적 경외와 예배 대상이었다.한말 평양에서 활동하던 ‘마들린’이란 한국인 전도부인은 “아이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반드시 선반 위에 모셔 놓아야 하고 성경을 옮길 때는 항상 두 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하면서 성경을 팔았다고 하는데,이는 동양 특유의 ‘경전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성경은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경전’이었다. 이런 한국식 경전 문화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사경회이다.요즘 사경회는 길어야 사흘,그것도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 예배를 끼고 해치우는 것으로 끝나지만,옛날 사경회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이었고 길면 한 달이었다.선교사들은 농번기 때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수백 리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왠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경을 배웁니다.” 평양 선교사 블레어는 한국 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 생활을 접어 두고 오직 성경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합니다.이같이 성경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 전체가 하나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었다.사경회가1907년 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준 사실이다. <성경을 외우는 맹인 전도자> 초대 교회 사경회는 형식에서도 달랐다. 마치 서당에서 경전을 배우는 것과 같았다. 훈장 앞에서 학동들이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과 중용을 배우듯 교인들은 인도자 앞에서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읽으며 배워 나갔다. 초기 사경회 공부도 성경 외우기로 시작되었다. 암송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다. 선교사들은 이런 한국 교회의 성경 암송 문화에 대해 경이로운 찬사를 보냈다. 일제시대 감리교 협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데밍의 증언이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그의 눈이 되어 복음서 전체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그는 말씀 공부에 전념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사람은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과 절까지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들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에서는 이 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해 성경 배우는 깊은 맛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교인’은 개성의 전설적인 ‘맹인 전도자’ 백사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맹인이 되어 개종 전에는 명복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 백사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 동안 점쳐서 번 재산을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지팡이 하나 잡고 전도 길에 나서 고양∙파주∙장단∙개성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는 아들(백남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외워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성경 녹음기> ‘성경 암송’은 한국 교인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은사는 맹인처럼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인 여수 애양원 사람들의 ‘성경 암송’이 유명했다. 일제 말기인 1939년,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던 남장로회 선교사 뉴랜드의 증언이다. “애양원 식구 전체가 모인 가운데 사경회 마지막 행사로 성경 암송 대회를 했습니다.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이 환자를 상대로 성경 중에서 아무 곳이나 지정하면 그들이 그것을 외우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온 환자는 신약 전체를 외우는 남자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 곳에 들어온 지 수 년 되었는데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병도 병이려니와 흉폭하기 짝이 없는 거지 대장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곳에 들어와 성경을 접하고부터 사람이 변해 놀라운 기억력으로 성경을 외우게 되었답니다. 그는 시력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도 없었고 아래턱도 반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행복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택했고 우리는 20장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외우기 시작하자 다른 환자들은 성경을 펴서 그가 한 자라도 빼먹지 않는가 손으로 짚어 가며 확인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노인이 나와 기쁜 표정으로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애양원의 ‘성경 암송’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양원 식구들은 지금도 매주 모여 성경을 암송한다. 애양원에서 ‘성경 암송반’을 이끌고 있는 양재평 장로는 19살 때(1942년) 이 병에 걸려 애양원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30살 때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손가락이 뭉그러져 점자도 읽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성경을 외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시력까지 잃게 되자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하소연했어요. ‘눈까지 가져가시면 절보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요. ‘귀하고 입은 남겨 두었다.’ 그래서 성경을 듣고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는 20년만에 신약 성경을 외워 ‘성경 녹음기’가 되었다. 신약 전체를 순서대로 줄줄 외울 뿐 아니라 “빌립보서 3장 12절”하면 즉시 그 구절을 정확하게 기억해 외운다. 그래서 애양원 방문객들은 성경을 줄줄 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가 된다. 이같이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경 암송’ 문화야말로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다. 하긴 성경 암송대회가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또 있을까?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여름 46권-2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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