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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문서를 불태운 과부 교인

강화읍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과부교인’ 김씨 부인이 있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였지만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란 여종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어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18장을 읽다가 18절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였다. 그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 즉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요?” 그러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 “마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들이기로 했다. 종에서 양녀로 신분이 바뀐(롬8:14) 복섬이는 더욱 정성스럽게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얻은 딸로 더욱 기뻤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의 감동 또한 컸다.    이런 식이었다.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읽었다. 강화의 어떤 교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했던 것처럼 침으로 갠 진흙을 맹인 눈에 바르고(요9:6) 기적이 나티나기를 기다려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 같은 ‘문자적’ 신앙을 미신적인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문자적으로’ 실천함으로 뒤이어 나타날 이적에 기대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개종 1세대’는 성경을 읽되 ‘해석’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성경을 읽는 한국 교회 특유의 소박한 신앙 전통이 수립되었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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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문서를 태운 부자 교인

1900년 무렵 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에 종순일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잘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 전도사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교인이 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19:21)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들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음 섬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 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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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성서주일 포스터

* 2018년 성서주일 포스터입니다. 다운받으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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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케도니아인

한국에 (개신교)복음이 들어오던 1870~80년대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변동기에 겪어야 할 혼돈과 창조의 시대였다.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내적인 개혁과 외적인 개방을 요구하는 신진세력과 기존 가치 체제와 사회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 세력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빚어질 것은 자명했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대원군을 중심한 수구세력과 명성황후를 중심한 진보 세력의 무력 충돌로 발전된 이 사건 와중에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데 공험한 이수정이란 양반이 있었다. 그는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처음 목적은 농학과 법률, 우편, 해운 등 ‘개화된 문명’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882년 9월 일본에 도착한 직후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였던 츠다센을 만났다. 그런데 츠다센은 유럽 유학 중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농학사’를 설립, 운영하면서 일본 농업의 근대화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수정은 츠다센을 방문해 대화하는 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한문 족자에 눈길이 쏠렸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 팔복’ 말씀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동양의 고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츠다센은 이 호기심 많은 이방인에게 족자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읽을수록 그 책에 빨려 들었다. 그가 성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둘이 책을 한 보따리 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오.” 그리하여 ‘조선에 가장 귀한 책-성경’에 대한 외경스런 탐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도쿄로 게츠죠교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다. 이수정은 세례 받은 직후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권유와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그에게 지급되던 장학금을 중단하고 귀국을 종용하였고 가족도 나와서 “목숨이 위험하니 어서 빨리 ‘사교’(邪敎)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어떤 위협과 회유도 그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그는 성경 번역에 몰두하여 1884년, 한문 성경에 우리말 토(吐)를 단 형태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나왔고, 곧이어 마가복음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여 1885년 2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란 쪽복음이 인쇄되었다.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루미스와 매클레이, 녹스 등 자신을 돕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교회에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1883년 12월 13일에 쓴 편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 나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 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그의 편지도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성경을 번역한 것도 ‘민족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나와 선교하는 것이었다. 국내 분위기도 바뀌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 정보는 나라를 개방해서 외국과 교류하여 백성들의 처지를 개선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용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말라고 호소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배치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걱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나라 교사”는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66년 천주교인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만향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 전술이었다. 이수정은 이러한 ‘침략적 종교’가 지닌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근대화를 위한 개방과 개혁은 민족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수정은 우리 민족의 자기 개혁의 원리를 복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가르쳐 줄 선교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바는 지금 당장이라도 몇 명을 이곳 일본에 보내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협의하면서 사업 준비를 하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고 가장 안전하도고 적절한 방법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기를 간절하게 빌고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영문으로 번역된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같은 미국의 선교 잡지에 소개되었고 이 일로 이수정은 서방 기독교계에 ‘한국의 마케도니아인’(Macedonian of Korea)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시아의 서쪽 끝, 드로아에 머물고 있던 바울의 꿈속에 나타나 그로 하여금 유럽 선교의 길을 열게 만들었던 마케도니아인처럼(행 16:8~10), 아시아의 동쪽 끝 한국에서 건너온 이수정의 호소는 복음 선교의 물꼬를 한국 쪽으로 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편지가 서방에 전달된 1년 후 미국 교회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고 1885년 2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 한국 선교 개척단이 한국으로 가기 전 일본으로 들렀을 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한국 언어와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중 선발대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했을 때, 그들 짐 속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 마가복음이 들어 있었다. 어느 지역 개척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간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희귀한 경우였다. 출처 : 1999년 성서한국 가을 45권-3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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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외우는 사람들

성경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유대인들은 유대식으로,헬라인은헬라식으로,유럽인은 유럽식으로,아프리카인은아프리카식으로 대했다.마찬가지로 한국은 한국식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해석하고, 실천했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대할 때 종교적 경외심을 갖고 최상의 예를 표하였다.성경은 함부로 해서는 안될 종교적 경외와 예배 대상이었다.한말 평양에서 활동하던 ‘마들린’이란 한국인 전도부인은 “아이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반드시 선반 위에 모셔 놓아야 하고 성경을 옮길 때는 항상 두 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하면서 성경을 팔았다고 하는데,이는 동양 특유의 ‘경전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성경은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경전’이었다. 이런 한국식 경전 문화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사경회이다.요즘 사경회는 길어야 사흘,그것도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 예배를 끼고 해치우는 것으로 끝나지만,옛날 사경회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이었고 길면 한 달이었다.선교사들은 농번기 때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수백 리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왠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경을 배웁니다.” 평양 선교사 블레어는 한국 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 생활을 접어 두고 오직 성경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합니다.이같이 성경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 전체가 하나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었다.사경회가1907년 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준 사실이다. 초대 교회 사경회는 형식에서도 달랐다. 마치 서당에서 경전을 배우는 것과 같았다. 훈장 앞에서 학동들이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과 중용을 배우듯 교인들은 인도자 앞에서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읽으며 배워 나갔다. 초기 사경회 공부도 성경 외우기로 시작되었다. 암송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다. 선교사들은 이런 한국 교회의 성경 암송 문화에 대해 경이로운 찬사를 보냈다. 일제시대 감리교 협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데밍의 증언이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그의 눈이 되어 복음서 전체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그는 말씀 공부에 전념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사람은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과 절까지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들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에서는 이 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해 성경 배우는 깊은 맛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교인’은 개성의 전설적인 ‘맹인 전도자’ 백사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맹인이 되어 개종 전에는 명복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 백사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 동안 점쳐서 번 재산을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지팡이 하나 잡고 전도 길에 나서 고양∙파주∙장단∙개성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는 아들(백남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외워버린 것이다. ‘성경 암송’은 한국 교인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은사는 맹인처럼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인 여수 애양원 사람들의 ‘성경 암송’이 유명했다. 일제 말기인 1939년,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던 남장로회 선교사 뉴랜드의 증언이다. “애양원 식구 전체가 모인 가운데 사경회 마지막 행사로 성경 암송 대회를 했습니다.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이 환자를 상대로 성경 중에서 아무 곳이나 지정하면 그들이 그것을 외우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온 환자는 신약 전체를 외우는 남자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 곳에 들어온 지 수 년 되었는데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병도 병이려니와 흉폭하기 짝이 없는 거지 대장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곳에 들어와 성경을 접하고부터 사람이 변해 놀라운 기억력으로 성경을 외우게 되었답니다. 그는 시력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도 없었고 아래턱도 반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행복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택했고 우리는 20장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외우기 시작하자 다른 환자들은 성경을 펴서 그가 한 자라도 빼먹지 않는가 손으로 짚어 가며 확인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노인이 나와 기쁜 표정으로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애양원의 ‘성경 암송’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양원 식구들은 지금도 매주 모여 성경을 암송한다. 애양원에서 ‘성경 암송반’을 이끌고 있는 양재평 장로는 19살 때(1942년) 이 병에 걸려 애양원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30살 때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손가락이 뭉그러져 점자도 읽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성경을 외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시력까지 잃게 되자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하소연했어요. ‘눈까지 가져가시면 절보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요. ‘귀하고 입은 남겨 두었다.’ 그래서 성경을 듣고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는 20년만에 신약 성경을 외워 ‘성경 녹음기’가 되었다. 신약 전체를 순서대로 줄줄 외울 뿐 아니라 “빌립보서 3장 12절”하면 즉시 그 구절을 정확하게 기억해 외운다. 그래서 애양원 방문객들은 성경을 줄줄 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가 된다. 이같이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경 암송’ 문화야말로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다. 하긴 성경 암송대회가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또 있을까?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여름 46권-2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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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성서주일 포스터

2017년 성서주일 포스터입니다. 다운받으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설교자료

성경과 한국 사회의 변화(試論) - 이만열

성경의 한글 번역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도록 하여 성경의 교훈과 사상을 체화하도록 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자기시대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시대와 사회에 대해 응답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 구한말 처음으로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기다리고 중요시했는가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얼마 안되었을 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crying need)”를 했다. 1898년경 성경 번역이 지지부진하자 평양에 사는 어떤 교우는 예수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이라고 전제한 후, 그 성경을 지방에 내려 보내주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린다”고 했고, 어느 서점 주인은 “신약전서를 전부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린다”고도 했다. 이렇게 성경 번역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국 초대기독교인들의 영적 갈급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당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의 경험이긴 하지만 해방 후 시골 교회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위인들의 행적을 듣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해방 후에 그랬다면 일제 강점하에서 구약에 나타난 위인들의 민족적인 사기를 읽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일제의 노예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블레셋을 상대로 한 삼손과,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면서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된 다니엘과 에스겔을 보면서 그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적 범죄가 갖는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엄숙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포로귀환의 때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적 시련 앞에서 응답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먼저 한말에는 국권수호 운동에 나섰던 뜻있는 젊은 야소교인들을 한국사에서 만난다. 이토오(伊藤博文)를 제거하려다가 자결의 길을 택했던 정재홍(鄭在洪)은 한말 교육자요 기독신자였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한국 외교부의 고문 자격을 가지고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본국에 가서 일제를 위한 공작을 꾀하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한국인 기독청년 장인환(張仁煥)에게 피살되었다. 천주교인 안중근(安重根)과 이토오를 포살하는 데에 동조한 우덕순(禹德淳)은 신앙적인 애국시를 남겼다. ‘야소교 동지’들과 함께 이완용ㆍ이용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명동 성당 앞에서 매국 총리대신 이완용 제거에 앞장선 이재명(李在明) 역시 기독청년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자기 시대와 민족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민족에 대한 응답적 삶은 더 광범하게 나타난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지도자들이 거사 참여에 앞서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서는 그들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신 민족을 위해서 순명(殉命)을 각오했던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관여한 이들이나 무장투쟁 혹은 의열운동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 이들 또한 성경과 기독교적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민족에 대해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자,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인만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신사참배에 저항, 많은 신자들이 투옥되고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를 냈다. 이러한 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의 범주에서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에 근거한, 선교사들의 표현을 빌면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노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뒷날 다시 한국을 찾아 몇 권의 저서를 남긴 매켄지(F. A. McKenzie)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투쟁의 원천이 성경에 있음을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크, 햄프던 및 조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어느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신문학 교수였던 최준이 “한글로서의 한국말 성경이 나타남으로써 한국의 국민대중들은 비로소 자아(自我)를 다시 찾게 되었고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립상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그가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계 신문이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을 폈고 자주 독립사상을 앙양했다는 지적과 함께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국 민족운동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저항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국권(독립)수호, 국권(독립)회복에 있었지만, 또 한 흐름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국 민족운동의 가장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만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기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의 도정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민주화의 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는 인민평등의 실현이다. 한국이 인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세봉건적인 혈통신분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유교적 봉건사회에서는 혈통에 의해 크게는 양천(良賤)으로 이분화했는가 하면 좁게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분법적 신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숙명적으로 주어진 혈통은 곧 신분제라는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이런 신분구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교육, 예의, 사상(安分) 및 법제적 측면에서 자신의 신분질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회적 장치를 공고히 했다. 혈통신분제는 숙명적이어서 개인적인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수용은 이런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평등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본래 혈통에 의해 차별화된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과 천민을 구분, 차별화하는 양천 제도가 있을 수 없다. 이같은 사상을 제시한 것이 기독교의 성경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의하면 혈통신분제는 인간사회, 특히 지배층이 독점적 지배를 위해 ‘숙명적인 질곡’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 사상에서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반인간적이고 반천륜적인 제도다. 노비제도와 양천(良賤)제도를 정비한 법제적 검토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이뤄졌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인민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과한 후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이런 혈통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실질적인 인민평등을 촉진한 것은 예수교요 그 기반인 성경이었다. 따라서 한말 성경에 기반한 예수교회에서는 혈통신분제를 극복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 박서양(朴瑞陽) 부자가 양반 신분 못지 않게 활동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은 혈통신분제를 용납하지 않는 성경과 교회 때문이었다. 혈통신분제를 극복해 가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한국 사회는 서서히 군주ㆍ양반 중심의 전제군주적 구왕조(舊王朝) 회복을 의미하는 복벽(復辟) 사상을 극복하게 되었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제도’인 민주공화정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3.1운동이었다.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가 참여한 3.1운동은 그 독립선언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천명했다.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의 염원이 제도적으로 실현된 것이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1919년 4월의 대한민국의 약법(헌법)은 이를 보증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기독교의 이런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조밀하게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만민평등의 성경적 세계관이 한국의 민주화에 이렇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 이만열,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서울: 대한성서공회, 2011), 7~54페이지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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