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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료

생명을 얻게 하는 책, 성경

성경: 요한복음 20장 30–31절설교: 최규환 목사(서울광염교회)   지난 7월에 이곳에서 이란으로 보낼 페르시아어 성경 1,770권에 대한 기증감사예배를 드렸는데, 2달 만에 두 번째 성경기증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서울광염교회가 지난 6월에 성경반포사역을 시작한 지 어느덧 3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10개국에 총 7만 권이 넘는 성경을 제작 반포하기로 하고 그 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아프리카의 세 나라인 마다가스카르, 탄자니아, 말라위에 보낼 성경이 제작 완료되어 이를 기념하며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뜻 깊은 자리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각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각자의 언어로 성경을 제작하여 반포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는 말라가시어 성경을, 탄자니아에는 스와힐리어 성경을, 그리고 말라위에는 치체와어 성경을 각각 제작하여 반포하게 됩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대한성서공회의 권의현 사장님과 호재민 총무님을 비롯한 직원분들과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우리교회와 대한성서공회가 성경반포사역의 파트너가 되어 성경이 필요하지만 자체 제작이 어려운 나라에 성경을 제작하여 반포하는 이 사역은 참으로 귀하고도 값진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생명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게 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특정한 문화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문화와 언어와 민족을 초월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이 세상에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책마다 우리의 삶에 이런저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 어떤 책도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2천여 년이 흘렀지만, 이 시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 역사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반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 영생이 있습니다.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성경 66권 중 한 권인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자신이 왜 이 책을 기록했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사도 요한은 왜 자신이 이 책을 기록했다고 이야기합니까? 이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야, 우리는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믿게 하려고 이 책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시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 즉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책을 기록한 것입니다.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외치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소리에 이끌려 무작정 예수님의 뒤를 쫓아간 것이 예수님과 만남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다른 제자들보다도 예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제자였습니다. 성경은 사도 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목도했습니다. 그저 대중들 앞에 드러난 예수님의 말과 행동만을 보고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적인 장소와 시간 속에 예수님과 깊은 대화와 교제를 가지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갔습니다.요한복음은 그렇게 해서 사도 요한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예수님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사도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참된 증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요한복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66권 전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고 기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게 됩니다.그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우리말로 쓰인 성경을 읽으며 그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구원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경이 제 손에 쥐어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너무나 손쉽게 우리말로 된 성경을 구해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주신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고 국내성경반포를 위해 오랜 세월 동안 헌신하고 수고하셨던 많은 선교사님들과 성경학자들, 그리고 대한성서공회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아직 세계 곳곳에는 성경을 구해 읽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경을 제작하여 반포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성경을 기증하는 아프리카의 세 나라인 마다가스카르, 탄자니아, 말라위는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나라들입니다. 어쩌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장 먹을 양식이 더 시급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말씀처럼, 그들에게는 육체의 생명을 지탱케 해 주는 양식 이상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 영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성경'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우리교회에서 성경을 반포할 국가가 한 나라 한 나라 선정될 때마다 교회 홈페이지에 이와 관련된 글을 하나씩 올리고 있습니다. 그 글을 쓰면서 이 가난한 나라들의 성도들이 성경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기뻐하고 있는 사진들을 접했는데, 참으로 감동이 되었습니다. 옷도 허름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는 듯한 모습이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기쁨과 만족이 성경책을 품에 안고 있는 그 성도의 얼굴에서 흘러나왔습니다.이번에 우리가 제작 반포하는 성경책이 흘러가는 곳곳마다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성경책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믿어 생명을 얻으며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가졌던 그 심정을 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경반포사역에 힘쓰는 서울광염교회와 대한성서공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1년 9월 9일,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마다가스카르 말라가시어, 탄자니아 스와힐리어, 말라위 치체와어 성경 기증 예식에서 전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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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성경: 로마서 10장 13–15절설교: 최규환 목사(서울광염교회)    오늘 이 시간 성경기증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이 자리는 우리 서울광염교회와 대한성서공회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서울광염교회와 대한성서공회가 성경반포사역의 파트너로서 얻게 된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어 성경을 제작해 성경을 목말라하고 있는 그 땅, 이란으로 보내는 뜻 깊은 자리입니다.   우리 서울광염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따라 성경반포라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해외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도와 성경을 반포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반포사역을 우리교회에 주신 일로 여기고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에게 주시며 이 사역의 귀한 파트너로 대한성서공회를 허락하셨습니다. 대한성서공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역을 해 오고 있는 귀한 기관입니다. 성경이 필요하지만, 자체적으로 성경을 제작할 수 없는 나라에 성경을 제작 반포하는 사역을 대한성서공회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성경반포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가치 있는 사역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들을 어떤 사람들이라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른 채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얻기 위해 열심히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지만 결국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입니다.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그 영원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의 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과 길을 찾지만, 그 어디에도 참된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은, 그리고 바울은 구원받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13절에서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언합니다.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주인이 되실 뿐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상관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값없는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입니다.그런데 이 복음은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지식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안에 숨겨진 구원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나타내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입니까? 전도를 통해서입니다.오늘 본문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기쁜 소식, 복음을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전파하기로 정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친히 인간으로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스라엘 땅 전역을 걸으시며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전도의 사역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증거했습니다.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그 예수님을 입으로뿐만 아니라 글로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성경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오실 메시야를 증언하는 구약과 오신 메시야를 증언하는 신약을 통해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만나게 됩니다.이 성경이 가는 곳곳마다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한 달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신 호재민 목사님이 주일 저녁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전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에 성경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귀츨라프와 토마스 선교사들과 같은 분들을 통해 이 땅에 성경이 전해졌습니다. 또한 존 로스와 피터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 성경을 제작하여 반포하는 일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또한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의 성서공회가 이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우리말로 된 성경이 반포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이 어둠의 땅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소명을 품고 이 땅에 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고 제작하여 반포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좋은 소식, 복된 소식,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귀한 열매를 지금 우리가 먹고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축복하십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축복하십니다. 이들의 헌신과 땀과 열정은 하나님 앞에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 귀하고 복된 사역을 한국교회와 대한성서공회가 이어받아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이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성경을 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 달 전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조현삼 목사님과 함께 대한성서공회의 파주 제본공장을 방문해 받은 감동이 큽니다. 우리 한국 땅에서 세계 다양한 언어로 쓰인 성경이 제작되어 세계 곳곳에 반포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렵고 출판 인프라가 열악해 성경을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없는 나라들에게 성경을 무료로 보급하는 귀한 사역을 한국교회와 함께 대한성서공회가 그동안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이제 우리 서울광염교회도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대한성서공회를 파트너 삼아 성경반포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기증식을 하는 서아시아 이란으로 보내는 페르시아어성경 1,770부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말라가시어성경 7,000부, 남미 볼리비아에 스페인어성경 6,000부, 아프라카 탄자니아에 스와힐리어성경 9,600부, 그리고 남아프리카 말라위에 치체와어성경 6,462부 등 성경반포사역을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동안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5개국에 3만 권이 넘는 성경 제작 반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서울광염교회 성도님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이 말씀으로 우리 서울광염교회와 대한성서공회, 그리고 한국교회를 축복하길 원합니다.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아름답다'고 칭찬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인 줄 믿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섬기시는 한분 한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동안 성서공회에서 수고한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상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일원으로 우리 서울광염교회가 대한성서공회와 함께해 나갈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1년 7월 6일,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이란 페르시아어 성경 기증 예식에서 전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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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생애와 성경

성경 :  히브리서 11장  23-26절설교 : 조병우 목사(김천제일교회)    모세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면서 출생도 죽음도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모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광과 고난을 다 겪은 인물이다. 왕궁과 광야에서 극단적 대조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환경에서 살았고,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았던 인물이고 가장 귀한 지위와 가장 천한 지위를 다 가졌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계시를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모세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믿음과 충성의 모델과 같은 사람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스러움은 하나님이 한 인생의 삶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다. 모세는 이런 면에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산 사람이다.   1. 모세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었다.한 어머니는 바로 공주이고 다른 한 어머니는 요게벳이다. 바로 공주는 세상적으로 볼 때 가장 완벽한 어머니이다. 가장 좋은 것을 자녀에게 다 줄 수 있는 어머니고, 요게벳은 자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어머니이다.   두 어머니는 다 귀한 분들이다. 그런데 말씀에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 공주의 아들로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다. 왜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을 포기했던 것일까, 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을 다 줄 수 있는 어머니고 다른 한 어머니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어머니인데 왜 세상 것을 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아들로 살았던 것일까?   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을 다 줄 수 있지만 믿음은 줄 수 없는 어머니이고 다른 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수 있는 믿음을 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 인생에게 진정한 어머니는 세상의 것을 많이 줄 수 있었던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주고 말씀을 들려주어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어머니가 있다. 자식에게 믿음을 물려줄 수 있는 어머니와, 세상의 것을 물려주면서도 믿음은 물려주지 못하는 어머니이다. 성경을 보면 한나는 자식에게 세상 것을 물려주는 어머니가 아니다. 성전에서 자라게 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어머니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공주 같은 어머니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자식에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는 부모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부모에게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어릴 때 말씀을 심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마귀는 미래 세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학살한다. 애굽 왕 바로는 어린 아기를 죽였고, 헤롯도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유아들을 학살했다. 이유는 미래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일벌과 여왕벌은 똑같이 암벌이다. 그러나 여왕벌은 왕대에 넣어서 로열젤리를 먹이면 여왕벌이 되고 꿀만 먹이면 일벌이 된다. 같은 벌인데 일벌은 28일-35일 생존하는데, 여왕벌은 3년-5년의 수명을 가진다. 200만 마리의 알을 낳아서 다음 세대를 계승시키는 것이다. 다른 벌이 아니다. 그 차이는 태어났을 때에 무엇을 먹였느냐 하는 데 있다.   어릴 때에 말씀의 로열젤리를 먹이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서 역사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고, 세상의 꿀을 먹이면 평생을 일에 속한 생명으로 사는 일벌로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그 부모의 하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내 자녀가 그 부모가 섬기던 하나님을 부를 때에 그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응답이 되어야 하고 삶의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   2. 모세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다.말씀에는 모세 앞에 두 가지 삶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나는 애굽의 모든 영광과 보화를 누리는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모세는 애굽의 보화보다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귀한 삶으로 생각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봄’이라고 했다. 삶에는 분명히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세상 영광을 얻기 위한 삶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보는 삶이 있다. 모세는 세상의 영광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주시는 삶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삶은 사명 때문에 영광이 있는 것이지 소유 때문에 영광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에 사명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기가 갈 길을 찾은 사람이 된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사명의 길로 묘사를 했고 그 삶을 다 달렸을 때 면류관의 영광이 있음을 말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성도는 아무리 애굽의 보화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하더라도 사명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는 성막과 장막의 동행이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장막은 그들이 사는 공간이다. 언제나 성막과 장막은 함께 움직이고 함께 머물렀다. 그 동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인생의 동행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고, 구경꾼이 있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사명으로 사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이고, 곁에서 돕는 사람이 직분이다. 구경꾼은 알지만 영광이 없다. 뒤에서 방해하는 사람은 발꿈치를 무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계시록의 교회를 보면 방해꾼이 없는 교회는 없다.   3. 모세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120년 인생의 소원이다. 그런데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마치 결승점 앞에서 넘어진 것 같다. 한이 많은 죽음 같다. 모세는 자기가 소원하던 것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   그런데 모세의 죽음 이후의 모습이 나타나는 장면이 성경에 있는데,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 곁에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엘리야와 그리고 광야에서 죽은 모세와 함께 천국 영광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를 세우셨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그 대표가 모세와 엘리야인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인생의 진정한 보상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이 약속하시는 진정한 보상이라는 의미이다. 모세는 자기의 사명을 물려주고 죽었다. 즉 모세의 죽음은 사명을 물려주는 계승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모든 영광을 다 누리고 죽는 죽음이 있다. 이런 죽음을 볼 때 다 복이 있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볼 때 부자는 인간적으로는 복된 죽음을 죽은 사람이지만 음부에서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하며 물 한 방울을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모세의 죽음은 사명을 물려주고 죽은 죽음이다. 바울의 삶도 그렇다.주님의 십자가도 그렇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사명을 물려주고 간 사람이다.삼성병원에서 만든 ‘청진기’라는 영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의 몸에는 60조 개에서 100조 개의 세포가 있다고 한다.이 모든 세포는 다 각각 다른 수명이 있는데 90% 이상이 매년 사라지고 새로 재생된다고 한다. 5년의 주기로 보면 거의 모든 세포가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세포가 그 자리를 채운다.   백혈구 14일, 적혈구 3개월, 피부 1개월, 장기는 4개월, 새로운 세포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세포는 건강한 몸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야 하고 옛 세포는 끝없이 죽어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현상을 ‘히포토시스’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몸에 남아서 암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나 교회나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지 않으면 그것이 암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명은 물려주어야 건강한 교회가 유지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사명을 물려주셨다.   모세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사명을 물려주었다는 점에서이다. 인생에게 죽음이 끝이 아닌 이유는 사명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말씀의 돌비(십계명)를 물려주고 떠났던 사람이었다.    출처 : 대한성서공회 제136회 정기이사회 조병우(김천제일교회 담임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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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성서공회 이사장과 총무를 만나서

“성경은 인생을 바꿉니다”  <본 공회를 위해 기도하는 에콰도르성서공회 예실 카바얄 이사장>   처음 대한성서공회를 방문하려고 했을 때 한국이 이렇게 먼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무려 25시간만에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성서공회는 3년 전에 에콰도르 성서공회가 다시 성서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성경을 기증해준 고마운 성서공회입니다. 이렇게 감사하고도 좋은 사역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에과도르성서공회가 조직을 정비하고 다시 운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에과도르성서공회의 직원들은 이러한 축복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대한성서공회의 도움으로 끼추아어로 번역된 성경과 에콰도르어로 번역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파비안 코르테즈 목사님은 회심한 사람들에게 성서를 전해주고, 각 가정에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전세계로 성서를 보급하는 대한성서공회의 사역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는 사역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중요합니다. 성경은 인생을 바꿉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에과도르에 있는 모든 원주민들을 대신해 대한성서공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대한성서공회가 한 사역은 에과도르성서공회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한성서공회가 다른 나리에 성서를 보내는 일은 정말 귀한 사역입니다. 에콰도르성서공회를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에과도르성서공회는 성서공회를 성장시키고 다질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발전하는 성서공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양한 언어로 높은 산악 지역에서 해안 지역까지, 계곡을 지나 정글 지역으로, 큰 도시들과 갈라파오섬까지 모든 에콰도르 지역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와 에과도르성서공회의 헌신된 섬김으로 에과도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새롭게 나아갈 시기입니다. 그동안 대한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은 것을 넘어 이제는 다른 나라들을 도울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쿠바'에 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쿠바 사람들에게 성서를 보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에콰도르성서공회는 성경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경과 교류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을 갖고 있어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현재 저희 미션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 사역을 위해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에과도르 인구의 14%가 개신교입니다.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대한성서공회가 뿌린 씨앗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과의 협력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역을 점차로 확대시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하고 싶습니다.  에콰도르 인구 1500만 명 중 800만 명의 사람들이 성경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서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성서가 생수와 같이 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노력과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성서공회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2013년 성서한국 여름 59권2호, 10-11쪽, 에콰도르성서공회 예실 카바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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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에서 온 편지

-81보병연대 평화교회로부터-     충성! 맹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3월 초 대한성서공회에서 군부대에 성서를 기증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흥분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사역했던 부대는 경기도 연천 최전방 GOP연대였습니다. 사역하는 교회는 4교회, 각 교회마다 100여 명의 장병들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각종 작전과 근무, 훈련과 작업에 지치고 힘든 용사들이 주일이면 교회로 와서 예배를 통해 힘을 얻곤 합니다. <허원희 군종목사와 8보병연대 평화교회 장병들>   2010년 여름, 초임 군종장교로 임관한 저는 열악한 교회 상황에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긴 장의자마다 성경과 찬송가가 2권씩 놓여 있었는데 예전 <개역한글판> 성경과 구 찬송가, 심지어는 세로쓰기 성경까지 비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장병들이 성경을 찾아서 읽는 것은 소수의 몇몇 인원만 가능한 일이었고 예배시간에 그저 스크린에 의지해서 설교 본문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랬기에 대한성서공회에서 성경을 기증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음으로 400권을 신청하였습니다. 성경이 도착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각 교회마다 100권씩, 장의자 자리 자리마다 한 명당 한 권씩 볼 수 있도록 비치를 하였습니다. 휑해 보였던 교회가 새 성경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전방 연대급 교회에는 성경을 읽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쉽게 도전을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새 성경책이 가득 차자 몇몇 집사님들이 오셔서 저에게 먼저 성경통독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증 받은 2주 후부터 군인가족들과 군종병들과 함께 두 달 간의 일정으로 성경통독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교회에 모여서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다과를 나누며 친교를 나누는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며칠하다가 지쳐서 포기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들 너무 행복해하고 더욱 성경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GOP장병들에게 시원한 음료, 과일, 부침개 등을 준비해서 나누는 위문 행사도 계획해서 하였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들 손에 한 권씩 쥐어지고, 함께 읽어 나가니 역동적인 교회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 이후 2명의 집사가 새로 임명되고 하나님 앞에 군선교의 일꾼이 되기로 작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으로 인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기증 받은 성경은 예배시간에도 근무로 인해 교회에 못 나오는 GOP, GP, 격오지 용사들에게 아주 귀하게 전달되어 믿음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대한성서공회의 위대한 사역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새로운 부대로 전출 오게 되었지만 다시 한 번 지면을 빌어 대한성서공회의 섬김과 노력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기도로 동역하고자 합니다. 출처 : 2012년 성서한국 가을 58권 3호, 14쪽, 허원희 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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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다에서 순교한 성서 번역자 아펜젤러 목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는 1885년 4월 5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목사로 선교사로 교사로 한국 근대사의 개척자로 여러 방면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서는 ‘성서 번역자’로서 아펜젤러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1885년 10월 13일자 아펜젤러의 편지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언더우드와 공동으로 한국어로 어떻게 신약성경을 번역할지 논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펜젤러는 입국 후 바로 언더우드와 함께 이수정역 마가복음을 개정하기 시작했고, 1887년 여름 이수정역의 개정판인 <마가의젼ᄒᆞᆫ복음셔언ᄒᆡ>를 출간하였다. 1887년 2월 7일 언더우드의 집에서 성경 번역을 위한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헤론 등이 참석하였다.  아펜젤러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가 처음부터 한국 문자를 습득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1년이 못 되어 한국어 문자를 자신의 사상을 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 언어처럼 익숙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아펜젤러는 1886년 4월 2일의 편지에서, 자신이 아직 다른 사람의 번역을 판단할 수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1887년 12월 25일 언더우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설교를 읽었다. 본인의 생각을 어학선생 조씨에게 들려 주면 조씨가 적당한 한국말로 표현해 준 원고였다. 1888년 3월의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한국어를 읽는 것과 올바른 문장 형태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1890년 1월 2일 아펜젤러의 연례보고서에는,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번역했던 누가복음의 개정판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으며, 이 작업은 거의 인쇄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아펜젤러는 1890년 3월 <누가복음젼>, <보라달로마인셔> 3,000부씩을 삼문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보라달로마인셔>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튼이 로스의 로마서를 수정한 것이다. (‘보라’는 ‘바울’의 중국식 번역이다.) 1891년 6월 상임성서위원회가 로스역 개정을 포기하고, 아펜젤러와 게일에게 새 번역을 하도록 하였다. 아펜젤러는 마태복음 번역을 시작하였고, 1892년 1월 20일 아펜젤러 번역 <마태복음젼>이 임시역본으로 30부 발행되었다. 이 해에 <마태복음젼> 1,500부(1,000부는 “하 님” 역, 500부는 “텬쥬”역)가 발간되었다. 한국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번역된 첫 성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은 1900년의 구역으로부터 지금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까지 이어지는 성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893년 5월 16일 스크랜튼의 집에서 상임성서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에서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스크랜튼 트롤로프 5명을 번역자로 임명하였다. 1895년 아펜젤러의 <마태복음>이 수정되어 출판되었다. 존스는 이 번역을 “원문에 충실하고 문체가 간단명료하며 표현이 부드럽다”고 말하였다. 1900년에는 신약전서 전체의 번역이 완료되어 출간되었다.  아펜젤러가 번역을 한 본문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이다. 1900년 5월 5일 성서공회 주일, 아펜젤러는 정동교회에서 완성된 신약전서를 손에 들고 감격적으로 설교하였다. “우리는 10년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신약전서의 한국어판을 완성하였습니다. … 이후부터 나는 성경봉독을 할 때는 이 책만 사용할 것이라고 회중 앞에 광고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책은 우리 주재 전도사와, 한문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아름다운 모국어의 장점에 눈 멀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00년 9월 9일 주일은 신약성서의 번역 완성을 기념하여 정동제일교회에서 공개 감사예배를 드렸다.  1902년 3월과 4월 아펜젤러와 게일은 아펜젤러의 서재에 모여서 고린도전서 7장까지 개정하고, 성경의 고유명사 3,000개를 정리, 작성하였다. 레널즈가 목포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6월 한 달은 3인이 목포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하였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성서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목포로 가던 도중에 군산 앞바다의 어청도 근해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순직하였다. 2012년 6월 1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사랑의 사도 헨리 아펜젤러 순교 110주년 추모 제1회 학술대회” 가 열렸다. 아펜젤러 목사의 후손인 캐린 울프 양은 인사말에서 “아펜젤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한 바 있다. 한글 성서 번역과 보급이야말로 ‘아펜젤러의 계획’이었고, 그를 통하여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제는 한국어 사용자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아펜젤러의 꿈이었고 계획이었다.   출처 : 2012년 성서한국 가을 58권 3호, 6-7쪽, 전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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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1903년)

이 글은 <월남 이상재 선생 옥사 기록 공소산음>(곽신환 외 저,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2년)에서 발췌하였다. 이 책 안에는 1902년 개역당 사건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등의 개혁파 인사들이 성서공회로 보낸 감사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들은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구금되어 복역 중 1903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04년 3월에 석방되어 옥중 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입교하였다. 이 때 이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유성준은 후에 <신약전서 국한문>(1906년)의 번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03년 1월에는 감옥 안에 도서실이 설치되고, 벙커(D. A. Bunker) 게일(J. S. Gale) 등과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300종 520여 권의 서적을 제공하였다.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은 성서공회의 도움으로 많은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특히 신구약 성경을 읽고 감옥 안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기독교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두정 홍재기(두정 홍재기 : 홍재기는 중추원의원(中樞院議員)이었고, 출옥 후 대한구락부(大韓俱樂部) 총무 등의 일을 맡았다. 대한구락부는 친목과 문화운동을 목적으로 1905년 11월에 결성되었다. 회원은 200여 명이었며,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연설회 등을 개최하였다.)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진실로 하늘 아버지가 빚어내고 녹이고 감응하고 변화시킴이 아니면 어떻게 생육하겠는가? 순식간에 물욕에 가리어서 그 애초의 참된 근원을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게 되니 어찌 스스로 안타깝지 않은가.임인(1902)년 봄 갑자기 죄를 뒤집어쓰고 여러 달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서 보냈는데, 무슨 행운인가! 감옥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옥에 학교를 세워 뭇 죄수들을 교육하였다. 성서공회에서 이를 듣고 즐거워하여 신·구약 성경과 여러 사상가들의 교습책을 많이 가져와 배울 것을 권면하여 읽어볼 수 있게 되었는데, 여러 달 침잠하여 공부하니 뒤덮은 띠풀이 홀연히 걷히듯 갑자기 생각이 일어나 본원을 탐구하여 끝없는 경지를 회복하니, 하루라도 이 책이 없으면 안 되고 하루라도 이 가르침이 없으면 안 되었다.모든 말씀이 측은히 여기고 애달파하는 마음과 따뜻한 사랑이니 하늘이 비추는 곳에 빛이 없는 곳이 없다. 항시 경외의 마음을 지니고 선을 행하고 악을 범하지 않으니 대주재이신 상제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거울 같이, 형체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이 감찰하신다. 하늘에는 현존하는 도가 있어 선을 행하면 복이 되고 악을 범하면 재앙을 받으니, 나의 동포들이여! 발분하여 선을 행하고, 손을 잡고 이 진리를 함께 즐길 것을 진실로 바란다.출처 : 2012년 성서한국 여름 58권 2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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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초석을 놓으신 향정 할머니

존 로스 목사가 1882년에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국내에 들어와서 보급되면서 최초로 생긴 교회가 소래교회이다. 그 교회에 출석하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신 김향정 할머니의 삶을 그 손녀이신 장현심 할머니의 글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다.나의 친할머니, 김향정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들여오신 분이시다. 옛이야기가 구전되듯이 할머니의 얘기는 지금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된다. 186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18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실 때 이름이 없이 그냥 김 씨였다. 그러다가 향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던 동네에서 오셨다하여 향정(香井)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할머니는 결혼한 지 13년만인 1894년에야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다. 가산은 많았지만 자손이 귀했던 집안에 우리 아버지가 태어남으로 다시 활기를 찾은 셈이다. 증조부는 종이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사셨다. 전통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숭배하고 선비로서의 체모를 지킨 분이시다. 고을에 원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면 의례히 증조부를 찾아와 예를 표하였다.할머니는 종부로서 사방 삼십 리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는 넓은 농토와 대소가를 거느리고, 기제사와 사대봉사를 받드느라 하루 종일 바빴었다. 평상시에도 제사가 있을 때에는 동네의 일가아낙네들이 모여 제사를 도왔다. 그 절정은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초상을 치르는데, 일주일 내내 온 동네가 밥을 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밥을 먹으며 일을 하였다고 한다. 없는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느라 집안이 망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독자이신데 할머님 당신이 돌아가시면 똑같은 일을 아들 며느리가 고스란히 물려받아 평생을 조상치다꺼리만 하다가 말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셨다고 한다.야소교를 믿으면 조상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것을 믿기만 하면 적어도 당신의 제사는 안 지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솔내교회를 당신발로 찾아가셨다. 초가로 지은 집이었는데 당시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던 시절이어서 내외를 했다. 야소교에선 금하는 것이 여럿 있었다. 우선 담배를 끊어야 했다. 술과 투전도 금하고, 축첩을 금했다. 금지사항이 모두 할머니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다.교회에 들어가는 초가 담벼락 초입에는 장죽들을 죽 세워놓았다. 담배를 미처 끊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 세워둔 것이었다. 예배당은 두 칸으로 지어졌는데 한 칸은 여자, 한 칸은 남자가 앉는 장소였다. 설교는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했다. 가운데는 벽이 있고 그 벽 위쪽엔 네모진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곳을 통하여 여자들은 설교를 들었다.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교회를 다녔다. 초대교회에서 하던 대로 성경을 글자그대로 실천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그대로 사느라 주일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외출도 하지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십 리 떨어진 교회에 주일예배를 보기 위하여 할머니는 토요일에 달구지를 타고 집을 나섰다가 주일을 보내시고는 월요일에야 집으로 오셨다.할머니께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을 때 아버지는 심적 갈등이 많으셨다. 불교와 기독교 중에서 어느 것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하여서는 교리를 충분히 공부해보고 또 실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먼저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시고, 다음에는 평양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셨다. 그런 다음 선택한 것이 기독교였다.할머니께서 장문(張門)에 기독교를 들여놓은 사건은 할아버지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받들고 양반의 권위를 지키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믿는 기독교는 그것들과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조상에게 제사도 안 지낸다는 것이었다.할아버지께서는 기둥 같은 아들까지 교리를 공부한다고 하며 그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는 집안이 기울었다고 생각하셨고, 마침내는 불꾸러미를 만들어 지붕으로 던졌다.“이제 집안이 망했구나! 다 틀렸구나!”양반 체면을 집어 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불길이 타올라 기왓장이 이리저리 뻥뻥 튀는 가운데 통곡소리가 들리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불을 끄러 나왔다. 멍석에 물을 뿌려 지붕으로 던지고 또 던져 겨우 불길을 잡았다. 할아버지의 그러한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교회 가는 행보는 조금도 달라지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나고 좋은 것은 교회로 가져가고, 맛있는 것은 교회 사람들을 먼저 먹였다.할머니는 솔내(松川)교회를 나가는 게 멀고 힘이 들어 아버지에게 청을 하셨다.“나를 위하여 ‘장주애’에 교회를 세워다오.”아버지는 동네 초입에 있는 삼거리주막을 사서 교회를 지었다. 그것이 장주애교회이다. 그 교회로 해서 그 동네 사람 모두가 교인이 되었다. 다만 할아버지 한분만이 예외였다. 이유는 첩 할머니 때문이었다. 교회법에서 축첩을 금하는데 첩이 있으니 양심상 교회에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을 보면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주막을 사서 교회를 세웠던 것은 동네에 주막이 없어야 술을 멀리하고 건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교회가 생기므로 동네 분위기도 좋아지고 농한기에 장정들이 술집대신 교회의 사경회에 나와 성경공부를 하였다.출처 : 2012년 성서한국 여름 58권 2호, 10-11쪽, 장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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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5

5.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출판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성경은 신앙생활의 토대이고 근거이고 뿌리입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난지에서 완성이 되고 출판이 된 <성경전서개역한글판>은 이후 1998년에 <개역개정판>으로 다시 개정되어 나올 때까지, 한국 교회의 유일한 예배용 성경이 되었습니다. 왜 이 성경의 이름을 <개역한글판>이라고 했는지도 역사 속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대한성서공회사 3>을 통해서 해방 이후의 성서 사업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공회는 1952년 3월 숙원사업인 개역 한글판 성경전서 출판 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추진했다. 교정을 맡은 임영빈 총무는 참고하거나 비교할 다른 역본도 없고 의논할 성서학자도 없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며 교정지를 마무리했다. 그는 영국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정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교정지를 읽을 때 용서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용서는 모든 인생사에서 선한 덕이지만 교정에서만은 예외이다. 교정지를 읽을 때에는 비판적이고 속이 좁고 잘못을 찾아내고 완고하게 엄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결과 최선의 책이 생산된다. 나에게는 세 명의 교정자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너그럽거나 자유롭거나 우호적이거나 포용적이 되지 말고, 오류와 잘못을 찾아내는 전문가가 되라고 늘 격려한다. 만일 그들이 읽은 교정지에서 내가 오류를 찾아낼 때는 나는 그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찾아내는 데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에 교정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목회자로서 내 직원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찾는 전문가가 되라고 격려하는 내가 스스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본문이나 지리적 문제 때문에 당황스럽다. 나는 비교할 다른 본문도 없으며, 성서학자를 방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당시 실무에 종사했던 김태룡 간사에 의하면 출판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조판 체제는 구식대로 내리 글씨 2단으로 46배판 형으로 결정했다. 교정원으로 오인명(吳仁明; 새문안교회 장로)과 강석모(姜錫模; 연합신문 교정부장)가 임시직으로 수고했다. 한여름 더위에 작업이 강행되었는데, 임 총무는 초교(初校)에서부터 교료(校了)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재독하면서 직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직접 교정을 보았다. 활자를 넉넉히 주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교지에는 복자(伏字: 해당 글자의 활자가 없을 때 다른 글자의 활자를 뒤집어서 ☒☒☒와 같이 임시로 조판한 것)가 많았고, 재교지와 3교지에도 글자가 채워지지 않았다. 고유명사 분별을 위해 인명에는 외줄로 표시했고, 지명에는 쌍줄 옆줄 표시를 했으며, 절(節) 표시에는 작은 숫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교정하는 데는 8교, 9교까지 나갔다. 최종 교정은 외부의 교열(校閱)을 받았는데, 김태룡의 은사 안신영(安信永) 선생이 수고했다. 66권의 책명 글자는 활자가 아니고 붓글씨 연판(鉛版)인데 이 글씨는 최수섭(崔銖燮) 씨가 썼다. 인쇄용지와 제책 재료는 미국성서공회가 지원했다. 책형은 국배판, 강대용(講臺用)으로 하고 장정은 견포의(堅布衣) 제본으로 결정했는데, 46배판으로 조판했으므로, 책을 펴면 좌우상하에 훤하고 넓은 공간이 있어서 시원스러웠다. 초판은 3,000부를 발행했다. 인쇄용지와 천과 판지의 면세 통관은 한순규 간사가 처리했고, 8월 중에 인쇄를 끝내고 제책 공정에 들어갔다. 책 첫 장 속 표제(標題=內題)에 1952년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뒤끝에 단기 4285년 9월 1일 인쇄, 9월 10일 발행이란 날짜가 찍힌 한글판 성경전서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책 표제(標題)의 글씨는 오인명 장로님이 받아왔는데, 국민학교 여교사라고만 알고 그 성명을 모르고 넘어갔다. 아쉽게 생각한다. 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을 1단 23자 23행, 상하 2단으로 구약이 1,223쪽, 신약이 399쪽 도합 1,622쪽이다. 책 크기는 가로 22cm, 세로 28.5cm. 반포 값은 얼마였나? 본래 성서에는 책값 표시를 않기 때문에 책에서는 알 수 없다. 기독공보 1952년 11월 3일자에 실린 신간 광고에서 75,000원(圓)임이 밝혀진다. 간기(刊記)를 보면 발행소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92, 인쇄소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1가 8로 되어 있다. 이는 부산은 잠정적 임시 거처요 본거지는 서울임을 의식하고 실지와 다른 표시로 간기에 나타낸 것이다. 전쟁 중인 1952년 9월에, 피난지 부산에서 한글판 성경전서를 출판하였다. 당시의 교계신문도 “전국 교회 대망의 한글판 성경 완성”이라 하여 임영빈 총무의 담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백만 신도 대망의 한글판 성경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바친 노력과 경비는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기자는 한글판 성경 완성의 소식을 듣고 대한성서공회 총무 임영빈 목사를 찾아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고심담을 다음과 같이 듣게 되었다. 전란의 와중 전전유랑(轉轉流浪) 피난의 생활 중에서 이 거대한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금일 그 완성을 보게 된 것은 우으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특히 산파의 역할을 한 임영빈 총무의 노력이 대단하였음은 전교계가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연내의 숙제이던 한글 철자법 성경 교정과 인쇄 출판은 근간 여러 가지 죽을 뻔 한 과정을 지내 이번에 그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글 성경의 인쇄를 시작하기는 금년 4월이고 인쇄가 끝나기는 9월 25일이다. 제본이 끝나려면 앞으로 한 10여일 걸릴 것 같다. 이 인쇄를 한 인쇄소는 피난 온 협진인쇄소요, 인쇄교정을 본 이들은 김진룡, 오인명, 강석모, 오한근 제씨며 또 임영빈 총무 안신영 선생들이다. 그들이 더운 여름 밤낮 교정을 보아 한글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 성경의 총 페이지 수는 1천 6백 14페이지로 예전 성경보다 3백 32페이지가 줄어서 책 매기도 좋고 모양도 좋게 되었다. 종이 값 인건비를 제하고 순 인쇄비와 제본비만이 1억 5천만 원이 되고 종이 값 인건비를 가산하면 2억 7, 8천만 원이나 된다. 우리는 이렇게 비싸게 박인 성경을 우리 교계에 어떻게 하여서든지 적당한 값으로 제공하려고 하여 판매정가를 7만 5천원으로 정했다. 이번에는 강대용으로 국판배판 4호 활자로 3천부만 인쇄했다. 보급판은 이 대본으로 축소 인쇄하여 추후에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초판을 인쇄할 때 앞뒤 판을 바꿀 때마다 한쪽 면만 인쇄된 것을 5장씩 별도로 빼서 일본의 로버트슨에게 보냈다. 그는 그것을 원고로 삼아 국판, 46판, 국반판 등 축쇄판을 1953년 도쿄에서 인쇄·제책하여 부산에 보내어 반포하도록 했다. 1952년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에서 처음으로 ‘한글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국한문’판과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옛 철자법 성서와 당시 정부에서 사용하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따르는 새 철자법을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했다. 한글 새 철자법으로 처음 출판된 이 성경의 출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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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4

4.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서사업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도저히 성서 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외국 성서공회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피난지에서도 최선을 대해서 성서를 보급한 담당자들이 있었기에 외국 성서공회들의 지원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한 가지 일도 저절로 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개정 원고를 부산으로 가지고 갔던 임영빈 총무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월 25일 남침한 북한의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성서공회 직원들은 그때까지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다행히 경리 담당자 한순규가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재단법인 기금과 예금을 인출하여 성서공회 금고에 확보해 두었다. 임영빈 총무는 서대문경찰서 앞에서 보위부에 끌려갔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왔으나, 공산당의 지시대로 매일 사무실에 나와 감시를 받았다.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임 총무는 전 직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을 주고, 각자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했다. 이에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은둔하거나 피난길에 올랐다. 성서공회도 1950년 9월과 1953년 11월에 성서회관이 두 번이나 파괴되고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서울을 떠나 피난지 부산에서의 사업은 생존을 위한 고투였다. 그러나 전쟁이 만든 폐허와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으며, 새 철자법으로 만든 한글판 개역 성경 원고를 보존하고 마침내 출판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었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도 한글판 개역 성경전서의 수정 원고가 항아리에 담겨 기적적으로 보존되는 일이 일어났다. 출판 담당자 김태룡은 폭격 당한 인쇄소 건물에서 사라진 100여 장을 제외한 한글 개역 성경 수정 원고를 찾아서 임 총무에게 인계했다. 이 귀중한 원고를 받은 임 총무는 부인과 큰 아들에게 몰래 시골 친척 집에 가서 숨겨두게 했는데, 이들은 원고를 김치 항아리에 담아 용감하게 먼 길을 헤치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서울 수복 직전 9월 26일 화재로 성서공회 건물이 전소했을 때 수많은 성서와 인쇄용지와 서류가 모두 불타고 말았지만, 이들의 위험을 무릅쓴 조치를 통해서, 한글판 개역 성경 원고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임 총무는 이 1차 수정 원고를 파내어 잘 간수했고 부산에 가져가서 2차 수정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공회 직원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관으로 사용할 마땅한 건물을 구할 수 없어서 우선 대청동 중앙장로교회 지하 한 칸을 빌려 사무실로 사용했다. 공회 직원들과 임영빈 총무도 1950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눈 내리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가족들을 배편으로 보내고 짐은 다른 배로 부쳤다. 그리고 자신은 남아서 뒷정리를 한 후 겨우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기차 칸마다 피난민들과 화물로 가득 찼고 자리가 없어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기차 지붕에 엎드려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지붕에 있던 이들 중에는 얼어서 죽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부산행 열차에서 한글 개역 성경 원고가 다시 한 번 안전하게 보관되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임 총무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썼다. 나는 성경 수정 원고를 트렁크 속에 넣어두었으나, 마지막 순간 화물들을 보낼 때, 원고를 트렁크에서 꺼내어 나의 작은 손가방에 넣었습니다. 트렁크를 잃어버리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무심코 그렇게 했습니다. 트렁크는 잃어버렸고 원고는 건졌습니다. 그 원고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역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겪은 경험을 통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통해서 주어진 여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나에게 역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한글 성경 수요가 급증할 것을 예상하던 임 총무는 1951년 2월 한글 성경 출판을 서두르기 위해서 일본 도쿄로 초청을 받아 갔다. 그러나 한글을 출판할 수 있는 인쇄소가 없었다. 일본인 인쇄공을 통해 활자를 주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한글을 몰라 작업이 원만하지 못했다. 임 총무는 1952년 3월 부산으로 돌아왔다. 임 총무가 돌아오면서 남포동 1가 53번지의 2층 목조 건물을 임시로 빌려 성서회관을 마련했다. 2층에는 임 총무의 가족이 살고 아래층은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 남포동 사무소에서 일본 도쿄의 로버트슨 협동총무가 보내준 한글 성경으로 1년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위해 수십만 권의 성서를 반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태룡은 공보부의 직영공장에서 좋지 못한 활자로나마 사진 원고용 인쇄를 만들었으며, 표제를 『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붙이고 표지를 도안하여 로버트슨에게 보냈다. 이 표제의 도안은 당시에 국민학교 저학년 교과서 표제를 붓글씨로 쓴 바 있는 최수섭(崔銖燮) 씨가 만들었다. 몇 달 후 그 『기쁜 소식』 10만 부를 인쇄하여 보내왔다. 성지 사진 64매를 넣어 편집한 누가복음 『기쁜 소식』은 권당 1,500원에 판매 보급했다. 이 『기쁜 소식』은 정부가 채택한 새 철자법으로 된 첫 한글 성서였기 때문에, 전쟁 중에 책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립 초중학교의 교과서로도 채택되었다. 사진이 들어간 큰 글씨의 복음서는 그림책이나 잡지처럼 편집되어 있어서 서울, 부산, 대구의 서점에서도 유치원생부터 청소년들에게까지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쁜 소식』은 1952년 한 해 동안 그 어느 책보다 잘 팔리는 책이 되어 전쟁 중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1882년 로스에 의해 첫 한글 복음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출간된 지 70주년이던 1952년에, 로스가 지향했던 아래 아가 없는 단순한 철자법을 채택한 『기쁜 소식 누가복음』이 어린이의 손에까지 들려 읽히게 되었다. 이 『기쁜 소식 누가복음』은 모두 20만권이 출판되어 보급이 되었다. 영국성서공회 지원: 성경전서 21,500권, 비용 6,350,000엔 미국성서공회 지원: 성경전서 3 0,000권, 비용 10,000,000엔 신약전서 200,000권, 비용 14,000,000엔 단편 성서 700,000권, 비용 3,500,000엔 삽화 누가복음 200,000권, 비용 3,600,000엔 미국성서공회 소계 31,100,000엔 = 86,000달러 1952년 부산에서 출간한 성서는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3,000부와 단편 89,700부, 합계 92,700부였다. 그 해에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는 718,783부의 성서를 보내주었다. 1950~1953년 출판된 성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34종 가운데, 성경전서는 런던(1950년), 동경(1950년, 관주), 동경(1952년, 한글판), 동경(1953년 관주), 동경(1953년, 두 가지 판)에서 출판되었다. 신약전서는, 동경(1950년, 관주), 동경(1950년, 부 시편), 동경(1950년 간이국한문), 동경(1952년, 한글판, 두 가지 판), 뉴욕(1953년)에서 출간되었고, 전쟁 전에 서울에서 출판된 판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3

3. 개역한글판 성경의 출판 준비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개정 작업과 조판 및 출판이 육이오 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완성된 역사는, 돌아볼수록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온통 혼란 속에 있을 때도 성서 사업을 감당했던 분들은 흔들림 없이 옛 철자법으로 되어 있던 <셩경개역>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정하는 작업을 서둘러 추진했던 일은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신문과 잡지 등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출판되고 있었습니다. 성서 사업을 추진했던 분들은 성경의 철자법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임영빈 총무가 1949년 3월 취임한 후 주력한 사업은 새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의 출판이었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개역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하여 1949년 상반기에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출판했고, 이어서 성경 전체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했으며, 조판 작업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모든 출판물이 새 한글 철자법을 채용하자, 성서공회도 새 철자법에 맞는 개역 성경을 출판하는 것이 시급했다. 1947년 성서위원회에서 김춘배 목사가 “성경을 새로 인쇄하려면 새 철자법을 사용하자”는 안을 제기했다. 1948년에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개역 성경의 철자법을 수정하기 시작하여 새 맞춤법을 적용한 『마태복음』을 출판했으나, 통일안의 기준에서 벗어나 많은 지적을 받은 후 중단 상태에 있었다. 임영빈 목사가 1949년 3월 제2대 총무로 취임한 후 주력한 첫 사업은 새로운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철자법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르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졌던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개역 한글판 성경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일단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1949년 상반기에 출판했고, 10월 말까지 3만 권 이상을 반포했다. 개역 성경의 맞춤법 수정 작업은 시작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50년 2월에 마무리될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김태룡이 성서 위에 그대로 붉은 잉크로 수정을 하면 강병주(姜炳周) 목사가 이를 감수하고 다시 임영빈 총무가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태룡은 이 작업이 끝나면 문교부 추천으로 강릉사범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임영빈 총무의 부탁으로 그 해 4월부터 공회 출판부의 정식 직원이 되어 성서의 조판과 출판을 담당했다. 1950년 4월부터 성경전서의 활자 개발과 조판 작업에 들어갔으며, 6월부터 교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경전서 100여 페이지의 초교가 나왔을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고, 폭격으로 인쇄 공장이 파괴되면서 성경전서의 출판은 중단되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2

2.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이 되고,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성서 사업을 담당했던 분들은 성서공회 재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성서 보급 사업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진: 이 시기에 ‘연합성서공회(세계성서공회연합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신약개역>]] 성서공회는 해방 직후 혼란과 분열 속에서도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재건에 착수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리 점령 결정에 따라, 하지(J. R. Hodge) 중장 지휘 하에 미 육군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1945년 9월 9일 남한에 군정을 포고하고, 12일 아널드(A. V.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미 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정태응 총무는 미 군정 당국에 조선성서공회의 역사를 보고하고 적산으로 편입된 재산의 반환과 성서사업 재개를 요청했다. 군정의 적산 관리국은 9월 19일 공회의 사업 재개를 허락하고, 일제가 압류했던 재산을 정태응 총무에게 반환하고 적산 해제를 통고했다. 공회의 자산을 돌려받은 정태응 총무는 10월 11일 종로 성서회관을 다시 열고 성경 판매를 재개하는 한편, 오긍선 의사와 김관식 목사와 함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회 재건을 논의했다. 위원회는 이 날짜로 공회에 토지를 헌납한 이풍한(李豊漢) 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풍한은 대한제국 말기에 판서를 지냈으며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대지주였는데, 소유하고 있던 논밭 80만 평 가운데 30여만 평을 공회에 기증했다. 그가 이런 막대한 토지를 기부한 것은 해방의 충격과 함께 오랜 친구인 정태응 총무의 설득과 공회 사업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이풍한은 1945년 12월 언더우드(H. H. Underwood) 박사와 함께 성서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6년 11월 7일 해방 후 첫 성서위원회 연례회의가 열렸다. 성서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성서공회 재단 설립을 위해 임명된 실행위원회는 1947년 4월 30일 회의에서 재단법인 신청을 위한 공회 정관을 제정했다. 재단법인 설립은 재정적 자립과 함께 조선성서공회가 독립하고,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협력 기구로 남는 것을 의미했다. 1948년 5월 7일 미국성서공회 로버트슨(James C. F. Robertson) 박사가 한국에 부임하여, 임시 부총무 스코트를 대신하여 미국성서공회 대표자로서 부총무직을 맡았다. 정태응 총무는 70세 정년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성서공회에서 은퇴하고, 그의 후임은 성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에서 결정하도록 결의했다. 1948년 12월 23일에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는 이러한 결의에 따라 성서위원회의 지명 추천을 받은 임영빈 목사를 정태응 장로 퇴직 시 후임 총무로 임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조선성서공회의 명칭을 대한성서공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8월 23일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공식 출범한 공회는 1948년 11월부터 대한성서공회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49년에 공회에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조선성서공회가 대한성서공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임영빈 신임 총무가 취임했으며, 회계연도도 10월 31일자로 마감하도록 변경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를 협력공회로 초청했으며, 세 협력 공회의 대표는 한 명으로 하기로 하고 그를 부총무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회 이사들을 새로 선출했는데, 이후 성서위원회가 후보를 추천, 선임하기로 했다. 1949년 10월 26일 문교부장관의 명의로 대한성서공회 재단법인 인가가 나왔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성서공회는 군정 당국으로부터 적산에 포함되어 있던 성경전서 15,320권, 신약/구약전서 42,961권, 단편 509,343권(총 가치 91,207원)을 돌려받았고, 곧바로 이들의 판매에 들어갔다. 그 결과 12월까지 세 달 동안 성경전서 1,634권, 신약/구약전서 8,949권, 단편 231권을 판매했다. 몇 년 동안 성경이 판매되거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심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성경을 구하러 서울까지 오는 이들도 있었고, 성경을 구입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회가 가진 성경 재고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에 대처할 수 없었고 새로 인쇄할 비용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1945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기증한 미국성서공회에 다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1946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영국성서공회는 중국 중경에 있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위해 1,000부의 신약전서를 출판하도록 지원했다. 1945년 9월에 인쇄된 이 신약전서는 중국에서 미국성서공회 대리인으로 활동하던 모르텐슨(Ralph Mortensen)에 의해 9월 20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임정 부주석 겸 한인기독교공동체 회장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전달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성경 반송이 봉쇄된 상황에서 출판된 이 중경판 신약전서는 긴밀한 국제 협력의 산물이었다. 임정 요인과 독립지사들은 해방 이후 출판된 이 첫 한글 신약전서를 들고 10월과 11월에 귀국했다. 미국성서공회는 미국장로회의 지원으로 1945년 9월 뉴욕에서 25,000부의 한글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이 가운데 수천 권이 먼저 하와이에 있던 전쟁포로수용소의 한국인 포로들에게 보내졌다. 미국성서공회는 1947년 50,000부의 한글 신약전서와 25,000부의 복음서를 인쇄하여 미 군정 당국의 협조를 통해 서울 공회에 기증했다. 한편 성서공회 사업을 위해 과거에 오랫동안 실시했던 5월 마지막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는 전통도 1946년에 회복되어, 180여 개 교회가 성서주일 헌금 23,454원 59전을 공회에 전달했다. 이 가운데 6,200원은 정동교회 미군 예배에서 연보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금도 일반 후원자 10원, 특별 후원자 100원, 평생 후원자 1,000원 세 종류로 모집하여 437명의 후원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33,590원을 기부했다. 1946년 여름 홍수로 많은 교인들이 집을 잃었다. 공회는 이들을 위해 성경을 무료로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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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1

<대한성서공회사 3>에는 1945년 해방 전후의 성서사업으로부터 2002년까지의 성서 사업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제 말 성서 사업이 강제로 중단된 때로부터, 해방 후 성서 사업이 다시 시작된 일과,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출판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진 일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그리고 육이오의 전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의 개정과 출판과 보급을 뒤돌아봄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성경이 선배 신앙인들이 피와 땀의 결실인 것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서주일 설교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가려 뽑아서 소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서공회사 3>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성서 사업 강제 종료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지를 받던 마지막 시기인 194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는 성서 사업 자체를 압박하다가 마침내 성서사업 자체를 중단시킵니다.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는 내용을 보면, 식민 통치의 은혜가 아니라 그 속셈이 얼마나 간악한지를 역설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신사참배와, 일본인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인 동방요배를 하며, 승전기도회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광복과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습니다.]] 1940년 9월 19일 실행위원회가 조직된 날 저녁 정태응 총무는 공회의 다른 직원 두 명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구속되었다. 외국인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는 간첩 혐의였다. 그는 70일 동안 감금된 후 11월 28일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 정책에 협력하도록 협박을 받았다. 정태응이 수감 중이던 11월 21일, 성서위원회 임시회의는 외국 선교사를 배제한 채 21명의 한국인과 일본인만으로 위원을 구성하기로 정관을 개정했다. 1941년 1월 1일 조선성서공회는 홉스 총무와 정태응 총무 책임 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월 10일 일본교회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서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 설립 방안을 논의했으며 3월에 재단법인을 구성했다. 이는 3월에 김경삼이 장로회 총회 특별위원을 통해 시가 30만원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기증하여 매년 경상비 1만 5천원을 공회에 제공하면서 법인 구성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4월 1일 정인과가 공회의 총무로 취임하고 공회의 업무를 장악했는데, 이는 일제 당국의 강요에 의해 통과된 계약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홉스 총무는 1941년 3월 18일 모든 재고와 재산을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에 인계하고 사업을 마감했다. 태평양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홉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태응을 조선성서공회 대리총무 겸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권한을 위임한 후, 안식년 휴가를 명목으로 5월 23일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이는 1895년 켄뮤어 총무의 부임 이후 46년간 서울 지부를 통해 성서사업을 해 온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정태응은 다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10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이 영국 이름이지만, 일본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석방되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노력한 끝에 공회 재단의 자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12월 22일 적산 관리법과 적산 관리 시행령을 공포하고, 29일 ‘적산관리법 시행규칙’을 공포한 후, 외국 선교부나 외국인이 관여한 재산을 압류했다. 1942년 5월 23일 모든 공회의 자산은 적산 관리인인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지부장의 손에 들어갔다. 정인과 총무를 비롯한 공회의 친일 직원과 성서위원회 위원들은 공회의 자산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6월 9일에는 성경 판매 중지 명령에 의해 성서사업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다만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 1942년 6월부터 4년간 성서공회 사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일본 천황제 이념과 국체의 본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와 모든 기독교 문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한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유대 민족주의 요소가 강한 구약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요한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하며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와 승전기도회에 참여했다. 그런 훼절과 수난의 교회에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해방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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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문서를 불태운 과부 교인

강화읍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과부교인’ 김씨 부인이 있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였지만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란 여종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어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18장을 읽다가 18절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였다. 그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 즉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요?” 그러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 “마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들이기로 했다. 종에서 양녀로 신분이 바뀐(롬8:14) 복섬이는 더욱 정성스럽게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얻은 딸로 더욱 기뻤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의 감동 또한 컸다.    이런 식이었다.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읽었다. 강화의 어떤 교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했던 것처럼 침으로 갠 진흙을 맹인 눈에 바르고(요9:6) 기적이 나티나기를 기다려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 같은 ‘문자적’ 신앙을 미신적인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문자적으로’ 실천함으로 뒤이어 나타날 이적에 기대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개종 1세대’는 성경을 읽되 ‘해석’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성경을 읽는 한국 교회 특유의 소박한 신앙 전통이 수립되었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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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문서를 태운 부자 교인

1900년 무렵 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에 종순일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잘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 전도사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교인이 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19:21)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들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음 섬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 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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