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2 > 성서주일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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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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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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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이 되고,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성서 사업을 담당했던 분들은 성서공회 재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성서 보급 사업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진: 이 시기에 ‘연합성서공회(세계성서공회연합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신약개역>]]

성서공회는 해방 직후 혼란과 분열 속에서도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재건에 착수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리 점령 결정에 따라, 하지(J. R. Hodge) 중장 지휘 하에 미 육군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1945년 9월 9일 남한에 군정을 포고하고, 12일 아널드(A. V.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미 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정태응 총무는 미 군정 당국에 조선성서공회의 역사를 보고하고 적산으로 편입된 재산의 반환과 성서사업 재개를 요청했다. 군정의 적산 관리국은 9월 19일 공회의 사업 재개를 허락하고, 일제가 압류했던 재산을 정태응 총무에게 반환하고 적산 해제를 통고했다.
공회의 자산을 돌려받은 정태응 총무는 10월 11일 종로 성서회관을 다시 열고 성경 판매를 재개하는 한편, 오긍선 의사와 김관식 목사와 함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회 재건을 논의했다. 위원회는 이 날짜로 공회에 토지를 헌납한 이풍한(李豊漢) 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풍한은 대한제국 말기에 판서를 지냈으며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대지주였는데, 소유하고 있던 논밭 80만 평 가운데 30여만 평을 공회에 기증했다. 그가 이런 막대한 토지를 기부한 것은 해방의 충격과 함께 오랜 친구인 정태응 총무의 설득과 공회 사업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이풍한은 1945년 12월 언더우드(H. H. Underwood) 박사와 함께 성서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6년 11월 7일 해방 후 첫 성서위원회 연례회의가 열렸다. 성서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성서공회 재단 설립을 위해 임명된 실행위원회는 1947년 4월 30일 회의에서 재단법인 신청을 위한 공회 정관을 제정했다. 재단법인 설립은 재정적 자립과 함께 조선성서공회가 독립하고,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협력 기구로 남는 것을 의미했다.
1948년 5월 7일 미국성서공회 로버트슨(James C. F. Robertson) 박사가 한국에 부임하여, 임시 부총무 스코트를 대신하여 미국성서공회 대표자로서 부총무직을 맡았다. 정태응 총무는 70세 정년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성서공회에서 은퇴하고, 그의 후임은 성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에서 결정하도록 결의했다. 1948년 12월 23일에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는 이러한 결의에 따라 성서위원회의 지명 추천을 받은 임영빈 목사를 정태응 장로 퇴직 시 후임 총무로 임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조선성서공회의 명칭을 대한성서공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8월 23일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공식 출범한 공회는 1948년 11월부터 대한성서공회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49년에 공회에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조선성서공회가 대한성서공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임영빈 신임 총무가 취임했으며, 회계연도도 10월 31일자로 마감하도록 변경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를 협력공회로 초청했으며, 세 협력 공회의 대표는 한 명으로 하기로 하고 그를 부총무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회 이사들을 새로 선출했는데, 이후 성서위원회가 후보를 추천, 선임하기로 했다. 1949년 10월 26일 문교부장관의 명의로 대한성서공회 재단법인 인가가 나왔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성서공회는 군정 당국으로부터 적산에 포함되어 있던 성경전서 15,320권, 신약/구약전서 42,961권, 단편 509,343권(총 가치 91,207원)을 돌려받았고, 곧바로 이들의 판매에 들어갔다. 그 결과 12월까지 세 달 동안 성경전서 1,634권, 신약/구약전서 8,949권, 단편 231권을 판매했다.
몇 년 동안 성경이 판매되거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심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성경을 구하러 서울까지 오는 이들도 있었고, 성경을 구입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회가 가진 성경 재고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에 대처할 수 없었고 새로 인쇄할 비용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1945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기증한 미국성서공회에 다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1946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영국성서공회는 중국 중경에 있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위해 1,000부의 신약전서를 출판하도록 지원했다. 1945년 9월에 인쇄된 이 신약전서는 중국에서 미국성서공회 대리인으로 활동하던 모르텐슨(Ralph Mortensen)에 의해 9월 20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임정 부주석 겸 한인기독교공동체 회장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전달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성경 반송이 봉쇄된 상황에서 출판된 이 중경판 신약전서는 긴밀한 국제 협력의 산물이었다. 임정 요인과 독립지사들은 해방 이후 출판된 이 첫 한글 신약전서를 들고 10월과 11월에 귀국했다.
미국성서공회는 미국장로회의 지원으로 1945년 9월 뉴욕에서 25,000부의 한글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이 가운데 수천 권이 먼저 하와이에 있던 전쟁포로수용소의 한국인 포로들에게 보내졌다.

미국성서공회는 1947년 50,000부의 한글 신약전서와 25,000부의 복음서를 인쇄하여 미 군정 당국의 협조를 통해 서울 공회에 기증했다.
한편 성서공회 사업을 위해 과거에 오랫동안 실시했던 5월 마지막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는 전통도 1946년에 회복되어, 180여 개 교회가 성서주일 헌금 23,454원 59전을 공회에 전달했다. 이 가운데 6,200원은 정동교회 미군 예배에서 연보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금도 일반 후원자 10원, 특별 후원자 100원, 평생 후원자 1,000원 세 종류로 모집하여 437명의 후원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33,590원을 기부했다. 1946년 여름 홍수로 많은 교인들이 집을 잃었다. 공회는 이들을 위해 성경을 무료로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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