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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역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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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2-05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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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롬 10: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 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 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새로운 언어로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언어권에 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서 번역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 가가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 니다. 다른 언어권에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의 언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외국어입니다. 구약 성경은 고대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 니다. 고대의 성경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고, 선교지의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습니다. 고 대의 언어를 자기의 언어도 아닌 선교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초기 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던 게일 목사님은 국내 최초의 한국어 신약젼셔 (1900)의 번역을 마쳤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척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뉴욕의 60층짜리 생명보험 건물을 짓는 일도 이 일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 걸렸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놓기 위해 땅을 파야 하듯, 문장들을 골라내고 단어들의 의미를 파헤치며 엄습해오는 말라리아와 피곤과 싸우면서 선택하고 재어보고 판단하고 기록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파나마운하를 파는 것과 맞먹는 일로 여겨집니다. 말 그대로 파나마운하 인 이 신약성경은 두 개의 대양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이 없으신 사랑과 무한정 늘어나는 인간의 욕망을 연결시키는 운하입니다.
실제로 국어 문법서 한 권 없고, 제대로 된 국어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성경 원문의 의미를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한국어를 찾아내서 번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11월 24일에는 대한성서공회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한글 성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때 에 첫 한글 성서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부터 최초의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 그리고 초기에 번역하여 출간된 여러 단편 성서들과, 1911년의 최초의 한글 성경전서, 그리고 현재 의 개역개정판에 이르기까지 73권의 성경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에는 백여년 전 지구의 반대편에서부터 복음의 빛이 없는 암흑의 땅 조선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일에 참여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고 암송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의 신앙 이 서려 있습니다.
첫 한국어 번역 성서는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 목사님이 번역한 누가복음이었습니다. 스코 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것이 1866년이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1872년 2월에 중국선교사로 선택되었고, 3월 25일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을 하고 중국으로 출발합니다. 그의 나이 30세 때이며, 이 때가 고종 10년입니다. 미국과 일본을 거쳐 그해 8월 23일에 중국 산동의 지푸(芝罘, 지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지푸에는 스코 틀랜드 선교부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님이 1863년부터 선교 를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암슨은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전도를 나섰다가 대동강 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조선에 파송했던 목사님입니다. 윌리암슨은 1867년에 조선과 중국 국경에 인접한 세관인 봉황성의 고려문까지 선교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 의 종적을 찾으러 갔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에는 쇄국정책으로 한국의 문호 가 닫혀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윌리암슨의 권유로 1872년 10월에 영구(Yingkou, 中国 辽宁省 营口市)를 지나 우장(牛莊)으로 가서 겨울을 납니다. 다음해 1873년 2월 로스 목사의 아내는 아들 드러 문드(Drumund)를 낳고 건강이 나빠져서 3월에 죽었습니다. 영구나 우장 등의 겨울 날씨는 매우 춥기도 하지만, 신혼 후 임신의 몸으로 선교지까지 긴 여행을 하면서 건강이 나빠져 있 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교지에서 아내를 잃은 로스 목사님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여 선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둠의 땅인 한국에 복음을 전할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로스 목사님은 중국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조선에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 10월 9일 한국인 들의 왕래가 많은 고려문에 찾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조선 사람을 찾았습니다. 로 스 목사님은 중국인 여관에 짐을 풀고 그곳에 머물면서 조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숙소를 완 전히 개방하고 하루종일 한국인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말을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인 데 대하 여 실망하면서 우장으로 돌아갑니다.
로스 목사님은 1876년 봄에 다시 고려문을 찾아갑니다. 로스는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했을 때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어학 선생을 찾습니다. 그러는 중 소가죽을 배에 싣고 압록강 을 건너다가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무일푼이 된 한 의주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한국어 교 사를 찾는 로스 목사를 만나 한국어 교사가 되기로 약속을 하고, 로스 목사는 그에게 두 달치 의 돈을 선불로 주었지만, 서양인을 도와주면 사형에 처한다는 국법이 무서워서, 삼 일째 되 던 날 밤에 도망을 치고 맙니다. 이 도망 사건은, 그 당시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로스는 여러 차례 실패를 하면서 다시 사람을 찾았고, 마침내 이응찬이라고 하는 조선인을 만납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1877년에 한국어 초보(Corean Primer)를 발행했습니다. 문법부가 6쪽이 있고, 한국어 알파벳이 5쪽이며, 뒷부분은 회화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한국어 문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응찬
및 몇 명의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고전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번역자들이 먼저 중국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로스 목사님과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일일이 그리스어 성경과 대조 하면서 번역을 검토하고 수정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도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875년 말에 만주로 전임되어 로스 목사의 동 역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에든버러 연합장 로교회를 졸업하고 1871년 말에 중국 선교사로 지부에 도착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은 1876년 초에 로스 목사의 아들을 돌보기 위해 중국에 와 있던 로스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 을 하였고, 후에 로스 목사님의 한국어 성경 번역에 참여하였습니다.
번역문이 완성되면, 그것을 다시 고전 한문으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한국어 번역이 온전하게 되었는지를 점검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약 번역을 계속하여 1887년에 신약전서의 번역 을 완성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이 번역과 출판을 위하여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에 서 비용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원래 의미를 최대한 정확히 옮기는 것과 번역 언어의 관용적 표현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깝게 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1890. 11. 4일자 서신)이라고 ‘번역 원칙’을 밝히고 있습니다.
존 로스 목사님은 그의 책 '존 로스의 한국사'(1891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자국의 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낯선 사람들에게 인정하기를 꺼리며, 늘 한 자를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알려진 후에도 가르쳐 주기를 내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글로 말을 쓰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이 곳에서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한문 기독교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에 더 능숙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한글은 읽기조차 싫어했다.”
한국인 학자들은 자신들이 진서인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어 문자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로스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 학자들이 본토어로 된 책의 단순성을 비웃을지라도, 한국의 모든 여성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라야 성경 언어입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러한 말도 했습니다.
“1천2백만 또는 1천5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선의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한글 성서가 한국에 전파되어서, 한국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한문 성경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1883년 5월 30일자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였던 루미스의 편지에는 이수정의 친척이자 친한 친구였던 한 사 람이 18 년 전에(1866년의 병인박해) 천주교로 개종한 죄로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 습니다. 이것은 이수정 스스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 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것을 감수하면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 니다. 조선 말기는 이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처형의 대상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사실상 목숨을 걸 각오를 하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환 부역조’(換父逆祖: 부모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르다) 했다는 말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대표 적인 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시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큰 결단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83년 5월 11일에 루미스가 미국성서공회 길맨 총무에게 쓴 편지에는, 일본에 사절단으로 온 한국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수정의 가장 큰 소망은 자기 민족에게 성경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다른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 듣고, 또 한국을 위해서도 성경 반포사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선 한한(漢韓) 성 경 번역을 시작한 다음 한글 성경 번역에 들어가자는 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루미스는 이 번역이 신약 전체가 번역되었다고 말했지만, 마태복음으로부터 사도행전까지만 책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마가복음 은 1885년에 요코하마에서 출판이 되었습니다. 루미스 총무가 경비를 지원하면서 번역을 하도 록 권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출판까지 합니다.
이수정은 자기를 데려가려고 한국에서 돈을 가지고 온 동생에게, 자기는 돈이 필요 없으며, 자신과 백성에게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루미스의 편지 에는, 이수정의 가장 큰 소망이 자기 민족에게 성경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 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한국어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님이 국내에 들어와서 국내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성서번역자회를 조직하면서, 국내에서 새롭게 성경을 번 역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1900년에 신약전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이 성경은 계속 해서 수정이 되면서 1911년에 최초의 셩경젼셔가 완성됩니다.
이 번역이 끝난 뒤에, 성서번역자회 회장이었던 언더우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 번역자는 그가 사용하려고 하는 언어와 원래의 성서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잘 알 아야 한다. (2) 원래의 뜻은 되도록 이 나라 말에서 사용되는 매개개념으로 완벽하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3) 이러한 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원래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조선인 학자를 확보하는 일이다. (4) 장래에는 이러한 학자를 키워서 성서 번역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1938년에는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원문대로’라는 번역 원칙을 따라 개역을 하고, 이 때는 한국인 학자들도 성경의 개역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다시 1961년과 1998 년에 개정이 되어 오늘까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한국인 학자들만 의 힘으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는 아직 성경이 있는 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전혀 번역되지 않은 언어들도 많습니다.
“2014년 세계 성서 번역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6,901개 언어 중에 성경은 542개 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신약은 1,324개, 단편은 1,020개입니다. 아직 약 13억 명이 사용 하는 6,359개의 언어는 성서 번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성서의 일부만 번역이 된 상 태입니다.
2015년 12월 현재,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첫 번역 성경은 100여 년 전의 한국과 상황이 거의 같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첫 성경을 번역할 때는,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본토인이 외국어 성경으로부터 먼저 자기들의 언 어로 번역을 하고,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성경 번역 컨설턴트가 원문에 비추어서 그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는 130여 년 전에 첫 한글 성경을 번역할 때 외국 성서공회들로부터 도움 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2011년 ‘한글 성경 완역 및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얀마의 5개 소수 민족 성경 번역 사업’인 파오 구약 번역, 쿠미 친 구약 번역, 하와 나가 구약 번역, 쿠알심 신약 번역, 라시드 신약 해설 번역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에서 파오 구약 번역은 본 공회 번역실에서 직접 번역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에 한 글 성경 번역을 위하여 서구의 교회와 성서공회들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면서,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경 번역에 도움이 필요한 성서공회를 재정으로 그리고 인력으로 돕는 것입니다. 번역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하고, 번역이 이루어졌을 때, 번역을 점검할 수 있는 학자를 보내서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정확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 록 돕습니다. 그리고 첫 번역이 완성되었을 때, 조판을 지원해 주고, 또 인쇄 제본뿐만 아니 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나라까지 운송하는 비용까지 감당하여 지원해 줍니다. 소수 민족의 경우나 아직 교회가 성숙하게 성장해 있지 않은 경우에, 스스로의 힘으로 성경 번역 비용이나 조판 비용 인쇄 제작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을 위해서 우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1881년 로스 목사님의 보 고에는, 스코틀랜드 프리하이 교회의 엘진 목사님은 ‘고아 소녀들의 연주회 수익금’ 1.15파운 드를 보내주었으며, 랜즈다운의 도비 목사님은 한 가난한 사람의 연보 10실링을 보내주었는 데, 그의 가난을 생각할 때 이 기부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의 성서사 업은 외국 성서공회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외국 성도 들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또 실제로 다른 나라의 성 경 번역과 보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도움을 받았던 것도 복이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더욱 큰 복입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지원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보내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새로운 언어로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언어권에 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서 번역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 가가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 니다. 다른 언어권에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의 언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외국어입니다. 구약 성경은 고대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 니다. 고대의 성경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고, 선교지의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습니다. 고 대의 언어를 자기의 언어도 아닌 선교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초기 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던 게일 목사님은 국내 최초의 한국어 신약젼셔 (1900)의 번역을 마쳤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척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뉴욕의 60층짜리 생명보험 건물을 짓는 일도 이 일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 걸렸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놓기 위해 땅을 파야 하듯, 문장들을 골라내고 단어들의 의미를 파헤치며 엄습해오는 말라리아와 피곤과 싸우면서 선택하고 재어보고 판단하고 기록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파나마운하를 파는 것과 맞먹는 일로 여겨집니다. 말 그대로 파나마운하 인 이 신약성경은 두 개의 대양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이 없으신 사랑과 무한정 늘어나는 인간의 욕망을 연결시키는 운하입니다.
실제로 국어 문법서 한 권 없고, 제대로 된 국어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성경 원문의 의미를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한국어를 찾아내서 번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11월 24일에는 대한성서공회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한글 성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때 에 첫 한글 성서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부터 최초의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 그리고 초기에 번역하여 출간된 여러 단편 성서들과, 1911년의 최초의 한글 성경전서, 그리고 현재 의 개역개정판에 이르기까지 73권의 성경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에는 백여년 전 지구의 반대편에서부터 복음의 빛이 없는 암흑의 땅 조선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일에 참여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고 암송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의 신앙 이 서려 있습니다.
첫 한국어 번역 성서는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 목사님이 번역한 누가복음이었습니다. 스코 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것이 1866년이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1872년 2월에 중국선교사로 선택되었고, 3월 25일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을 하고 중국으로 출발합니다. 그의 나이 30세 때이며, 이 때가 고종 10년입니다. 미국과 일본을 거쳐 그해 8월 23일에 중국 산동의 지푸(芝罘, 지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지푸에는 스코 틀랜드 선교부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님이 1863년부터 선교 를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암슨은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전도를 나섰다가 대동강 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조선에 파송했던 목사님입니다. 윌리암슨은 1867년에 조선과 중국 국경에 인접한 세관인 봉황성의 고려문까지 선교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 의 종적을 찾으러 갔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에는 쇄국정책으로 한국의 문호 가 닫혀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윌리암슨의 권유로 1872년 10월에 영구(Yingkou, 中国 辽宁省 营口市)를 지나 우장(牛莊)으로 가서 겨울을 납니다. 다음해 1873년 2월 로스 목사의 아내는 아들 드러 문드(Drumund)를 낳고 건강이 나빠져서 3월에 죽었습니다. 영구나 우장 등의 겨울 날씨는 매우 춥기도 하지만, 신혼 후 임신의 몸으로 선교지까지 긴 여행을 하면서 건강이 나빠져 있 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교지에서 아내를 잃은 로스 목사님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여 선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둠의 땅인 한국에 복음을 전할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로스 목사님은 중국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조선에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 10월 9일 한국인 들의 왕래가 많은 고려문에 찾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조선 사람을 찾았습니다. 로 스 목사님은 중국인 여관에 짐을 풀고 그곳에 머물면서 조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숙소를 완 전히 개방하고 하루종일 한국인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말을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인 데 대하 여 실망하면서 우장으로 돌아갑니다.
로스 목사님은 1876년 봄에 다시 고려문을 찾아갑니다. 로스는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했을 때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어학 선생을 찾습니다. 그러는 중 소가죽을 배에 싣고 압록강 을 건너다가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무일푼이 된 한 의주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한국어 교 사를 찾는 로스 목사를 만나 한국어 교사가 되기로 약속을 하고, 로스 목사는 그에게 두 달치 의 돈을 선불로 주었지만, 서양인을 도와주면 사형에 처한다는 국법이 무서워서, 삼 일째 되 던 날 밤에 도망을 치고 맙니다. 이 도망 사건은, 그 당시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로스는 여러 차례 실패를 하면서 다시 사람을 찾았고, 마침내 이응찬이라고 하는 조선인을 만납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1877년에 한국어 초보(Corean Primer)를 발행했습니다. 문법부가 6쪽이 있고, 한국어 알파벳이 5쪽이며, 뒷부분은 회화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한국어 문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응찬
및 몇 명의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고전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번역자들이 먼저 중국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로스 목사님과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일일이 그리스어 성경과 대조 하면서 번역을 검토하고 수정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도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875년 말에 만주로 전임되어 로스 목사의 동 역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에든버러 연합장 로교회를 졸업하고 1871년 말에 중국 선교사로 지부에 도착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목사님은 1876년 초에 로스 목사의 아들을 돌보기 위해 중국에 와 있던 로스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 을 하였고, 후에 로스 목사님의 한국어 성경 번역에 참여하였습니다.
번역문이 완성되면, 그것을 다시 고전 한문으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한국어 번역이 온전하게 되었는지를 점검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약 번역을 계속하여 1887년에 신약전서의 번역 을 완성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이 번역과 출판을 위하여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에 서 비용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로스 목사님은 “원래 의미를 최대한 정확히 옮기는 것과 번역 언어의 관용적 표현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깝게 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1890. 11. 4일자 서신)이라고 ‘번역 원칙’을 밝히고 있습니다.
존 로스 목사님은 그의 책 '존 로스의 한국사'(1891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자국의 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낯선 사람들에게 인정하기를 꺼리며, 늘 한 자를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알려진 후에도 가르쳐 주기를 내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글로 말을 쓰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이 곳에서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한문 기독교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에 더 능숙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한글은 읽기조차 싫어했다.”
한국인 학자들은 자신들이 진서인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어 문자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로스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 학자들이 본토어로 된 책의 단순성을 비웃을지라도, 한국의 모든 여성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라야 성경 언어입니다. 로스 목사님은 이러한 말도 했습니다.
“1천2백만 또는 1천5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선의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한글 성서가 한국에 전파되어서, 한국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한문 성경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1883년 5월 30일자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였던 루미스의 편지에는 이수정의 친척이자 친한 친구였던 한 사 람이 18 년 전에(1866년의 병인박해) 천주교로 개종한 죄로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 습니다. 이것은 이수정 스스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 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것을 감수하면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 니다. 조선 말기는 이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처형의 대상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사실상 목숨을 걸 각오를 하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환 부역조’(換父逆祖: 부모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르다) 했다는 말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대표 적인 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시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큰 결단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83년 5월 11일에 루미스가 미국성서공회 길맨 총무에게 쓴 편지에는, 일본에 사절단으로 온 한국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수정의 가장 큰 소망은 자기 민족에게 성경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다른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 듣고, 또 한국을 위해서도 성경 반포사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선 한한(漢韓) 성 경 번역을 시작한 다음 한글 성경 번역에 들어가자는 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루미스는 이 번역이 신약 전체가 번역되었다고 말했지만, 마태복음으로부터 사도행전까지만 책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마가복음 은 1885년에 요코하마에서 출판이 되었습니다. 루미스 총무가 경비를 지원하면서 번역을 하도 록 권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출판까지 합니다.
이수정은 자기를 데려가려고 한국에서 돈을 가지고 온 동생에게, 자기는 돈이 필요 없으며, 자신과 백성에게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루미스의 편지 에는, 이수정의 가장 큰 소망이 자기 민족에게 성경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 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한국어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님이 국내에 들어와서 국내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성서번역자회를 조직하면서, 국내에서 새롭게 성경을 번 역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1900년에 신약전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이 성경은 계속 해서 수정이 되면서 1911년에 최초의 셩경젼셔가 완성됩니다.
이 번역이 끝난 뒤에, 성서번역자회 회장이었던 언더우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 번역자는 그가 사용하려고 하는 언어와 원래의 성서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잘 알 아야 한다. (2) 원래의 뜻은 되도록 이 나라 말에서 사용되는 매개개념으로 완벽하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3) 이러한 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원래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조선인 학자를 확보하는 일이다. (4) 장래에는 이러한 학자를 키워서 성서 번역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1938년에는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원문대로’라는 번역 원칙을 따라 개역을 하고, 이 때는 한국인 학자들도 성경의 개역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다시 1961년과 1998 년에 개정이 되어 오늘까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한국인 학자들만 의 힘으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는 아직 성경이 있는 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전혀 번역되지 않은 언어들도 많습니다.
“2014년 세계 성서 번역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6,901개 언어 중에 성경은 542개 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신약은 1,324개, 단편은 1,020개입니다. 아직 약 13억 명이 사용 하는 6,359개의 언어는 성서 번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성서의 일부만 번역이 된 상 태입니다.
2015년 12월 현재,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첫 번역 성경은 100여 년 전의 한국과 상황이 거의 같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첫 성경을 번역할 때는,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본토인이 외국어 성경으로부터 먼저 자기들의 언 어로 번역을 하고,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성경 번역 컨설턴트가 원문에 비추어서 그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는 130여 년 전에 첫 한글 성경을 번역할 때 외국 성서공회들로부터 도움 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2011년 ‘한글 성경 완역 및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얀마의 5개 소수 민족 성경 번역 사업’인 파오 구약 번역, 쿠미 친 구약 번역, 하와 나가 구약 번역, 쿠알심 신약 번역, 라시드 신약 해설 번역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에서 파오 구약 번역은 본 공회 번역실에서 직접 번역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에 한 글 성경 번역을 위하여 서구의 교회와 성서공회들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면서,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경 번역에 도움이 필요한 성서공회를 재정으로 그리고 인력으로 돕는 것입니다. 번역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하고, 번역이 이루어졌을 때, 번역을 점검할 수 있는 학자를 보내서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정확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 록 돕습니다. 그리고 첫 번역이 완성되었을 때, 조판을 지원해 주고, 또 인쇄 제본뿐만 아니 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나라까지 운송하는 비용까지 감당하여 지원해 줍니다. 소수 민족의 경우나 아직 교회가 성숙하게 성장해 있지 않은 경우에, 스스로의 힘으로 성경 번역 비용이나 조판 비용 인쇄 제작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을 위해서 우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1881년 로스 목사님의 보 고에는, 스코틀랜드 프리하이 교회의 엘진 목사님은 ‘고아 소녀들의 연주회 수익금’ 1.15파운 드를 보내주었으며, 랜즈다운의 도비 목사님은 한 가난한 사람의 연보 10실링을 보내주었는 데, 그의 가난을 생각할 때 이 기부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의 성서사 업은 외국 성서공회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외국 성도 들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또 실제로 다른 나라의 성 경 번역과 보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도움을 받았던 것도 복이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더욱 큰 복입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지원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보내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