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2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목록

설교자료

성경을 묵상하는 자의 복

성경 : 시편 1편 1-6절설교 : 양태우 목사(빛교회)대한성서공회의 해외 선교지 성경 후원사역을 알게 되어 동참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니카라과라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가 성경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목회자들도 자기 성경책 없이 목회를 하고 있다는 사정을 전해 듣고 부활절 헌금으로 성경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경의 공급이 풍성합니다. 기독교인 대부분이 자기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군대에서도 성경책을 쉽게 구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구치소와 교도소에서도 성경이 비치되어 읽고 싶을 때 마음껏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언제 어디서나 바르게 잘 자랄 수 있었고 오늘의 자랑스러운 한국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성경책이 없었더라면 올바르지 못한 맹목적인 신앙에 갇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니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며 살아갔을 것이며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주님의 법에 의하여 심판의 벌을 받아 쇠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견고히 믿게 되며, 죄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 의의 길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잘되는 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게 되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되고, 책임감들이 넘치고 서로 돕는 가운데 하는 모든 일들이 탁월해집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었고,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은 황무지를 장미꽃밭으로 바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령을 받으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셔서 뜨겁게 기도했고 수많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의 시작이 성경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민족 복음화가 이루어져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에 정직과 정의, 사랑과 배려가 확대되어 성숙한 문화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선교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움 받던 나라에서 도와주는 나라로 도약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니카라과도 감사한 것은 많은 크리스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성경책이 원활히 공급된다면... 바울사도의 표현처럼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신앙이 기반 된 인물들이 길러지게 됩니다. 다윗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었듯이 우리도 도산 안창호 선생, 독립신문 서재필 선생, 만세운동 유관순열사,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등 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신앙 위인들이 배출되었듯이 니카라과에도 하나님과 국민들에게 신뢰와 존경받는 인물이 배출되면 그 나라가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나라의 대세종교가 된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자정하게 하는 것도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과감히 버리고,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말씀을 다시 붙잡고 실천해 나갈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주님과의 처음 사랑회복도 성경에서부터 시작되며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아가야 할 바른 길, 형통의 길의 발견도 성경에서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지혜를 얻은 인물들이 늘어날 때에 우리나라도 니카라과도 풍요로운 나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크신 은혜를 사해 바다처럼 가둬두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갈릴리 바다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를 일으킨 성경 말씀을 통해 니카라과도 다시 일어나 중남미 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참 좋으신 주님 성경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렇게 복된 삶을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이 형통의 길을 담은 성경책이 니카라과 교인들에게도 전해지게 해주셔서 우리가 받은 복을 저들도 받게 하옵소서. 모든 것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위 내용은 2023년 5월 4일, 바이블코리아에서 니카라과 성경 기증 예식 중 전한 설교입니다. 

설교자료

성경을 길로 삼다

성경 : 시편 1편 1-2절설교 : 김근영 목사(수원제일교회)‘본립도생(本⽴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신자의 기본은 말씀 사랑이며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데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소중히 여기라고 해서 성경책 먼지 묻지 않게 잘 관리하라는 뜻이 아님을 아시지요? 성경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은 매일 말씀과 함께 하는 삶, 매일 말씀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거기에 진정한 ‘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영생으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열심은 ‘말씀 사랑, 성경 사랑’입니다. 그래서 말씀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되 특별히 설교 듣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 사랑이 한국교회를 든든히 세워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교의 방향 역시도 열방을 향해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선물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에 파키스탄으로 보내지는 성경은 파키스탄 영혼을 살려낼 뿐 아니라, 그들에게 참된 복이 무엇인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할 것입니다.   시편 1편의 두드러진 특징은 ‘대조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의인과 악인, 즉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대조하는 목적은 악인(복 없는 사람)을 반면교사로 내세워 결국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1절에는 복 없는 사람들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시인은 복 없는 사람들을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 없는 사람들이란 ‘하나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복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려는 인생의 길과 방향이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꾀를 따르고,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인생의 길로 삼고,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달콤한 자리에 앉아 자기가 뭐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보면 악인들과 같이 꾀가 많으면 남들보다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꾀를 내지 않고 사는 내가 너무 어리석어 보여 바보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악인들의 꾀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한낱 ‘바람에 나는 겨’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산상수훈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기에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어떤 반석이겠습니까?  말씀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이렇게 볼 때, 말씀의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은 주야로 말씀의 인도함을 받기에,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꾀’와 ‘길’과 ‘자리’를 멀리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즉 말씀과 동떨어진 삶, 말씀을 멀리하는 삶, 말씀과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처음에는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졸졸 ‘따르는’ 정도였다가,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길이 자신의 길인 줄 착각하여 그 길 위에 떡하니 ‘서게’ 되고, 더 무서운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그 선 자리가 자신의 자리인 줄로 확신하여 그 자리에 철퍼덕 앉게 되므로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되는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자들은 날이 갈수록 성경과 더욱 가까이 해야 합니다.   D.L. 무디 목사님은 자신의 성경책 표지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합니다. “이 책이 당신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든지, 죄가 당신을 이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그만큼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될 때 우리는 죄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며, 악인들의 꾀를 부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 꾀에 현혹되지도 않게 될 줄로 믿습니다. 소망하기는 우리에게 있는 이 성경이, 그리고 파키스탄으로 보내어지는 이 성경이 우리 자신과 파키스탄 영혼들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우리 모두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신앙의 연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말씀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는 ‘말씀밀착형 신자’로 정녕 형통한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3년 9월 12일,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파키스탄 성경 기증 예식 중 전한 설교입니다. 

설교자료

겨울이 오기 전에

성경 : 디모데후서 4장 21절설교 : 김명헌 목사(의림교회) 저희 교회도 지금 하나님 부르신 때를 기다리는 분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간에 임종의 시간이 되면 평상시 모습하고는 다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바울이라고 하면 위대한 종입니다. 그래서 이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만 하더라도 담대해서 찬송하고, 담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이제 마지막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는 조금 다르더라는 거예요. 분위기가 이때는 위축돼 있고 자꾸 춥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정말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의 연약한 모습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바울 서신에 나타나있는 모든 바울의 모습보다도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와닿는 모습이 오늘 본문이 아닌가, 이전의 바울의 행로를 가만히 살펴보면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이 일을 하든지 아니면 예수 믿는 자들에게 핍박을 가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했던 그 모습 바라보면은 ‘야... 인간으로서 범접 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어려운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 그 모든 일들을 분투와 같이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그런 담대한 바울, 과연 바울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역사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신약 성경이 갖추어지고 기독교가 이렇게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예수님과 버금갈 정도로 대단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며 그렇게 칭송을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하나도 안 나타나요.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에 대한 애환이 그 속에 담겨 있고,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 있고,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군대 시절 생각나는 것처럼 아무리 입어도 춥다고 이야기하고, 옷 좀 가져오라고 이야기하고. 인간의 가장 연약한 점은 언제 나타나는가? 죽을 때 나타나는 것 같아요.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난 다음에 잘 아시는 대로 바울은 얼마 있다가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바울이 했던 이야기를 가만히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앞에서 과연 우리는 오늘날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르완다가 어디에 있는지, 또 그 나라 안의 사정이 어떤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아픔이 많은 민족, 내전으로 인하여서 종족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뿐만이 아니더라. 온 세계 곳곳에 있더라. 특히 르완다 같은 경우에 이런 심각한 부족 전쟁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속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가장 약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만약에 바울을 빗댄다면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할까?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Do you best, 최선을 다해라. to get here, 여기에 도착하도록. before winter, 겨울이 오기 전에. 이런 표현은 디모데후서에서 두 번 사용합니다. ‘Do your best’라고 하는 말을 두 번 사용하는데, ‘너는 속히 오라’ 또 ‘너는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 말씀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런 소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새벽에 보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 소리 들리는 거 아십니까? 새벽에 보면 가을 작은 벌레 소리가 얼마나 귀에 크게 들리는지 몰라요. 낮 시간에는 안 들립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 보이지만 비행기 소리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더 큰 세상의 소리가 있기 때문에. 어쩌면 바울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그 미약한 소리를 누가 듣겠어요?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거죠.   칼 바르트가 하는 이야기처럼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인카네이션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기록된 말씀 '바이블' 아닙니까?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하는 것이 '케리그마' 설교 아니에요? 그럼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은 아마 칼 바르트는 그런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분이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고, 그 말씀 속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이거예요. 성경책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가장 중요한 성경책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창세기 28장에 보면 17절에서 벧엘에서 돌을 베개 삼아 하나님 앞에 잠자다가 제사를 드렸던 야곱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두렵도다. 정말 두렵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문이로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그러면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나요? 아니죠. 하나님의 집이었죠. 그런데 이곳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는 위축된 모습으로 인간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고 바울 사도가 아닌가요? 아니죠. 우리는 그 연약한 자를 통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르완다에 있는 사람, 죽어 나가는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오염수 문제, 일본의 문제, 중국의 문제, 아세안의 문제, 북한의 문제 이런 문제만 하더라도 너무 바쁜데 르완다까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기도의 깊은 속에 들어가고 말씀 속에 잠기게 되면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립니다. 그건 르완다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죠. Do your best, 너 최선을 다해서. to get here, 여기에 와 달라. 우리가 어떻게 갑니까? 또 가서 어떻게 합니까?   대한성서공회에 일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나타나지 않는, 여기 구석에서 1년 내내 아무도 만나주지도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 한 번씩 성경 보내면 이렇게 예배드리고 이런 곳 누가 기억해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우리가 고백하게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순간. 내가 가장 약해졌을 때에, 감옥에 있을 때, 내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광야에 있을 때, 죽음의 총소리가 나를 위협하고 오늘 하루도 살아있는 것이 감사로 느껴지는 전쟁 내전의 자리에 내가 있을 때에 우리는 뭐라고 하겠느냐, 우리도 똑같은 소리 않겠어요? 나 제발 좀 살려달라고, 나 제발 좀 살려달라고. 옷을 좀 가져달라고. 그런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또 다른 측면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뭘 할까요? 행동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벧엘에 있는 야곱처럼 우리도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 사실을 깨달았다면 대한성서공회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곳이에요. 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내가 가장 힘들 때, 외로울 때, 정말 바울처럼 열악한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그때 깨닫게 됩니다. 아하. 내 형편이 바울과 같구나. 주님 나를 도우소서.   우리는 미약한 소리를 하지만 겨울 전에 우리를 돕는 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르완다의 내전처럼 그렇게 힘든 환경 속에 노출돼 있는 분들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겠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돕는 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마는 이 돈이 가는 곳에는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빵 보내는 게 낫지, 하나님 말씀 가지고 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우린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은 뭐예요? 가장 믿음 없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하는 거 아십니까? 하나님이 이미 나와 함께하는데 뭘 함께해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옵소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할 수 있는 소리예요.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하나님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 내가 주님과 더 가까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되어야 되는 거죠.   이 대한성서공회가 정말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이 보실 때 이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처럼 하늘의 평안이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날 때 그 갈등을 잠재우는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번에 르완다에 성경을 보냅니다.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바울 때문에 디모데가 움직이잖아요. 르완다 때문에 대한성서공회가 움직이잖아요. 오늘 대한성서공회 사람들 때문에, 직원들 때문에 여러분들 수고 때문에 우리가 기쁨으로 그 일을 또 감당하잖아요. 여러분,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 당당하게 이 일을 감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잘 아시고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평안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3년 9월 7일,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르완다 성경 기증 예식 중 전한 설교입니다. 

말씀을 만나다

말씀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한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전예담(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 석사 과정, 성안시민교회 청년부)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십니다. 그리하는 것이 내게는 좋습니다. ‌주 여호와를 나는 나의 대피소로 삼았습니다. ‌주님 하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려고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시편 73:28)성경 말씀은 늘 가까웠지만, 때로는 멀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경을 읽었으나 그 말씀들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제가 미숙했던 탓이 가장 크겠지만, 그와 더불어 성경 특유의 경전체와 고유의 용어들로 인한 부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너무 쉽게 풀어쓴 성경보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의 표현이 더 익숙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팎의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들에게는, 더 나아가 대학생들에게도 현재 사용되는 성경의 문체나 용어는 어렵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 속 진리를 전하는 것에는 일체의 타협이 없어야 하겠지만, 문체나 기타 부수적인 사항으로 인해 말씀을 가까이하기에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은 늘 안타까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감사한 기회로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적이었고 신선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며 어려워했던 부분들을 잘 풀어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원문과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 잘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머리말에서는 새롭고 참신한 용어와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성경으로서 원문에 최대한 충실한 번역이 되도록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제가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묵상하면서 은혜받은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시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즐겨 읽고 더러는 암송도 하는 시편 23장의 마지막 구절은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에서 아래와 같습니다. 정말이야, 좋은 것과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따라다닐 거야, 내 삶의 모든 날에!나 머물고 싶어, 여호와의 집에 오랜 날 동안! (시편 23:6)다윗이 여호와를 의지해 왔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의지할 것임을 드러내는 부분인데, 이를 노랫말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의 말씀 중 몇 구절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희망 가운데 기뻐하며, 큰 어려움 가운데 견디십시오. 기도에 정성을 쏟으십시오. (로마서 12:12)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굳건하게 서서 꿈쩍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언제나 더 많이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 사도 바울이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이 잘 드러난 구절인 것 같습니다. 권면의 말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도 바울의 말씀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생생함이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저는 현재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아침에 큐티할 때, 그리고 중고등부 및 청년부의 온라인 기도회를 인도할 때 활용하고 있습니다. 개인 묵상 시간에는 기존의 역본과 비교하며 쉽게 풀어쓴 표현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기존에는 몰랐던 말씀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함께하는 학생들과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읽으며 보다 쉽게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끔 활용하고 있습니다.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불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 되길, 우리에게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내 발에 등불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또 내 길에 빛입니다. (시편 119:105)마지막 날 곧 명절의 큰 날에 예수님이 서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나한테 와서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생수가 그의 배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올 겁니다.” (요한복음 7:37-38)

말씀을 만나다

말씀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과 함께라면!

박동희(높은뜻푸른교회 청년부)  같은 교회 동역자를 통해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의 출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읽으며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마음을 공동체의 동역자들과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그 중 느낀 점과 기대하는 점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읽기 편한 문장의 호흡을 고려하고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들로 쓰인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읽으며 느낀 것은, 초신자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말씀이 더 명확하고 친근감 있게 전달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고, 20대 중반에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제자 훈련을 받을 때에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았고 새신자였던 저는 말씀의 어투나 몇몇 단어들이 다소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읽으면서 제가 초신자 때 겪었던 이런 어려움이 해결되어 초신자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말씀이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나아가 새신자뿐만 아니라 기신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받고, 제가 좋아하는 말씀 구절들로 시작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씀 구절들을 찾아보았고 복음서와 서신서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기존 역본에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 구절인 히브리서 12:2에서,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은 ‘바라보자’라고 번역되어 있는 부분이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에는 ‘눈길을 고정합시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해당 구절을 찾아 읽으면서, 저는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히브리서 12:2)  우리를 맨 처음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또 완전하게 하시는 분인 예수님께로 눈길을 고정합시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 때문에 창피스러움을 가볍게 여기시고 십자가를 견뎌 내셨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임금자리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히브리서 12:2)<『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서신서 묵상>사복음서의 대화체 부분과 서신서를 읽을 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주로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으로 말씀을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으나, 그 어색함은 잠시일 뿐, 복음서의 예수님과 등장인물 간의 대화체를 보면서 가독성이 높아졌고, 몇몇 본문은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선명해졌습니다. 특히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직접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들려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따뜻한 마음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어조와 단어로 쓰인 서신서를 아침마다 읽고 묵상할 때, 서신서 저자의 말투와 의도가 잘 드러나며 독자의 입장에서 훨씬 더 명확하고 의미 전달이 잘 된다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에 말씀을 읽으며 매일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일은 필수적이고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점점 더 말씀을 멀리하고 성경을 읽지 않는 시대가 오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의 발간으로 다시 희망을 봅니다. 먼저는 제가 이 성경을 보며 다시 말씀을 더 읽고 싶어졌고, 더 말씀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의 발간은 마치 선물과 같다고 느껴졌습니다.『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이 기존 역본들과 상호 보완하여, 다음 세대들과 초신자들을 말씀으로 더 가까이 인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씀에 한층 더 친근해지며, 말씀이 어렵다는 생각에 가까이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말씀이 잘 전달되고 널리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만나다

장년층 선교회에서 읽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새문안교회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읽기 모임  김인성(새문안교회 집사)  제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1964년에 발간한, 세로쓰기로 된 『관주 성경전서 간이 국한문』이었습니다.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닌 것 같은데도 당시의 많은 분들이 세로쓰기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은 딱딱하게 느껴지고 읽어 내기가 좀 더디긴 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한문이 섞여 있는 세로쓰기 성경이 활자에 힘과 무게감이 있어 오히려 성경답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성경전서 새번역』이 출판되어 읽게 되었을 때는 성경이 뭔가 새로워졌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개역성경에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구절들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읽기 쉬웠고, 다른 쉬운 번역본에 비해서 말씀의 무게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며, 무엇보다 교회의 성경 번역 전통을 살렸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성경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대한성서공회에서 『새한글성경』이 출판된다는 소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주 가는 기독교 서점에 들러서 『새한글성경』 출판 소식을 알지 못하는 직원에게 알려 주며 책 주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을 처음 받아 읽어 보니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번역이었습니다. 개역성경에 익숙해 있던 저로서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상대편을 높이는 격식체를 사용하는 표현은 굉장히 낮설었고, 읽기에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구절도 있었습니다. 한문체에 익숙한 50대 후반의 나이로 새로운 성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역본들을 비교하며 읽어 내려가는 가운데 차츰 적응이 되고 읽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읽어 가면서 더 단순하고 명료한 구절들이 많이 보였고 이해하기가 쉬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수개월 전부터 우리 새문안교회에서는 선교회 또래 모임에서 매달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시작해 다섯절씩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는데 참여자들의 반응이 좋습니다. 표현이 참신하고 이해하기가 쉽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대화 문체에 두드러진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직접 입술로 소리내며 통독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성경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마치 독자가 성경 속의 주인공이 되어 직접 말하는 느낌의 구절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모여 통독하는 것이 잘 어울리며 이해하기도 쉬운 느낌입니다. 또한 이 성경 읽기 모임을 계기로 좀 더 의미 있고 참된 교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참여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많은 홍보를 통해 점점 더 확대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전서 새번역』에 이어서 출간된 『새한글성경』은 지금 이 시대와 다음 세대, 그리고 더 먼 미래의 세대를 위해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성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에 수고해 주신 여러 성경학자 분들과 대한성서공회에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말씀을 만나다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은 원문의 뉘앙스를 잘 드러냅니다

  안용성 (그루터기교회 담임목사)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은 짧은 문장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는 시대적 의의를 가지면서 동시에 원문을 더 정확히 옮길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짧은 번역문이 원문의 어순을 더 가깝게 옮기기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요한복음 11:1-2입니다. 1 어떤 사람이 앓고 있었다. 그는 베다니의 나사로였다. 베다니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가 사는 마을이었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고 주님의 발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던 여자였다. 앓고 있는 사람은 그의 오빠 나사로였다.본문에는 그동안 요한복음에 나오지 않은 나사로라는 새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마리아와 마르다가 함께 언급되고, 마리아는 베다니에서 주님께 향유를 발라드린 그 여자라는 설명이 더해집니다. 나사로를 두 여인의 형제로 소개하는 것은 독자들이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향유 사건은 뒤에 이어지는 12장에 나오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한복음에서 아직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가지고 나사로가 누구인지 설명하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요?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으므로 요한의 독자들은 이미 공관복음서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여인이 베다니에서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누가복음(10:38-42)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나사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만 읽은 사람들은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과 마르다-마리아 자매를 별개로 알고 있을 것이며, 그들의 형제인 나사로에 관해서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하나로 연결해 줍니다. 여러분이 공관복음만 알고 요한복음은 처음 읽는 사람이라 가정하고 11:1-2를 다시 읽어봅시다. 본문은 이러한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사로이고 그의 집은 베다니입니다. 그런데 베다니가 어디냐 하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곳이에요. 그리고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에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일 알고 계시지요? 그 일이 일어난 곳이 베다니잖아요. 베다니에 사는 누구였을까요? 그 사람이 바로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에요. 그러니까 나사로는 마리아의 형제가 되겠지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본문을 어순에 주의하여 읽어보면 앞에서 말한 정보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제시하며 퍼즐을 맞추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이나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런 뉘앙스를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어와 우리말 어순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개역개정』 요한복음 11:1-2)1 한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이다. (『새번역』 요한복음 11:1-2)요한복음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이야기를 바로 이어지는 12장에 배치하여 두 사건을 인과관계로 연결합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은 죽은 형제를 살려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도 단순히 낭비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과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하나로 연결하는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말씀을 만나다

새터민 대학생들도 말씀을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번역에 감사하며 -  박인희(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강사)2021년 11월, 대한성서공회에서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에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성경이 꼭 필요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사 년 전부터 이화여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성경 공부를 하는 새터민 친구들입니다. 이 친구들과의 만남은 처음에는 영어 성경 공부로 시작되었습니다. 탈북민 출신으로 이화여대에 들어와 남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이 친구들에게 당시 가장 큰 어려움은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었습니다. 남한 친구들도 쉽지 않은 영어 수업이 새터민 친구들에게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기고 있는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새터민 친구들과 영어 공부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는 작은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화여대 대학교회의 새터민 성경 공부 모임>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다 보니 친구들에게 때로 영어 성경보다 우리말 성경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기존의 성경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와 문장을 사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개역 성경이 익숙한 저와 같은 신앙인들에게는 한문 투가 적당히 섞인 우리 옛글 성경이 왠지 정겹습니다. 성경의 고어적인 표현들은 어릴 적 고향 교회의 어르신들을 떠오르게도 하고, 옛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아련한 향수마저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새터민 친구들에게는 이런 옛글 성경들이 오히려 잘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한국말인데도 성경책은 어려워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문화적 차이나, 또는 고대세계에 관한 지식이나 유대 역사를 잘 몰라서 그러려니 짐작했는데, 정작 친구들의 문제는 성경의 언어 자체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남한의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 이상 옛 성경 역본들이 정답게 느껴질 수 없었고, 자칫 고루하거나 심지어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어투들은 오히려 성경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었습니다. 고민이 깊어지던 때,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은 바로 제가 찾던 성경이었습니다. 특히 존칭을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보다 본래의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새터민 친구들은 물론, 제 강의를 들었던 외국 유학생들에게도 이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한 중국 학생은 서양 역사를 공부하다가 혼자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된 친구였는데 이 책을 받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유난히 어학 실력이 좋았고, 신앙심도 깊었지만, 이 친구도 한국말 성경책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특히 시편은 우리 옛말의 운율과 가락을 모르고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워 한국말로 된 성경은 거의 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된 좋은 성경을 선물하고 싶었던 차에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은 참 좋은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지난여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면서 이 성경을 소중히 챙겨 갔습니다. 처음에는 영어 성경 공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새터민 친구들은 지금은 저 없이도 자체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서 성경을 읽는 모임을 벌써 이 년 가까이 이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못 만나는 슬픔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지친 마음도 견디고, 학업의 고달픔도 저녁에 조용히 모여 성경을 읽으며 이겨냅니다. 그러던 가운데 몇몇 학생들은 벌써 졸업도 했고, 원하던 회사에 취업도 했습니다.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며 대학 생활을 해나가는 우리 새터민 친구들의 아름다운 삶을 보며, 저는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 디지털 링크로 편리하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아무 때나 주님의 말씀을 읽으며, 새로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 새터민 친구들에게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이 좋은 동반자가 됨에 감사드립니다. 

설교자료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

성경 : 민수기 13장 30-31설교 : 김명헌 목사(의림교회)     오늘의 성경 구절을 중심으로 역사학자 아놀드토인비가 ‘a study of history’라는 역사학에 관계되어진 책을 기술했습니다. 이 책은 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문명권을 21개의 문명권으로 나눈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이 문명권들이 어떻게 생성되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장하고 번영을 이루는지, 어떻게 쇠퇴하는지, 침체하는지, 해체되어지는지 등 여러 과정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독특한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패턴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게 되는데, 타성에 젖은 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타성에 젖은 사회가 새로운 변화를 수용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항상 창조적인 소수였음을 21개 문명권을 통해 똑같은 패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을 기록하는 데에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에 관계되어진 이 패턴들은 오늘날 교회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중 세계 교회의 역사도 동일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생성되어졌는가, 또 어떻게 성장해갔는가, 어떻게 쇠퇴해갔는가, 그리고 어떻게 침체해 가는가, 나중에 교회 문을 어떻게 닫았는가 하는 것까지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생성되었다가 쇠퇴하고 사라져간다면 희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은 항상 있습니다. 창조적 소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놀드토인비가 역사를 바라볼 때에 몇 가지 도전 상황이 있습니다. 그 도전은 열악한 땅, 새로운 땅에 대한 현실이 도전이 됩니다. 갑작스러운 외적의 침입, 지속적인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 이런 도전들을 어떻게 응전하는가하는 문제가 나타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이라고 하는 새로운 땅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습니다. 기존에 있던 땅에 대한 척박함이 있습니다.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에서 그 척박한 시간을 견뎌야했습니다. 아낙 자손들, 광야에 거주하는 민족들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공격해 옵니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도전에 대해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1절처럼 이야기 합니다. 대중들은 타성에 젖은 익숙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많은 대중들은 창조적인 소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대한성서공회가 하는 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방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중들의 관심과 대한성서공회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남에게 성서 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120개국에 23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진 성경을 인쇄해서 나누어주는 데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성서공회가 세워진 후 창의 끝과 같이 창조적인 소수의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무관심이 있었지만 땀 흘린 사람들, 눈물 흘린 기도, 그리고 피까지 흘린 사람들의 헌신 때문에 대한성서공회가 오늘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개신교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신교도 우리가 복음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땀 흘리고 피 흘리고 목숨 바친 사람들의 헌신 때문에 오늘 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서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없이 많은 땅에 대한 도전, 외세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대중들의 관심은 대한민국이 이토록 성장하는 데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할 때만 하더라도 세계 경제 순위 중 꼴찌에 해당되어질 정도로 굉장히 낮은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 경제 대국에 들어설 정도로 대한민국이 성장할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통하여, 대한성서공회를 통하여, 눈물 흘리는 새벽기도의 권사님들을 통하여, 창의 끝과 같은 작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세상과 한국교회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갈렙입니다. 여호수아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담대하게 신앙의 고백을 외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십만명입니다. 그 수십만명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중은 관심 없습니다. 대중은 협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대중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지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리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3500년 전 광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를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올라가겠다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아니면 대중과 함께 정신 나간 일이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대중에게 현혹당합니다. 내 앞길만 생각하여 정신 나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대중의 편협되어진 소리에, 타성에 젖은 소리에 익숙해져있는 이유는 있습니다.   33절을 보면, ‘거기서 내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열두지파의 대표 열두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옵니다. 중악 산악 지대의 길을 톻해 이스라엘을 정탐하고 오는데, 거기에 아낙 자손들의 후예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하면 100전 100패입니다. 이런 사고 속에는 31절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31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이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사람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 메뚜기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성서공회가 120개 나라의 234개 언어로 인쇄를 하여 이렇게 어마어마한 결과가 오기까지 이렇게 될 것을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막에 강을 내시고 광야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루십니다. 끊임없이 세상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역사가 따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칭찬을 합니다. ‘당신들은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의 인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대한성서공회의 믿음에는 역사라 따르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큰 교회를 이루는 것, 꿈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헌신으로 누군가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면, 나의 헌신으로 누군가가 예수를 만나게 된다면, 나의 헌신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한 나라 한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진다면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한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어떻게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135,000명의 미리암 군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올 때, 기드온 용사는 3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놀드토인비가 40년의 대작을 마치면서 딱 한소리 합니다. “세상은 도전과 응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끊임없는 도전 속에 믿음의 응전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을 택할 수 있기를, 하나님의 뜻을 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2년 8월 23일,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모잠비크와 태국 성경 기증 예식 중 전한 설교입니다.

설교자료

살리는 말씀

성경 : 시편 119편 49-50설교 : 안희성 목사(평안교회)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대한 미사일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어느덧 벌써 4개월여가 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습니다. 언론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처럼 보금자리가 파괴되어 갈 곳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다치고 전쟁 참전과 피난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머나먼 한국 땅에서 TV로 전쟁의 소식을 보고 듣는 우리가 보기에도 그 참상과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실제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수 없습니다.   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돕는 손길들이 가까이 국경을 맞대고 이웃해 있는 나라들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각계각층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도움의 손길들을 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원은 식량, 의류, 약품, 돈, 무기 등 일상의 삶에 필요한 구호품들입니다.   이런 가운데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전쟁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보내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한편에서는 전쟁의 고통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것 같으면 실제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이나 의류, 돈과 같은 구호품들을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구호품들이 당장 여러 가지 부족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에 필요한 것들은 채워지면 어느 정도 부족함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또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육신의 부족함은 물품들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공허하고 두렵고 불안한 생각과 마음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 없고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떠한 것보다 그들의 영혼의 갈증과 부족함은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무너진 건물과 집은 다시 세우면 되고 부족한 것들은 채워 넣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워진 영혼의 고갈은 전쟁이 끝이 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영혼의 평화는 세상 물질로 채워질 수 없고 오직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에서 주님이 만난 여인은 외롭고 영혼이 고갈된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들의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었고 물질로도 채울 수 없었습니다. 나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하고 외로웠던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영혼의 갈증이 해결되고 인생의 참 만족과 행복을 찾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마음과 영혼의 외로움과 두려움, 불안함 가운데 있는 그들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그들 안에 있는 공허함과 두려움과 불안함은 사라지고 주님의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고백했습니다. 자신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시편 기자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의 위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말씀이 자신을 살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과 위로,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소망과 위로입니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실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가운데 현지 주민이 전한 말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러시아가 무수한 미사일과 대포로 전쟁과 상관없는 국민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없도록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러시아의 목표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중했던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게 함으로써 절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만드는 이 고통 속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로 하여금 무너지지 않게 하고 일상의 삶을 회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해줄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들에게 참된 소망과 진정한 위로를 주고 그들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생명이시고 부활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고 그들을 살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말씀을 읽고 곰곰이 생각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다시 회복하게 하시는 위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세상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에 그들은 다시 소망을 갖게 되고 위로를 경험하고 살리심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담긴 이 성경이 그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고 눈으로 읽게 될 때에 모든 영혼들이 되살아나고 구원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출처 : 위 내용은 2022년 6월 28일, 대한성서공회 용인 성서사업센터에서 우크라이나 성경 기증 예식 중 전한 설교입니다.

게시물 검색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