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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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의*'를 보라.
다산 종교(의식)
땅에서 나는 것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다산은 언제나 또 어느 문명권에서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농사일이 날씨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던 가나안 민족들의 종교에서는 다산 종교의식이 특별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 의식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늘 유혹거리가 되었다. 한 해가 지나는 동안 식물이 자라나는 시간상의 순서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숱한 의식을 치러야 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해마다 거행하는 '거룩한 혼인', 곧 바알*이 땅과 맺는 혼인인데, 이는 난잡한 잔치를 벌이고 또 성전 창기*와 관계를 맺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가나안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기름진 농토는 바알을 통해 수태하는 어머니 신이었다. 이리하여 근본적으로는 신들이 다산의 세력 자체였다. 신들은 이 세상의 부분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종교 의식과 주술 관행을 통해 신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아무것도 빼앗기시지 않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유로이 다산의 복을 내리시고 자기 백성이 그에 대해 사랑과 순종으로 응답하기를 기대하신다. 이스라엘에서는 가나안 다산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는데, 이는 이 종교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인 땅과 사람과 짐승의 다산을 그것을 베푸신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 때문이다. 예언자들과 몇몇 임금들은 거듭거듭 이 종교의식을 없애려고 했다(이를테면 왕상18장; 왕하23:4-7; 렘3:1-5; 호4:12-14; 암2:7-8; 미1:7). 관련용어 : 바알, 신전 창기, 음행
다시스, 다시스의 배[선척]
다시스(렘10:9; 겔27:12; 욘1:3)는 스페인에 있었던 베니게(페니키아)의 식민지 타르텟수스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로 항해했던 베니게 사람들의 큰 무역선들을 '다시스의 배'(또는 다시스의 선척)들이라고 불렀다(왕상10:22; 사23:1,14; 60:9; 겔27:25).
다윗 성/ 다윗의 성읍
구약에서 보통 다윗 왕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한 부분을 말한다(삼하 5:6-9, 5:9의 설명). 눅 2:11에서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다윗의 소년 시절 집이 있었던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
다윗은 옛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임금이었다(주전 1,000년경).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이 기다리는 구주로서 구원을 가져다 줄 자는 '다윗의 자손'일 것이고 다윗 왕국이 다시 서리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다윗의 자손'은 그리스도의 칭호가 되었다('메시야*'). 신약 성경에서는 다윗을 <시편>의 저자로 여기고 그의 시를 인용한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후손으로서, 약속된 구세주에게 쓰인 말. 복음서에서 예수를 일컫는 말(구약 예언의 성취)로 사용되었다(마 1:1; 22:42).
땅의 백성
일반적으로 '땅의 백성'은 나그네*와는 반대로 완전한 시민권자들을 가리킨다(이 히브리어 표현을 창23:7; 출5:5; 민14:9에서는 각각 '그 땅 거민', '나라에 … 백성', '그 땅 백성'으로 옮겼다). 완전한 시민권자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성경의 몇몇 군데에서는 이 표현이 완전 시민권자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지방 귀족들을 가리키는지를 단정할 수 없다(레20:2,4의 '그 지방 사람', 왕하11:14,18-20; 21:24; 23:30,35; 왕하25:19의 '국민', 왕하25:3의 '그 땅 백성', 겔7:27의 '거민', 겔45:22의 '이 땅 백성'). 왕하24:14에서 '빈천한 자'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빈천한, 땅의 백성'이어서, 이 경우 '땅의 백성'은 하층민을 뜻한다. 포로기 이후 시대에는 '땅의 백성'이 이교적인 혼합주민을 가리켰다(스4:4의 '그 땅 백성', 스10:11의 '이 땅 족속들'. 느10:30-31의 '이 땅 백성'은 문자적으로 '땅의 백성들'을, 스10:2의 '이 땅 이방 여자'는 문자적으로 '땅의 백성들 가운데 이방 여자들'을 뜻한다). 나중에 유대교에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율법을 따르지도 않는 주민층을 멸시하는 투로 '땅의 백성'이라고 불렀다.
로마(의) 식민지
이탈리아 바깥에 있는 로마 시민권자(제대한 군인들이나 유배된 자)들의 정착지. '식민지' 주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지니고 있었다('로마 시민*').
분노의 잔
'진노의 잔*'을 보라.
사단의 깊은 것
계2:24의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깊은 비밀'(고전2:10 참조)을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 듯하다. 요한은 이들의 지식을 마귀의 지식이라고 한다(요2:9의 '사단의 회' 참조). 이들은 실제로 '사단의 깊은 것'이라는 지식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이 그런 것들을 잘 알고 겪어 보아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세상에 초연한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그노시스*'). 관련용어 : 사단
사람의 아들
'인자*'를 보라.
선지자의 생도들
문자적으로는 '선지자(=예언자)의 아들들'인데, 예언의 은사를 받은 남자들, 곧 예언자 계층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았다는 증거는 무엇보다도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들은 바알 종교와 벌인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엘리사 자신이 그런 예언자 공동체 안에서 살았던 것 같다(왕상20:35-42; 왕하2:3,5,7,15; 4:1,38; 5:22; 6:1; 9:1-10. 왕상18:3-4,13; 19:10,14 참조). 삼상10:5-12; 19:19-24를 보면, 이미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 시대에 이와 비슷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무리들이 활동할 때 상당한 역할을 했고 부분적으로는 일정한 연습과 '기술'로 이를 수 있는 무아경의 환상들(삼상10:5-12; 19:19-24; 왕하9:11; 렘29:26 참조)은 그 당시 주변 종교를 믿던 비슷한 무리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어서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왕상18:26-29의 바알 예언자들과, 더 나아가서 암7:14의 '선지자의 아들' 참조). 겉으로는 이런 예언자들의 대표자를 털옷('겉옷*')과 가죽 허리끈(왕하1:8; 슥13:4; 마3:4)으로, 더 나아가서는 머리를 둥글게 민 것(왕하2:23)과 경우에 따라서는 이마의 표(왕상20:41 해설 참조)로 알아볼 수 있었다. 관련용어 : 예언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세례 요한에게서 비롯된 움직임은 부분적으로 독립했거나 여기저기서 그리스도교회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여러 무리를 끌어들이게 된 듯하다. 세례 요한의 움직임과 그 영향은 행18:25; 19:1-7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요1:6-8,15,20,30-31; 3:25-30에서는 이 무리들이 세례 요한과 그의 세례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두고서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히6:2도 참조). 관련용어 : 세례
시온의 딸
'딸*'을 보라.
여호와의 궤
"언약궤"를 보라.
여호와의 날
구약(욜 1:15; 2:1,11; 암 5:18,20; 말 4:5)에서 보통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는 때(특정한 날짜가 아닌). 이 심판은 어떤 경우에는 외세에 의해서, 어떤 때는 자연적인 재난에 의해서 일어난다. 신약에서 "주의 날"은 예수께서 모든 인간을 심판하기 위하여 예기치 못할 때에 재림하는 것을 일컫는다(살전 5:2; 살후 2:2; 같은 묘사에 대해서 마 24:43; 눅 12:39; 벧후 3:10). 어떤 곳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또는 "그 날"(살후 1:10) 등으로도 나타난다.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우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로 몸소 정하신 날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이 날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의 권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주시며 적들을 벌하시거나 멸망시키심으로써 자기들을 적들의 압박에서 어떻게 건져주시는지를 경험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예언자 아모스와 이사야는 하나님을 배신한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므로 이 날이 오기를 바라지 말라고 경고한다(암5:18-20; 사2:11-17). 이런 뜻을 지닌 여호와의 날이 <요엘>의 주제가 된다(를 보라). 결산의 큰 날이 이른다 하더라도, 여호와께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욜2:32; 습2:3), 하나님께 신의를 지키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남은 자'(사10:20-23)는 구원받을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기대하는 바에 따르면, 여호와의 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다시 사신 분이 인자*이시자 세상의 심판자로 드러나실 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부르는 것이 중요하고(행2:21해설), 이 주님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이 중요하다(롬2:16; 고전5:5; 빌1:6,10; 살전5:2,4-5,8; 딤후4:8; 벧후1:19. 마7:22; 24:36도 참조). 여기서 파생된 뜻으로 매 주의 첫 날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주의 날'(계1:10)이라 불린다. 이 날은 회중*이 모여서 주님의 부활과 즉위를 기념하고(막16:2병; 요20:19,26) '주의 만찬'을 행하며(고전11:20. 행20:7 참조) 주께서 최종적으로 오실 것을 거듭 새롭고도 더욱더 깊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날이다(고전11:26; 막14:25병; 고전16:22; 계22:30; 히10:24-25). 관련용어 :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천사*'를 보라.
여호와의 성막/ 여호와의 장막
"여호와의 임재의 성막" 또는 "여호와의 임재의 장막". "장막"을 보라.
여호와의 영
""을 보라.
여호와의 영광
'영광*'을 보라.
여호와의 이름
'이름*'을 보라.
여호와의 전쟁
'거룩한 전쟁*'을 보라.
여호와의 종
'종*'을 보라.
영지주의
'그노시스'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름*'을 보라. 관련용어 : 이름, 예수님을 뒤따름
예수님의 계보
1. 마태 (마1:1-17)는 예수님의 계보를 숫자 상징법을 밑바닥에 깔고서 작성했다. 히브리어의 각 자모에는 수 값이 있다. '다윗'이란 이름을 나타내는 히브리 자모들이 지닌 수 값을 다 합하면 14가 된다. 계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이 열 네 대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마1:17) 마태가 선포하려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나타나셨다는 점이다. 숫자 상징법을 살리려 하다 보니 8절에서 요람과 웃시야(=아사랴) 사이에 아하시야와 요아스와 아마샤, 세 임금을 빠트린 듯하다(대상3:11-12 참조). 눈에 띄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거나(라합, 룻) 죄인으로 통했던(다말, 우리야의 아내) 여자 네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계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죄인들도 들어 있으므로, 이스라엘 아닌 사람들과 죄인들도 처음부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마28:19; 9:1-3 참조). 가장 중요한 사본들에서는 아사(7절)와 아몬(10절) 대신에 아삽과 아모스가 나온다. 그렇지만 이 두 이름은 대상3:10,14와 어긋난다(왕상15:8 등; 왕하21:18 등도 참조). 이 두 사람을 예수님의 계보에 받아들였다면, 이는 <시편>(시50편; 73-83편의 아삽 참조)과 예언서<아모스>에서 예고한 바들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암시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2. 누가 는 눅3:21-22에서 예수님의 인격에 담긴 하나님의 비밀을 밝힌 뒤에 3:23-38의 계보를 통해서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시는 위치를 나타내려고 한다. 이 계보의 밑바닥에도 숫자 상징법이 깔려 있는데, 이번에는 숫자 7과 12의 뜻이 중요하다. 곧 이스라엘 및 인류의 역사를 모두 77(7세대씩 11부분)세대로 만들어서 그 근원이신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부분, 곧 열두 번째 부분의 첫머리에 둠으로써 예수님에게서 인류 역사가 완성되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 실제로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에 근거해서 확정되어 있고(롬1:3 참조),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한다는 사실, 곧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예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이 세 가지 고정된 점을 빼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는 세부적으로 엄청나게 서로 달라, 오늘까지 이를 설득력 있게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어느 것이 바른지를 입증할 수 없다 하더라도 두 계보는 예수님의 구원이 뜻하는 바를 각각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구원의 의미에 대한 신앙 고백은 믿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두 계보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이런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중요했으리라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관련용어 : 예수, 이름
예수님의 무덤
예루살렘 둘레에서 발견된, 바위에 파놓은 여러 굴 무덤이 무거운 맷돌처럼 굴릴 수 있는 돌로 입구를 막았던 예수님의 무덤일 것으로 추측해 왔다(막15:46; 16:3. 요11:38-39도 참조). 안에는 벽을 파서 돌 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죽은 자들을 뉘어놓았다. 돌 침대를 다시 쓸 때는(보통 그랬다. 그렇지만 마27:60; 눅23:53; 요19:41 참조), 완전히 부서져버린 뼈들을 거두어 묘지에 붙어 있는 구덩이에 던지거나 따로 준비해 둔 그릇(납골통)에 모아둔다. 요11:44에 따르면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의 '수족을 베로 동여' 놓았다. 요19:40에 따르면 예수님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또 유대 풍습에 맞게 한 듯하다. 이로써 죽은 자들을 일부러 '묶어두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 풍습에 대한 자료는 유대교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관련용어 : 예수, 이름
요나(의 표적)
구약 성경 <요나>에는 다시스로 달아나던 예언자가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고 마침내 물고기가 그를 뭍에 토해 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는 마16:4; 눅11:30에서 자신이 죽음에서 놀랍게 건지심을 받을 자이며 심판을 내리실 자이시라는 두 가지 점에서 스스로를 요나에 견주셨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심판을 선포하는 자로 니느웨에 갔듯이, 예수께서도 죽음에서 다시 사신 자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것이다. 마12:39-40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이 무덤에서 쉬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반대자들이 바라던 뜻의 '표적'으로 제시하시지 않고, 그들에게는 심판을 뜻하는 사건들의 서막으로 제시하셨다. 관련용어 : 욥바
우상의 제물
이방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고기. 이방 종교의식에서 먹던 온갖 고기와 시장에서 파는 고기(제물로 바친 짐승의 고기 가운데 남은 것은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에)가 이에 속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종교의식의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지만 우상의 제물을 시장에서 샀거나 개인 집에서 초대를 받았을 때 차려놓았으면 먹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불안해 하는 신자(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을 고려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기꺼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고전8장해설 참조). 관련용어 : 우상 (숭배)
'의'라는 개념이 보통 형식적인 법 규범을 지키는 것을 겨냥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늘 두 인격체 서로 사이의 '의로운' 관계를 문제 삼는다. 이러한 관계의 - 사람과 사람 사이이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이든 - 이상적인 형태에 상응하게 처신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는 서로 사이의 언약* 관계에 근거하는데,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지키시고 보존하실 의무를 지시고, 백성은 감사 드리는 마음과 성실함으로써 늘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에게서만 삶과 구원을 기대하며 제물*과 기도로 하나님만 섬기며 율법*의 여러 계명에 선포된 대로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평생 좇을 의무를 진다. 이리하여 하나님 쪽의 '의'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성실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시7:17; 22:31; 111:3; 단9:16), 약속 말씀을 지키신다는 것(시11:7; 사45:19), 자기 백성을 위해 개입하셔서 그들을 건지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삿5:11; 사41:10; 45:8; 51:6)과 그 결과로 평화와 번영과 행복과 복을 주신다는 것이고(시48:10; 사48:18; 61:11; 호10:12), 사람 쪽의 '의'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신9:4; 사1:21['의리']) 선하고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다(욥35:8; 겔3:20; 엡6:14; 빌1:11).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에 대해서는 '의로운*'의 마지막 단락과 롬1:16-17; 3:21,26 해설을 보라. 관련용어 : 언약, 의로운
의로운, 의인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윤리 감정에 일치하도록 처신하면,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 뜻하는 '의로움'에 부분적으로 상응할 따름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신 율법*에 맞추어 사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시1편; 37편).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 마태도 이와 비슷한 뜻으로 이 낱말을 쓰면서,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율법'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교회에서 받아들여 전해 내려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난다고 한다(마5-7장의 산상수훈에서 계명들을 철저하게 풀이하신 것 참조. 특히 5:20). 그렇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특히 바울의 경우에는 이와 나란히 '의로움'에 대한 또 다른 뜻, 신약 성경에만 있는 뜻을 찾아볼 수 있다. 곧 사람이 선을 위해 제 아무리 힘쓴다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으므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하나님이 사람의 순종으로 인정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죄(하나님에 대한 반역, 하나님 대신 스스로 결정해 보려는 교만한 욕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 내린 줄 인정하고 예수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롬3:19-28). 그런 다음에 이렇게 선사받은 의를 통해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롬6:12-23). 관련용어 :
이스라엘의 절기
이스라엘의 연중 삼대 명절(출23:14-17)은 본디 추수와 관련된 절기였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행하신 바들을 기억하는 것과 결부되었다. 곧 보리 걷이를 시작할 때 출애굽을 기억하면서 (무교절과 아울러) 유월절* 을 지켰고(출12-13장; 민28:16-25), 그로부터 칠 주 뒤에 밀 걷이를 마무리할 때 율법 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칠칠절(오순절* )을 지켰으며(레23:15-21; 민28:26), 가을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호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과일 및 포도 걷이의 명절(초막절* )을 지켰다(레23:34-36,39-43). 게다가 7월1일의 설날(레23:34-35; 민29:1-6)과 그 열흘 뒤의 대 속죄일* (레16장)이 있었는데, 속죄일에는 함께 잔치를 벌이지 않고 금식했다. 나중에 생긴 절기로는 부림절 (에3:7; 9:26-28)과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을 다시 봉헌한 사건을 기념하는 수전절 (1마카4:59)이 있었다. 신약 성경에서는 유월절(마26:2)과 오순절(행2:1)과 초막절(요7:2)과 수전절*(요10:22)과 속죄일(히9:7)이 언급되어 있다. 관련용어 :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수전절, 속죄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에스겔에서는(겔 2:1 설명을 보라) "선지자"가 자주 "인자"로 불리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늘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에 인자는 단 7:13-14의 환상에 근거하여, 최후의 심판 후에 하늘로부터 와서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리리라고 기대했던 인물이었다.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인자를 이미 심판과 용서의 권세를 가졌으나(막 2:10; 요 5:27)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릴 사람(막 10:45)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들 본문에서는, 만일 전부가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 인자라는 칭호는 신약의 다른 곳(행 7:56; 또한 계 1:13; 14:14를 보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 말이 그리스어를 쓰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재의 장막(성막, 회막)
또는 "여호와의 임재의 장막,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막, 주께서 임재하시는 장막". "장막"을 보라.
장로들의 유전
'바리새인*'을 보라.
정의
'의*'를 보라.
제의적으로 정결하다/ 제의적인 정결(성결)
모세의 "율법"은 예배나 절기 행사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행하는 사람들은 제의적으로 "정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 11:15; 신 23:10에서 언급하고 있다. 또한 "악령"을 보라.
주의 길/ 주의 도
구약에서 "주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의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다(창 18:19; 왕상 3:14; 시 95:10; 사 58:2; 슥 3:7; 말 2:8-9). 신약에서는, 기독교 운동에 대한 표현, 예수 신앙으로 보이는 삶의 원리 등을 나타낸다(행 18:25-26; 19:9,23; 22:4; 24:14,22).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을 보라.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을 보라.
죽은 자들의 나라
'음부*'를 보라.
죽은 자의 세계/ 죽음의 세계
"스올"을 보라.
증거막/ 증거의 성막/ 증거의 장막
"주의 임재의 성막". "장막"을 보라.
진노의 잔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사람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는 심판의 잔(렘25:15-17의 '진노의 잔'. 같은 히브리어 표현을 사51:17,22에서는 '분노의 잔'으로 옮겼다)인데, 이 잔을 받아 마시는 자들은 술취한 자들처럼 비틀거리게 된다(시60:3; 슥12:2). 관련용어 : , 복수, 진노
피의 보수[복수](자)
이에 관한 중요 구절은 창9:5; 민35:12('보수할 자'); 신19:69('보수자'); 삼하14:11('원수갚는 자')이다. 아주 오래된 법 감정에 따르면 벌어진 살인에 대해서는 그 죗값을 치러야 했다('피*'). 공식적인 재판이 있기에 앞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책임은 씨족에게 있었다. 살해된 사람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피의 복수자')에게는 살인범 아니면 살인범 대신 그가 속한 씨족의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을 죽일 의무가 있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이 씨족의 복수가 명백히 남용되는 경우를 막으려고 애썼다(출21:23-25의 '도피성*'). 더 나아가서 신약 성경에서는 복수를 원칙적으로 포기하게 한다(마5:38-39; 롬12:19-21). 관련용어 : , , 복수, 도피성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칭호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가르쳐 주신 이름(출 3:14 설명).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발음)를 피하고, 성경을 읽을 때에 "주"를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아도나이)로 대신하여 불렀다. 우리말의 "하나님"은 어원적으로 "하늘"에서 왔으며, "하나"에서 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궤
"언약궤"를 보라.
하나님의 나라
어떤 다른 세계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이 낱말은 그 말이 쓰이는 문맥에 따라서, 그것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인지, 예수 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오고 있는 그의 통치를 가리키는지, 혹은 그의 통치가 장래에 성취되는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어떤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는 다른 저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하늘 나라"(개역:천국)라는 말을 선호한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 이스라엘과 또 모든 민족들 위에 - '임금'이시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때부터 하던 신앙 고백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셔서(출15:18) 광야를 거치도록 이끄시고 가나안 땅 곧 여러 이방 민족의 나라(시44:1-5)들을 그들의 소유로 주심으로써 자신의 이 왕권을 근본적으로 드러내 보이셨다. 또한 여기서 단번에 드러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강하시며(시29편; 82편; 89:6-7; 95:3; 96:4-5) 온 피조 세계의 주님(시74:12-17; 89:8-12)이시라는 사실이다(출15장; 시95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적들에게서 지켜주시고(시44:4-8; 48편; 68:24-35; 145편; 146편) 땅의 열매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시72:15; 132:13-16; 145:15-16)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법과 의가 이스라엘에 통하게 하심으로써(민23:21-24; 신33:2-5; 시99:1-4) 하나님의 왕권을 계속해서 또 늘 새롭게 드러내 보이신다. 하나님의 왕권이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곳이 또한 이스라엘이긴 하지만(출19:3-6), 이 왕권은 온 누리를 위한 것이고 언젠가는 온 누리에 드러날 것이다(시47편; 96-99편; 103:19-22). 하나님의 왕권은 아주 현실적이고 지상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우선 이스라엘에서 다른 민족들을 본떠 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삿8:23; 삼하8장)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그 뒤에 이런 사람(과 그의 왕조)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과 세상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통치의 대리인이자 실행 기관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삼하7:14-16; 대상28:5; 29:23; 대하9:8; 13:8; 시2편; 72편; 89:15-37; 110편; 132:11-18). 세계 정치 상황 때문에 또 이스라엘 및 유다 임금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임금으로서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이 두 나라에서 다 점점 더 의심스럽게 되거나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뒤이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친 하나님의 심판(이스라엘 및 유다 두 나라의 멸망,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감, 유다가 세계적인 제국 바사와 헬라에 병합됨)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이 언젠가는 몸소 개입하셔서 자신이 자기 백성의 임금이자 모든 민족들의 주이신 것을 다시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리라는 열망도 백성 가운데서 더욱더 강해졌고 그에 대한 예언자들의 약속 말씀들도 더욱더 분명해졌다. 이런 여러 가지 희망과 약속 말씀은 이스라엘의 여러 오랜 전통과 제도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들의 갱신과 완성을 내다보게 하는데, 이는 온 누리를 포함하고 변화시킬 갱신이요 완성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출애굽에 상응하는 새 '출애굽'을 기대했고(사35:1-10; 40:1-11; 52:11-12),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사2:1-5; 25:6-8; 52:7-10; 60편; 66:5-24; 겔40-44장; 미4:6-8; 슥2:14-17), 무엇보다도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타나심으로써 다윗 왕권이 마지막 때에 새로워지고 완전해질 것을 기대했다(사9:2-7; 11:1-10; 렘23:1-6; 겔34장; 37:15-28; 암9:11-12; 미5:2; 슥9:9-12). 그렇지만 이런 희망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있었던 '모형들'을 바라보는데 벗어날 수도 있어서, 초기 유대교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하늘로부터 인류 전체를 위해 개입하셔서 이 세상 및 세대를 끝장내시고 아주 새로운 세상 및 세대를 이끌어 들이실 것을 기대했다(를 보라). 이런 희망의 개념에서는 인자*라는 인물이 표준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두 가지, 미래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이 - 이스라엘의 위대한 과거를 지향하고 민족적 정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메시야*가 오실 것에 기대를 거는 희망과 묵시문학적인 희망이 - 나란히 존재했고 또한 이런저런 혼합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일이 닥쳤다고 선포하셨다면(막1:15), 이는 분명히 묵시 문학적인 뜻을 띠는 것이지, 민족적인 기대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이 오해의 여지가 적은데, 왜냐하면 '나라'라 하면 경계가 있는 영토나 국가 비슷한 기관이나 통치 형태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너무 정적으로 이해되고 너무 쉽게 저 세상 나라, 곧 하늘에 있는 실체로 생각하게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 하지 않고 한결같이 '하늘 나라'라고 하지만, 그 때 '하늘'이란 이런 흐름 가운데서 하나님이나 하나님 이름 대신 그저 경외하는 뜻으로 둘러서 표현하는 말일 따름이다.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심에 대해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의 특징은 그 다스리심이 아주 가까웠다는 데 있다. 묵시문학적인 기대에서 뜻하는 그런 다스리심이 곧 동터 오르리라는 사실이 예수님께는 확실했다(막1:15; 눅10:9,11; 막9:1; 13:30. 그렇지만 막13:32-37 참조). 그렇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이렇게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더 이상 장래의 일로만 여겨 기다리시지 않고, 이미 벌써 - 예수님 자신의 말과 행위 가운데, 존재 가운데, 인격 가운데 - 시작되고 있다고 보신 사실이다(눅11:20; 마11:1-6; 13:44-46).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바, 선사하시고 요구하시는 바를 철저히 진지하게 들음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느냐 하는 데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었다. 예수님 안에서 인자*가 이미 나타나셨다. 따라서 이 세상의 끝이 정확히 언제냐를 물을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은 예수님 안에서 -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데도 - 이미 끝에 이르렀다! 이 끝 - 또 새 세상의 시작 - 또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게 나타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이 시점을 열망하고 간구해도 괜찮지만(눅11:2; 17:22; 21:28), 그 시점을 계산하면서 내다 본다면, 결정적인 것 곧 예수님 안에서 이미 현재가 된 바(눅17:20-21)와 또 '벌써, 그러나 아직은 아닌' 이 때를 위해 하도록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맡겨진 바(눅19:11-27; 행1:6-8)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잊어버리고 놓친다는 혐의를 받거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현재와 미래가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이른바 '대조의 비유'들에서 알 수 있다(막4:3-9,26-29,30-32; 마13:33). 첫 세 (공관)복음서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선포에서 표준적인 역할을 한다.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가운데서 - 허락된 구원과 그 구원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관점과 결과를 이해하고 선포하는 문제를 주로 다루므로,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다른 중요한 개념들의 배후로 물러서게 된다(그렇지만 요3:3,5; 18:36; 행1:3,6; 14:22; 28:23,31; 롬14:17; 고전4:20; 6:9-10; 15:24-28,50; 갈5:21; 엡5:5; 살전2:12; 딤후4:1,18; 히12:28; 약2:5; 벧후1:11; 계1:9; 11:15; 12:10 참조). 관련용어 :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하나님의 산
헬라 사람들이 올림포스 산에 자기들의 신들이 산다고 생각했듯이, 옛 중동에는 '북쪽에' 신들의 산이 있다는 사상이 있었다(겔28:14 참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이 정말 하나님의 산이라고 함으로써(시48:2) 자기들의 하나님이 우월하다는 신앙을 표현했다. 관련용어 :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호 11:1), 이스라엘의 왕들(특히 그들의 대관식에서, 시 2:7), "천사"(욥 38:7), 외경 지혜 2:18에서의 의로운 사람들에게 이 칭호를 썼다. 신약에서는 예수에 관하여 그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하게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다(예컨대, 막 1:1; 요 1:34; 롬 1:4). 예수는 또한 같은 의미로 "아들"이라고도 불리었다(마 11:27; 요 3:18; 고전 15:28; 히 7:28). 이 칭호는 육체적인 출생의 의미를 함축하지 않는다. 마 2:15에 인용되어 예수를 가리킨 호 11:1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 출 4:22-23에서도 이스라엘을 가리켰다.
하나님의 아들
출4:22-23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지만, 특히 이스라엘 임금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겼다(삼하7:14 참조). 시2:7에 따르면 이스라엘 임금은 즉위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었다. 곧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벌써 유대교에서 마지막 때에 오실 것으로 기다리던 임금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원시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에 따르면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시2:7에서 뜻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롬1:3-4; 행13:33). 갈4:4; 골1:13-18; 요1:14; 히1:2-3 같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깊고 더 포괄적인 뜻을 지닌다. 이 칭호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여러 가지 진술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또한 그것들을 훨씬 넘어선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이 아주 독특하게 친밀한 사이인 것을 느끼고 계셨고(마5:21-22,27-28 등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참조) 하나님을 '아바*'(='아버님!')라고 부르셨다(막14:36). 이렇게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는 것은 그 당시 유대 전통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이 부름말은 그리스도교회에서 하나님 및 예수님의 영을 힘입어 드리는 기도의 특징이 된다(롬8:15; 갈4:6). 예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나 '내 아들'. 이를테면 마16:16; 막1:1,11; 롬1:3-4)이란 칭호와 나란히 '아들' 또는 '독생자*'(특히 요한에게서)라는 칭호도 쓰인다. 첫 경우가 메시야* 사상에서 비롯되고 삼하7:14; 시2:7에 이어지는 것과는 달리, 둘째 경우는 인자* 사상 및 인격적으로 선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하나님의 지혜 사상과 관련된다. 둘째 칭호는 인자이시자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존엄성을 똑똑히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 두 사상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 내용이 한데 어우러진 경우가 많다. 관련용어 : 여호와, 인자,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아들들
히브리 말에서 '아들'은 혈연 관계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일반적으로는 종속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잠2:1; 3:1. 막2:5 참조). 욥1:6에서는 궁정의 신하들이 임금에게 속하듯이 하나님 둘레에 있는 하늘 존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 종교사적으로 보면 이런 사상은 이스라엘 주변의 가나안 세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종교의식의 대상이 되는 법은 절대로 없었다. 시82:4 다음 해설도 보라. 관련용어 : 여호와, 인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
'성령*'을 보라. 관련용어 :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이름*'을 보라. 관련용어 : 여호와
하나님의 종
'종*'을 보라. 관련용어 : 여호와
하나님의 판결
유죄나 무죄를 입증해 줄 증인을 하나도 찾을 수 없을 경우에 피의자는 '하나님 앞에 가야' 했다(출22:8-11에서 '재판장'으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본디 '하나님'을 뜻한다). 곧 성소에 들어가서 거기서 자기는 결백하다는 맹세를 하되 아마도 자기가 거짓으로 맹세했을 경우에는 저주*를 받겠다는 형식으로 했을 것이다(왕상8:31-32). 하나님의 판결의 다른 형식은 어려운 문제들을 우림과 둠밈*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여자가 간음했다는 의심을 받는 경우에 대해서는 특별한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민5:11-31). 관련용어 : 여호와, , 우림과 둠밈
해산의 고통
마지막 때에 대한 '묵시 문학적인' 기대의 틀 안에서(를 보라) 임산부에게 덮치는 해산의 고통은 최종적인 구원의 때가 닥치기 전에 현재의 세상과 그 질서 및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심하게 흔들리게 되리라는 기대를 표현한다. 진통의 과정을 거쳐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이런 흔들림을 거쳐서 구원의 시대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막13:8병. 이미 사26:17; 66:7-8; 호13:13-14; 미4:9-10 참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서쪽과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기드론 골짜기와 만난다. 요시야 임금(주전 639-609년)이 개혁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는 장소가 거기에 있었다. 요시야가 이를 무너뜨리고 더럽힌 뒤에(왕하23:10) 힌놈의 골짜기는 외국인들의 묘지와 쓰레기 하치장으로 쓰였다. 힌놈의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표현 '게힌놈'이나 이에서 비롯된 헬라 말 '게헨나'라는 형식으로 이 골짜기의 이름은 지옥*의 대명사가 되었다. 관련용어 : 지옥
힌놈의 아들
'힌놈의 골짜기*'를 보라.
은 < 독일성서공회판 해설성경전서 >
는 < 굿뉴스 스터디 바이블 > 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