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의 능력으로서, 특별히 "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다. 인간의 영은, 특별히 그의 연약함과 하나님을 의존하는 데 있어 인간의 존재 전체를 가리켰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 있어서 "영"과 "바람"은 같은 낱말로 쓰인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주어졌고, 더 개인적인 어휘로 이해되었다.
악령을 보라.
<개역한글판> 성경에서 '영혼', '혼', '생명'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는 히브리 낱말 '네페쉬'는 그 뜻의 폭이 아주 넓다. 이 낱말의 기본적인 뜻은 생명의 요체이자 표현인 '숨', 곧 '생명의 숨결'이다(이리하여
왕상17:21-22의 '혼'은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페쉬'는 어떤 생물을 산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어서 이 존재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창1:20,
24의 '생물'은 '살아 있는 네페쉬', 곧 '산 존재'라는 뜻인 반면, 사람에게 대해서는 - 사람의 경우에만 -
창2:7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몸소 직접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살아 있는 네페쉬'가 되었다고 한다). '생명'('네페쉬')의 자리는 피에 있고 또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사람은 생물의 피를 제 것으로 삼을 수 없으며(
창9:4;
레17:11,
14;
신12:23) 다른 사람의 피를 거리낌없이 흘려서도 안된다(
시72:13;
94:21;
잠1:16,
18). 사람 안의 '네페쉬'는 목숨을 유지하고 강화하기를 갈망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며('네페쉬'를
민11:6;
시107:9;
사32:6에서는 각각 '정력', '영혼', '심령'으로 번역했다), 열망하고 바라고 사랑하며(
신6:5;
12:20;
14:26;
삼하3:21;
잠13:19;
아1:7;
3:1-4의 '마음',
신30:6의 '성품'), 쓰라림과 괴로움을 알며(
사38:15,
17;
욥27:2의 '영혼'과
삼상1:10;
22:2;
겔27:31의 '마음'), 수고하고(
사53:11의 '영혼') 고통당하고(
시88:3의 '영혼'과
시123:4의 '심령') 낙심하며(
시107:26;
욘2:7의 '영혼'과
신28:65의 '마음') 쇠약해진다(
시107:5의 '영혼'). 사람의 '영혼'('네페쉬')은 자기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신을 소유하며 자신에게 책임지는 삶을 의식하므로 그 사람 자체이다. 그리하여 '내 영혼'이란 표현은 가장 내면적인 자아 곧 '나'를 뜻한다(
시25:1;
34:2;
35:9;
62:1;
86:4;
130:5-6;
143:8). 사람은 자신의 '영혼'과 말하는 형식으로 독백하기도 하고 자신의 '영혼'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시103:1-22;
104:1,
35;
146:1;
눅12:19). 사람의 '영혼'은 생명의 근원이시자 생명이 넘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시23:3;
42:1-2;
63:1,
8;
119:81;
143:6.
시119:20의 '마음'='네페쉬'. 또
시84:2;
94:19;
138:3 참조), 하나님이 '영혼'을 구속 또는 구원하셨다고 할 때, 언제나 그 '네페쉬'는 해당되는 사람의 생명, 곧 그 사람 자체, 그 사람 전체를 뜻한다(
시22:20;
35:17;
69:18;
71:23;
116:7-9). 구약 성경에서는 '영혼'('네페쉬')이라는 낱말로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남는 불멸의 생명력을 가리키는 적이 없다. '네페쉬'를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 역본)에서는 '프쉬케'로 옮겼다. 그 기본적인 뜻도 '숨', '생명의 숨결'이지만, 헬라 로마 시대의 철학적인 언어에서 이 낱말은 사람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알맹이, 곧 죽을 몸과는 달리 '죽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서적인 영역에서는, 특히 신약 성경에서 이런 뜻은 적용되지 않고, 구약 성경의 '네페쉬'가 지니는 총체적인 뜻이 여기서도 표준적인 역할을 한다. '프쉬케'는 생명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과 만날 때 이 생명 전체가 늘 문제가 되었고, 이 생명은 심판받을 때 마지막을 맞이하든지 아니면 심판을 넘어서서 구원받든지 할 것이다('프쉬케'를
막8:35-37에서는 '목숨'으로,
마10:28에서는 '영혼'으로 번역했다. 그 두 곳의 해설을 보라). 죽은 뒤에 누릴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은 변화된 새로운 몸으로 사는 생명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영혼이 몸에서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에 놀라움을 누르지 못하면서 이를 거부한다(
고후5:1-5). 사람을 영혼과 몸의 둘로 나누는 경우는 구약 외경 <지혜서>에서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인데(이를테면
지혜8:19-20;
9:15;
14:26.
1:4;
14:11의 '마음'='프쉬케'), 거기서도 몸을 낮게 보고 영혼이 저절로 죽지 않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신약 성경에서는
살전5:23에서만 통상의 이분법을 이끌어 쓰지만, 이것도 논쟁을 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곧 몸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