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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전쟁
옛 이스라엘에서 땅을 점령하여 지키는 일은 민족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일차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군대를 이끄셨으므로, 사람들은 전쟁을 하나님의 일로 여겼고 그런 만큼 거룩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출14:14; 17:16; 수5:13-15). 그리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것이 예배와 종교의식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엄격한 규율에 따라야 했는데, 예배에 참여할 때처럼 정결해야 했다(신23:9-14; 삼상21:4-5. '정결한*'). 그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고(삼상7:9) 보통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것(삿20:23,27-28)도 전쟁 준비에 속했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행동하시는 분이시므로(수10:4; 삿4:14) 병력의 규모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삿7:2,7). 하나님은 두려움이 적들을 덮치게 하심으로써(수2:9; 10:10. '하나님이 두렵게 하심*') 전세를 뒤집으신다. 마침내 모든 노획물은 정당한 승리자이신 하나님께 넘겨드려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진멸*'이라고 한다.
성전
솔로몬 시대로부터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파괴될 때까지 이스라엘에 있어서 예배의 중심이 되었던 장소. 솔로몬의 성전에 대해서는 왕상 6-7장; 대하 2-4장에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는 귀중한 성물들을 다 옮겨간 후에 이 성전을 파괴하였다(왕하 25:8-17). 겔 40-46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후 회복된 국가를 위한 이상적인 성전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두 번째 성전은 주전 520년과 515년 사이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 아래 건축되었다. 이 성전도 또한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 4세(주전 175년에서 164년까지 통치) 때에 그리스인들에게 도둑 맞고 파괴되었다. 그 후 성전은 헤롯 대왕 통치 기간(주전 37년-주후 4년)에 큰 규모로 완전히 재건되었다.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 벌써 회막*이 그러했듯이 - 회중*이 모이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었다(출26:1; 40:34; 민17:13; 수22:19에서 '성막'으로 옮긴 히브리 낱말이 바로 이를 뜻한다. 왕상8:13의 '거하실 처소'와 대하36:15의 '거하시는 곳'도 참조). '여호와의 집'(삼상1:7; 시23:6: 렘26:9. 같은 히브리어 표현을 출23:19; 왕상3:1; 왕하22:8에서는 '여호와의 전'이라고 옮겼다)이라는 칭호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사실을 뜻한다. 솔로몬 성전은 가나안 신전들에 상응하는 식으로 현관과 성소와 지성소의 세 부분으로 된 길쭉한 건물이었다. 현관은 길이가 한 5미터요 넓이가 10미터인데, 그 출입구 양쪽에는 놋기둥 두 개가 서 있었다. '성소'는 길이가 20미터이고 넓이가 10미터이며 높이가 15미터였다. 성소 안에는 금을 입힌 분향단과 하나님께 드리는 떡을 차려놓은 상과 다섯 개씩 된 등잔이 두 줄 있었다(이와 거의 같은 출40장의 성막 묘사 참조). '지성소'는 한 변이 10미터인 정육면체의 공간이었는데, 거기에는 창문이 없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밖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었다. 성전을 둘러싸는 뜰이 둘 있었다. 하나는 큰 번제단이 놓인 안뜰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뜰인데, 바깥뜰의 담은 성전 남쪽으로 놓인 왕궁도 같이 둘러싸고 있었다. 첫 성전은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에게 파괴되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다 사람들은 성전을 옛날 자리에 이전의 기초 위에 다시 지어 소박하게 꾸몄다(주전 515년에 성전을 봉헌했다).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새 건물로 대체했지만 '성소'와 '지성소'의 기본 규격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안뜰은 다시 나누고(제사장의 안뜰, 남자들의 뜰, 여자들의 뜰), 바깥뜰은 엄청나게 넓혀서 웅장한 기둥들과 지붕으로만 된 방들로 둘러싸이게 했다. 바깥뜰은 누구든지, 그래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었고, 당시 헬라 성읍들의 아고라(공공의 모임이 열리는 광장)나 로마 성읍들의 포룸과 같은 기능을 예루살렘에서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 넓은 광장의 한 쪽에 제한된 구역에 돈 바꾸는 사람들 및 제물로 드릴 짐승들을 파는 장사꾼들의 판매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막11:15병).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찢어진 성소 휘장(막15:38병)은 '지성소' 앞의 휘장인 듯하다(출26:31-33 참조). 이 징조는 막15:29; 14:58; 13:2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성전이 무너질 것을 뜻한다. 이 성전은 -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리하여 하나님께 한 모든 짓으로 보면 - 더 이상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까이 계시는 곳이어서 백성이 예배 드리고 속죄를 경험하는 장소일 수가 없고 장소이어서도 안 된다. 앞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만이 그런 '장소'가 되실 것이다(막14:58; 요2:21 참조).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파괴되고 더 이상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관련용어 : 회막, 레위 사람, 제사, 제사장, 대제사장, 언약궤, 성전 문지기, 성전 예언자, 이스라엘의 절기
성전 문지기
성전의 일반 봉사자들인 '문지기'(문자적으로는 '문들을 위한 자', 대상26:1-19)들과는 달리 왕하25:18에 나오는 세 사람의 '전 문지기'(문자적으로는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는 고위 제사장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가장 지위가 높은 두 제사장(대제사장과 부제사장) 바로 다음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이 성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종교의식상으로 정결한*지를 성전 입구에서 검사해야 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밖에는 성전세 바치는 일을 감독해야 했던 것 같다. 관련용어 : 성전, 정결한, 부정한
성전 예언자
하나님이 자유롭게 부르셔서 개별적으로 활동하게 하신 예언자들과는 별도로 한 성소에서 활동하는 예언자들이 이미 일찍부터 있었는데, 성소를 찾는 사람들은 이 예언자들에게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암7:14 해설과 참조). 관련용어 : 예언자, 여선지
성전고
이는 성전의 보물 창고를 가리키는데(마27:6) 여인들의 뜰에 있었다. 이 창고에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헌금함이 있어서 여러 가지 목적의 헌금을 거기 넣을 수 있었다(막12:41병). 관련용어 : 성전
속전(속량)
'속죄*'를 보라. 관련용어 : 속죄일, 속죄제, 제사
수리아 에브라임 전쟁
디글랏빌레셀 3세가 즉위함으로써(주전 745년) 앗수르의 팽창 정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복 지역에서는 앗수르의 국가 신을 신들 가운데 첫째로 섬겨야 했고, 정치 및 문화를 이끌어 가던 상류층은 이주당했고 낯선 상류층이 이들을 대신했다. 이러한 위협에 부닥쳐서 수리아 팔레스티나 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공동으로 앗수르에 맞서려고 했다. 이 반 앗수르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나라가 수리아와 북 이스라엘(에브라임)이었다. 유다의 아하스 임금은 동맹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동맹을 맺은 다메섹의 르신 임금과 사마리아의 베가는 주전 733년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아하스를 몰아내고 자기들이 믿을 만한 사람을 새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다. 아하스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해 준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을 신뢰하지 않고 앗수르 임금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에게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 정책으로 아하스가 바라던 대로 되어 동맹군은 예루살렘에서 물러갔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정책은 치명적이었다. 곧 디글랏빌레셀이 그 해에 갈릴리와 요단 동쪽 땅을 북 이스라엘에게서 분리시키고 주전 732년에 온 수리아를 앗수르의 지방 영토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 유다는 앗수르의 봉신 국가가 되어 앗수르의 국가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왕하16:10-18).
수전절
유대인들이, 주전 165년에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 이 절기는 기슬르월 제25일(12월 10일, 히브리 달력 도표를 보라)에 시작되어 8일 간 계속된다. 이 절기를 이르는 히브리어는 "하누카"이다.술법""을 보라.
수전절
수전절(요10:22)은 주전 165년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을 다시 봉헌한 사건을 기념하여 해마다 8일 동안 지키는 절기이다(1마카4:59; 2마카1:9 참조). 관련용어 : 이스라엘의 절기
신전 창기[남창]
옛 중동의 다산 종교의식*에서는 신 숭배와 관련된 행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에도 때때로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 성전에서 행음하는 일이 있었다. 신23:17-18에서는 신전 창기('창기', 문자적으로는 '거룩한 여자')와 신전 남창('미동', 문자적으로는 '거룩한 남자')을 따로 똑똑히 언급하고 있는 반면, 다른 여러 곳에서는 성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이런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왕상14:24; 15:12; 22:46의 '남색하는 자'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자'를 뜻한다). 몇몇 임금들과 예언자들은 이런 폐해를 없애려고 애썼다(왕하23:7의 '미동'='거룩한 자'). 관련용어 : 다산 종교(의식), 바알
여호와의 전쟁
'거룩한 전쟁*'을 보라.
온전하다
"신실하다"를 보라.
장로들의 유전
'바리새인*'을 보라.
"성전"을 보라.
전갈
8개의 다리와 긴 꼬리를 가지고, 독 바늘로 사람을 쏘는 작은 동물. 그것은 심한 고통을 주며, 어떤 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이것은 때로는 파괴적인 인물이나(겔 2:6) 초자연적인 존재에(계 9:3,5,10)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전갈
전갈(신8:15; 겔2:6; 눅10:19; 11:12)은 거미류에 속하며 긴 침으로써 쏘아 아프게 할 수 있다. 왕상12:11,14; 대상10:11,14에서는 전갈이 가시가 달린 채찍을 상징한다.
전기 예언서
"예언서 개론"과 "선지자"를 보라.
전능자
구약 성경에서 48번, 그 가운데 <욥기>에서 31번 하나님의 이름으로 쓰이지만 그 뜻이 아주 분명하지는 않은 히브리어 낱말 '샷다이'를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그리스어 번역본의 전통을 따라 '전능자'(또는 '전능한', '전능하신', '전능의', '전능하신 이')로 옮겼다. 이런 번역은 <욥기>의 흐름에 잘 어울린다. 그 앞에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 말 '엘'을 붙이기도 한다. 그럴 경우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또는 전능한, 전능의) 하나님'으로 번역된다. 창17:1; 출6:3 해설 참조. 관련용어 : 여호와, 이름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이름"을 보라.
전도자
'전도자'(행21:8), 전도인(딤후4:5), '복음 전하는 자'(엡4:11)로 번역하는 헬라 낱말은 본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 '승리를 알리는 심부름꾼'을 뜻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심부름꾼들이 시68:11('소식을 공포하는 여자'); 사40:9('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41:27('기쁜 소식을 전할 자')에 나온다. 가장 중요한 구절은 사52:7인데, 거기에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시온 산 위에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나님 나라*')라고 외치면서 구원과 평화를 선포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낱말이 세 번만 쓰일 따름인데(행21:8; 엡4:11; 딤후4:5) 하나님에게 받은 특별한 재능과 결부된 교회 안의 한 직책을 가리킨다. 전도자의 임무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을 전해 믿음을 일깨우는 것이다(행8:4-40에서 묘사하는 빌립의 활동 참조). 고대 교회에 이르러서야 이 개념이 특별히 사 복음서 기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관련용어 : 복음, 하나님의 나라
전심
"마음"을 보라.
전쟁
이 말은 "칼, 공격하다, 치다, 싸우다, 다투다"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전쟁은 구약 시대에 고대 근동 사람들 사이에서 일상적인 사건이었다(삼하 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것이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그 땅에 대해서 위협하는 대적은 바로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생각하였다(삿 5:31; 삼상 30: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든지(삼상 23:4; 왕하 3:18) 혹은 다투지 말든지(신 2:5) 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는 무사처럼 생각되고(출 15:3; 시 24:8; 사 42:13; 암 2:9), 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한 도구로 전쟁을 사용하는 것으로(사 5:26-30; 렘 5:15-17), 또는 다른 민족을 훈련하는 것으로(사 13장; 렘 46:1-10)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구약 선지자들은 전쟁의 염오(厭惡)를 말하고 영원한 "평화" 시대를 대망한다(사 2:1-5). 신약에서 전쟁이란 말은 단지 은유적으로 사용되거나(엡 6:11-17), 혹은 마지막 때의 전쟁으로 기술되고 있다(계 20:7-10).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땅이나 상속으로 가늠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거룩한 전쟁*'을 보라.
전제
'제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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