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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한국의 마케도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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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8-11-23 16:06 조회1,7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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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개신교)복음이 들어오던 1870~80년대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변동기에 겪어야 할 혼돈과 창조의 시대였다.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내적인 개혁과 외적인 개방을 요구하는 신진세력과 기존 가치 체제와 사회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 세력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빚어질 것은 자명했다.

<‘조선에서 가장 귀한 책’>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대원군을 중심한 수구세력과 명성황후를 중심한 진보 세력의 무력 충돌로 발전된 이 사건 와중에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데 공험한 이수정이란 양반이 있었다. 그는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처음 목적은 농학과 법률, 우편, 해운 등 ‘개화된 문명’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882년 9월 일본에 도착한 직후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였던 츠다센을 만났다. 그런데 츠다센은 유럽 유학 중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농학사’를 설립, 운영하면서 일본 농업의 근대화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수정은 츠다센을 방문해 대화하는 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한문 족자에 눈길이 쏠렸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 팔복’ 말씀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동양의 고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츠다센은 이 호기심 많은 이방인에게 족자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읽을수록 그 책에 빨려 들었다.

그가 성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둘이 책을 한 보따리 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오.”
그리하여 ‘조선에 가장 귀한 책-성경’에 대한 외경스런 탐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도쿄로 게츠죠교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다.

이수정은 세례 받은 직후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권유와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그에게 지급되던 장학금을 중단하고 귀국을 종용하였고 가족도 나와서 “목숨이 위험하니 어서 빨리 ‘사교’(邪敎)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어떤 위협과 회유도 그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그는 성경 번역에 몰두하여 1884년, 한문 성경에 우리말 토(吐)를 단 형태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나왔고, 곧이어 마가복음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여 1885년 2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란 쪽복음이 인쇄되었다.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호소>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루미스와 매클레이, 녹스 등 자신을 돕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교회에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1883년 12월 13일에 쓴 편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 나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 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그의 편지도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성경을 번역한 것도 ‘민족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나와 선교하는 것이었다. 국내 분위기도 바뀌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 정보는 나라를 개방해서 외국과 교류하여 백성들의 처지를 개선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용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말라고 호소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배치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걱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나라 교사”는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66년 천주교인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만향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 전술이었다. 이수정은 이러한 ‘침략적 종교’가 지닌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근대화를 위한 개방과 개혁은 민족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수정은 우리 민족의 자기 개혁의 원리를 복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가르쳐 줄 선교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바는 지금 당장이라도 몇 명을 이곳 일본에 보내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협의하면서 사업 준비를 하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고 가장 안전하도고 적절한 방법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기를 간절하게 빌고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영문으로 번역된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같은 미국의 선교 잡지에 소개되었고 이 일로 이수정은 서방 기독교계에 ‘한국의 마케도니아인’(Macedonian of Korea)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시아의 서쪽 끝, 드로아에 머물고 있던 바울의 꿈속에 나타나 그로 하여금 유럽 선교의 길을 열게 만들었던 마케도니아인처럼(행 16:8~10), 아시아의 동쪽 끝 한국에서 건너온 이수정의 호소는 복음 선교의 물꼬를 한국 쪽으로 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편지가 서방에 전달된 1년 후 미국 교회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고 1885년 2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 한국 선교 개척단이 한국으로 가기 전 일본으로 들렀을 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한국 언어와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중 선발대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했을 때, 그들 짐 속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 마가복음이 들어 있었다. 어느 지역 개척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간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희귀한 경우였다.

출처 : 1999년 성서한국 가을 45권-3호,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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