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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성경과 한국 사회의 변화(試論) - 이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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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7-12-05 17:39 조회1,4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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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한글 번역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도록 하여 성경의 교훈과 사상을 체화하도록 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자기시대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시대와 사회에 대해 응답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

구한말 처음으로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기다리고 중요시했는가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얼마 안되었을 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crying need)”를 했다. 1898년경 성경 번역이 지지부진하자 평양에 사는 어떤 교우는 예수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이라고 전제한 후, 그 성경을 지방에 내려 보내주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린다”고 했고, 어느 서점 주인은 “신약전서를 전부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린다”고도 했다. 이렇게 성경 번역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국 초대기독교인들의 영적 갈급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당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의 경험이긴 하지만 해방 후 시골 교회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위인들의 행적을 듣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해방 후에 그랬다면 일제 강점하에서 구약에 나타난 위인들의 민족적인 사기를 읽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일제의 노예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블레셋을 상대로 한 삼손과,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면서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된 다니엘과 에스겔을 보면서 그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적 범죄가 갖는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엄숙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포로귀환의 때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적 시련 앞에서 응답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먼저 한말에는 국권수호 운동에 나섰던 뜻있는 젊은 야소교인들을 한국사에서 만난다. 이토오(伊藤博文)를 제거하려다가 자결의 길을 택했던 정재홍(鄭在洪)은 한말 교육자요 기독신자였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한국 외교부의 고문 자격을 가지고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본국에 가서 일제를 위한 공작을 꾀하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한국인 기독청년 장인환(張仁煥)에게 피살되었다. 천주교인 안중근(安重根)과 이토오를 포살하는 데에 동조한 우덕순(禹德淳)은 신앙적인 애국시를 남겼다. ‘야소교 동지’들과 함께 이완용ㆍ이용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명동 성당 앞에서 매국 총리대신 이완용 제거에 앞장선 이재명(李在明) 역시 기독청년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자기 시대와 민족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민족에 대한 응답적 삶은 더 광범하게 나타난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지도자들이 거사 참여에 앞서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서는 그들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신 민족을 위해서 순명(殉命)을 각오했던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관여한 이들이나 무장투쟁 혹은 의열운동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 이들 또한 성경과 기독교적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민족에 대해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자,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인만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신사참배에 저항, 많은 신자들이 투옥되고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를 냈다. 이러한 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의 범주에서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에 근거한, 선교사들의 표현을 빌면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노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뒷날 다시 한국을 찾아 몇 권의 저서를 남긴 매켄지(F. A. McKenzie)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투쟁의 원천이 성경에 있음을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크, 햄프던 및 조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어느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신문학 교수였던 최준이 “한글로서의 한국말 성경이 나타남으로써 한국의 국민대중들은 비로소 자아(自我)를 다시 찾게 되었고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립상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그가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계 신문이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을 폈고 자주 독립사상을 앙양했다는 지적과 함께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국 민족운동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저항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국권(독립)수호, 국권(독립)회복에 있었지만, 또 한 흐름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국 민족운동의 가장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만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기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의 도정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민주화의 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는 인민평등의 실현이다. 한국이 인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세봉건적인 혈통신분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유교적 봉건사회에서는 혈통에 의해 크게는 양천(良賤)으로 이분화했는가 하면 좁게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분법적 신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숙명적으로 주어진 혈통은 곧 신분제라는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이런 신분구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교육, 예의, 사상(安分) 및 법제적 측면에서 자신의 신분질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회적 장치를 공고히 했다. 혈통신분제는 숙명적이어서 개인적인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수용은 이런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평등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본래 혈통에 의해 차별화된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과 천민을 구분, 차별화하는 양천 제도가 있을 수 없다. 이같은 사상을 제시한 것이 기독교의 성경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의하면 혈통신분제는 인간사회, 특히 지배층이 독점적 지배를 위해 ‘숙명적인 질곡’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 사상에서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반인간적이고 반천륜적인 제도다. 노비제도와 양천(良賤)제도를 정비한 법제적 검토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이뤄졌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인민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과한 후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이런 혈통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실질적인 인민평등을 촉진한 것은 예수교요 그 기반인 성경이었다. 따라서 한말 성경에 기반한 예수교회에서는 혈통신분제를 극복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 박서양(朴瑞陽) 부자가 양반 신분 못지 않게 활동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은 혈통신분제를 용납하지 않는 성경과 교회 때문이었다.

혈통신분제를 극복해 가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한국 사회는 서서히 군주ㆍ양반 중심의 전제군주적 구왕조(舊王朝) 회복을 의미하는 복벽(復辟) 사상을 극복하게 되었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제도’인 민주공화정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3.1운동이었다.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가 참여한 3.1운동은 그 독립선언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천명했다.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의 염원이 제도적으로 실현된 것이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1919년 4월의 대한민국의 약법(헌법)은 이를 보증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기독교의 이런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조밀하게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만민평등의 성경적 세계관이 한국의 민주화에 이렇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 이만열,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서울: 대한성서공회, 2011), 7~54페이지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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